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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여행

자전거, 가장 가파른 길은 가장 연약한 힘으로 넘는다

by 이윤기 2011.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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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한번 꽂히면 꽤 집중력을 발휘하는 편입니다. 꽤 오래전에는 요가에 꽂히는 바람에 3~4년 동안 꾸준히 요가수련을 하였으며 발리의 아쉬람에 한 달 동안 머무르기도 하였고 나중엔 내친김에 지도자 자격증을 따버렸습니다.

뭔가 새로운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을 때까지 비교적 꾸준히 집중력을 발휘하는 편입니다. 최근에는 자전거에 다시 꽂혔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자전거를 배운 이후로 늘 자전거를 가까이 하였습니다.

4년 전 큰 아이와 첫 번째 자전거 국토순례를 다녀와서 2년 가까이는 이른바 '자출족' 생활도 했습니다. 이번 여름 자전거 국토순례를 다녀오면서 다시 자전거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첫 번째 자전거 국토순례 때에는 생활자전거인 유사 MTB를 타고 다녀왔는데, 올해 두 번째 자전거 국토순례를 다녀오면서 큰 마음먹고 MTB 자전거를 구입하였습니다.

4년 만에 다시 자전거에 꽂히다

전에는 자전거를 타면 가급적 평지로 다니려고 하였는데, 새로 산 자전거를 타고 창원 성주사, 진해 장복산 하늘마루, 마산 대산 바람재를 다녀보면서 산길, 숲길, 언덕길을 다니는 재미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뭔가에 꽂히면 처음 나타나는 증상은 먼저 그 분야의 책을 사는 것입니다. 요가에 꽂히면 요가 책을 사고, 히말라야 트레킹에 꽂히면 히말라야 여행기를 사들이는데 이번에는 자전거 책을 사들였습니다.

자전거에 대한 관심은 크게 두 가지에 집중되고 있는데, 하나는 자전거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자전거 정비입니다. 국토순례를 다녀오고 나서 내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에 대한 기본적인 점검과 수리는 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자전거 여행 책입니다. 때가 언제일지 목적지가 어디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자전거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해보고 싶은 목표가 마음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김훈의 자전거 국토순례, 부럽다

가장 먼저 손에 든 책은 김훈의 <자전거 여행>입니다. <칼의 노래>로 잘 알려진 유명 작가 김훈의 자전거 여행 기록을 모은 책입니다. 마산에서 임진각까지, 전남 강진에서 임진각까지 앞만보고 달린 국토순례와는 수준이 다른 여행기입니다.

<자전거 여행>은 간결한 글쓰기로 유명한 김훈이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전국의 산천으로 자전거 여행을 다녀온 기록입니다. 어떤 것은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고 또 어떤 곳은 특별한 기약도 없이 며칠을 머무르며 느끼고 사색하는 여행이었습니다.

만경강 저녁 갯벌과 도요새, 늦가을의 태백산맥, 눈덮인 소백산맥, 노령, 차령산맥, 따뜻한 봄볕이 내리쬐는 남쪽 바닷가 여수와 진도를 지나간 이야기, 도산서원과 하회마을, 지리산 쌍계사와 문경새재, 한강을 따라 달리는 잠실, 여의도, 조강까지 이어지는 자전거 여행입니다.

<자전거 여행>이라는 책 제목 때문에 자전거 이야기가 많은 줄 알았습니다만, 프롤로그에서 자전거를 타는 인간의 몸을 상세히 묘사한 것이 빼곤 대부분 여행이야기였습니다. 제목 중에서 '자전거' 보다는 '여행'에 방점이 찍혀있는 책입니다.

<자전거 여행>은 작가 김훈의 여행기인데, 차를 타고 다닌 여행이 아니라 이름만 들어도 풍류가 느껴지는 그의 자전거 '풍륜(風輪)'을 타고 전국의 산천을 돌아다닌 것이지요. 풍륜, 풍륜은 수미산을 버티고 있는 삼륜의 하나이기도 하고, 바람의 신을 이르기도 한답니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자전거,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자전거에 딱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김훈은 자전거를 타고 갈 때 세상의 길은 몸속으로 들어온다고 하였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강물이 생사가 명멸하는 시간 속을 흐르면서 낡은 시간의 흔적을 물 위에 남기지 않듯이, 자전거를 저어갈 때 2,5000분의 1지도 위에 머리카락처럼 표기된 지방도, 우마차로, 소로, 임도, 등산로 들은 몸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몸 밖으로 흘러나간다." (본문 중에서)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긴긴 시간동안 자전거를 타고 산천을 누비고 다닌 작가는 자전거를 타고 길을 달릴 때, 몸과 길은 자전거를 서로 통해 연결된다고 말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본문 중에서)

자전거를 타고 길을 달리면 자전거 바퀴를 굴리는 사람 몸이 체인으로 연결된 구동축을 따라 길 위로 퍼져 나가며, 길은 몸 안으로 흘러들어왔다가 몸 뒤로 빠져나가기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오르막과 내리막 길은 땅위에서 비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험으로 깨닫는 것이지만 모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정확하게 비긴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르막과 내리막을 다 더하면 평탄한 길이라는 것이지요. 김훈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본문 중에서)

그런데 막상 자전거를 타고 가파른 오르막을 오를 때는 김훈이 쓴 구절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는 동안에는 뒤이어 나타날 내리막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숨이 차오르는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온 몸과 마음의 피곤은 내리막길을 달리는 동안 어렵지 않게 상쇄됩니다. 그래서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긴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프롤로그에는 오르막을 오르는 기어가 사람의 몸과 어떻게 결합하는지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런 노련한 문장을 읽을 때면 그가 뛰어난 작가라고 하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됩니다.

