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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언젠가 꼭 들키고 싶어 훔치는 천재 도둑

by 이윤기 2013.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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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닙니다. 그런데, 기분이 우울한 날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좀 하려고 들어간 도서실 책꽂이에서 우연히 소설 <가시고백>을 발견했습니다. 그냥 책꽃이에 도로 꽂아 놓을 뻔 했는데 <완득이>를 쓴 김려령 작가의 작품이라는 광고를 보고 책을 펼쳐 읽게 됐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우울한 기분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아이들이 주요 등장 인물인 청소년 성장 소설인데 입니다. 이런 소설을 읽을 나이는 벌써 지났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뜻밖에 만난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가시고백>은 스스로 타고 난 프로패셔널 도둑이라고 생각하는 해일이라는 소년이 주인공입니다. 주인공 해일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면 말 그대로 그냥 '도둑놈'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해일이 타고 난 도둑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선천적으로 남들보다 유난히 빠르고 예민한 손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해 감쪽같이 남의 물건을 훔치는 탁월한 도둑입니다.

 

"생계형 도둑이 아닌 말 그대로 순수한 도둑이다. 강도가 아니라 흉기를 지녀서는 안 되면 사람을 헤쳐도 안 된다. 몸에 지닌 지갑이나 가방에 손을 대는 소매치기도 아니다. 나는 거기에 있는 그것을 가지고 나오는 그런 도둑이다."(본문 중에서)

 

해일이 자신에 대해 일기장에 쓴 글입니다. 제법 근사한 자기소개지요. 이 도둑은 말 그대로 생계형 도둑이 아닙니다. 남의 물건을 훔쳐 인터넷을 통해 판돈을 용돈으로 쓴다거나 갖고 싶은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꼬박꼬박 저축합니다. 딱히 돈이 필요하지 않는데도 직업(?)이기 때문에 그냥 훔친다는 것이지요.

 

남들보다 빠른 손을 가진 민첩한 도둑

 

이 도둑은 작은 것을 훔치는 날 들키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작은 것을 훔치는 날 들키면 용서를 구하고 도둑질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바람과는 달리 값비싼 물건을 훔친 날만 친구들에게 들키게 됩니다.

 

돈이 필요해서 훔치는 생계형 도둑이 아니라 그야말로 타고 난 능력대로 몸이 먼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 남의 물건을 감쪽같이 가져오는 도둑인 것입니다. 소설은 이 별난 도둑이 친구 아빠의 '전자수첩'을 훔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버지의 전자수첩을 빌려 자랑을 하러 학교에 지영. 해일이는 지영이 아버지의 전자수첩을 훔쳐 팔았습니다. 이후 얻은 수입을 저축합니다. 뭔가에 홀린 듯 훔친 전자수첩을 팔고온 날, 해일은 인터넷에서 본 병아리 부화기 재료를 사와 수제 부화기를 만듭니다.

 

해일은 중학교 2학년에게 잘 어울리는 일은 아니지만, 유정란을 부화시켜 병아리를 만드는 실험을 시작합니다. 덩달아 이 집 가족들도 모두 병아리 실험의 동조자가 됩니다. 부화기에서 수정란이 만들어 질 무렵, 해일은 담임선생님과도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고 마음을 알아주는 새로운 친구들도 생깁니다.

 

해일은 자신이 직접 부화시킨 병아리를 보러 집으로 몰려 온 아이들과 친구가 됩니다. 친구가 된 아이들은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상처를 드러냅니다. 지영은 엄마와 이혼한 아빠와의 불편한 관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해일은 자신이 지영 아버지의 전자수첩을 훔친 도둑이었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사실 이 타고난 도둑은 오래전부터 누군가에게 자신의 도둑질이 발각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급적 작은 물건을 훔치는 날, 언젠가 자신의 도둑질이 발각되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멈출 수 없었던 도둑질을 그만 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해일 스스로 완벽한 솜씨라고 믿었던 도둑질은 두 번 다 친구들에게 들켰습니다. 지영의 새아버지 전자수첩을 훔친 날은 해일을 좋아하는 반장 다영에게, 이혼하고 혼자사는 지영의 친 아버지 넷북을 훔친 날은 친구 진오에게.

 

어른들보다 사려 깊은 십대들

 

진오에게 넷북 도둑질을 들킨 날, 해일은 오랫동안 혼자만 숨겨왔던 비밀을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털어놓습니다. 진오는 해일이 도둑이란 것을 알고 혼란스러워했지만, 해일을 도둑이 아닌 그냥 친구로 받아들입니다. 해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 줄 뿐만 아니라 먼저 믿어주고, 사연을 들어 주고, 그 마음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작가는 해일을 상습적으로 도둑질을 일삼는 아이지만, 미운 구석이 별로 없는 인물로 그려냈습니다. 아울러 유정란을 직접 부화시킨 병아리를 살뜰하게 키우는 천진난만한 모습을 가진 아이로 그려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나쁜 놈'이라기보다는 '안타까운 아이'로 느껴지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아이로 말입니다.

 

어른들보다 훨씬 사려 깊은 중학생들은 해일이 도둑질을 할 때마다 하나씩 해일의 마음에 박혀있던 굵은 가시들을 하나씩 뽑아줍니다. 그냥 또래의 평범한 중학생 남자아이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특히 반장 다영은 해일이 전자수첩을 훔치는 것을 목격하고도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을 덧없이 잃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백설 공주>에 나오는 '왕비의 거울'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미워하던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또 다시 거울을 향해 '누가 가장…'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도록, 아니 누군가를 미워하는 이유를 만들지 않도록 마음 속에 있는 왕비의 거울을 내다 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해일처럼 털어놓고 싶은 비밀을 감추고 살아가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밀을 틀어놓고나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을 감당할 수 없어 그냥 그 비밀을 안고 살지도 모릅니다. 마음에 아픈 가시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마음에 박힌 가시를 뽑아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가시고백 - 10점
김려령 지음/비룡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