"오르막을 오를 때 기어를 낮추면 다리에 걸리는 힘은 잘게 쪼개져서 분산된다. 자전거는 힘을 집중시켜서 힘든 고개를 넘어가지 않고, 힘을 쪼개가면서 힘든 고개를 넘어간다. 집중된 힘을 폭발시켜가면서 고개를 넘지 못하고 분산 된 힘을 겨우겨우 잇대어가면서 고개를 넘는다." (본문 중에서)

자전거가 가파른 오르막을 오를 때 힘을 집중시켜서 오르는 것이 아니라 힘을 쪼개가면서 고개를 넘는다고 하는 것은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길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경험입니다.

그의 말처럼 힘을 집중시켜 오르막을 오르는 초보자는 금새 지쳐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힘을 쪼개가면서 가파른 고개를 넘을 줄 알면 이미 초보를 면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높은 긴 고갯길이라 하여도 끝없이 힘을 잘게 쪼개며 쉬지 않고 패달을 밟는 자를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의 힘을 잘게 쪼개주는 것은 기어가 하는 역할입니다. 1단 기어가 고개이 가파름을 가장 잘게 쪼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어 변속을 적절하게 잘 하면 힘을 조절하여 가파른 언덕을 오를 수 있는 것이지요.

"1단 기어의 힘은 어린애 팔목처럼 부드럽고 연약해서 바퀴를 굴리는 다리는 헛발질하는 것처럼 안쓰럽고, 동력은 풍문처럼 아득히 멀어져서 목마른 바퀴는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데, 가장 완강한 가파름을 가장 연약한 힘으로 쓰다듬어가며 자전거는 굽이굽이 산맥 속을 돌아서 마루턱에 닿는다." (본문 중에서)

그는 땅위의 모든 길을 다갈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나가는 일은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 살아서 몸으로, 몸이 간직하고 있는 인간 동력으로 바퀴를 굴려 가는 일은 분명 기쁘고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가파른 길은 힘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분산해서 넘는다

앞서 읽었던 다른 자전거 여행기에서는 볼 수 없는 빼어난 자전거 예찬론입니다. 어느 날 불쑥 걷기 여행을 떠난 김종휘는 그의 여행기에서 "황안나의 탄력, 홍은택의 몸매, 김남희의 기운, 김훈의 눈길"을 갖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자전거 여행>을 보면 왜 그가 김훈의 눈길을 갖고 싶어 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문장들 때문이었을 겁니다.

"돌산도 향일암 앞바다의 동백숲은 바닷바람에 수런거린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나무가 몸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은 품어져 나오듯이 피어난다. 매화는 피어서 군집을 이룬다. 꽃핀 매화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선암사 뒷산에는 산수유가 피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으로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본문 중에서)

<자전거 여행>은 김훈의 시선과 특유의 간결한 문장으로 씌어진 책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 다녀 간 여행지에 있는 유적과 문화재에 대한 해석, 그리고  역사와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해박한 지식에 또 한 번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자전거로 그가 갔던 길을 쫓아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킵니다. 남도 여행객들이 유홍준 선생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들고 다니던 모습처럼, 자전거를 타는 여행자들이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배낭에 넣고 다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전거 타는 사람

당신의 다리는 둥글게 굴러간다
허리에서 엉덩이로 무릎으로 발로 페달로 바퀴로
길게 이어진 다리가 굴러간다
당신이 힘껏 밟을 때만다
넓적다리와 장딴지에 바퀴무뉘 같은 근육이 돋는다
장딴지의 굵은 핏줄이 바퀴 속으로 들어간다
근육은 바퀴 표면에도 울퉁불퉁 돋아 있다
자전거가 지나간 길 위에 근육무늬가 찍힌다
둥근 바퀴의 발바닥이 흙과 돌을 밟을 때마다
당신은 온몸이 심하게 흔들린다
비포장 도로처럼 울퉁불퉁한 바람이
당신의 머리칼을 마구 흔들어 헝클어뜨린다
당신의 자전거는 피의 에너지로 굴러간다
무수한 땀구멍들이 벌어졌다 오므라들며 숨쉬는 연료
뜨거워지는 연료 땀이 솟는 연료
그래서 진한 땀냄새가 확 풍기는 연료
그 연료가 타는 힘으로 당신의 다리는 굴러간다
당신의 2기통 콧구멍으로 내뿜는 무공해 배기가스는
금방 맑은 바람이 되어 흩어진다
투명한 콧김이 분수처럼 되어 솟아오른다
달달달달 굴러가는 둥근 다리 둥근 발
동근 속도 위에서 피스톤처럼 힘차게 들썩거리는
둥근 두 엉덩이와 둥근 대가리
그 사이에서 더 가파르게 휘어지는 당신의 등뼈
(김기택 시인)

 

자전거 여행 - 10점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생각의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