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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한 복판의 도적떼 소굴...스위스?

[서평] 장 지글러가 쓴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스위스'에 대한 환상을 완벽하게 깨는 책입니다. 알프스 산맥과 수려한 자연환경, 세계 최고 수준의 정밀 기계공업과 장인들, 영세 중립국,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제네바와 취리히 같은 도시들이 있는 나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체제와 지방자치의 선진국으로 알려진 나라가 바로 스위스입니다.

 

그러나 스위스 출신 사회학자이자 변호사이면서 사회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 활동했던 장 지글러가 쓴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를 읽고 나면, 스위스에 대한 이런 환상이 완전히 깨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장 지글러는 이 책에서 자신의 조국인 스위스의 관료사회와 금융회사 수장들의 부정부패, 그리고 부패에 굴복하는 정치제도를 고발합니다. 이 책은 정말 상상조차 못했던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이 책에 따르면,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범죄 영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들이 스위스와 스위스를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적인 범죄 네트워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부자들과 범죄자들 그리고 제 3세계 독재자들이 스위스 은행들에 비밀계좌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흔히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규모와 범죄자, 독재자들에 대한 스위스 당국의 비호와 보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례를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아주 최근까지 스위스에서 조세 회피는 범죄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하고 '해외계좌세법준수법'(미국인의 해외계좌에 대하여 미국에 통보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어 스위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한 후에야 스위스 정부의 세법이 일부 수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법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스위스 판사들이 외국인과 외국 기업들이 스위스에 개설한 불법계좌를 추적하는데, 여전히 협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가 빼돌린 재산을 돌려받기 위한 소송이 12년이나 걸린 것처럼 사법 공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제3세계 독재국가 지도자들이 국부를 빼돌려 축적한 재산들은 스위스 비밀계좌에 숨겨지고 있습니다. 5초마다 열 살 미만의 어린이가 기아로 목숨을 잃는 나라, 또는 49억 명이 기아에 시달리는 나라에서 빼돌린 재산이 스위스 비밀계좌에 담겨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같은 나라에서도 부패한 관료들이 빼돌린 국고와 탐욕스러운 기업들이 빼돌린 세금이 스위스 비밀계좌에 감춰지고 있으며, 이들 나라에서 하나 같이 일자리 불안이 커지고, 비정규직이 늘어나며, 급여 삭감, 빈부격차가 증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알프스에 대한 환상을 깨라, 가장 부패한 나라 '스위스'

 

아울러 유럽과 남미 그리고 중동을 연결하는 마약과 무기를 밀매하는 범죄네트워크에서 벌어들인 막대한 불법 자금들 역시 속속 스위스 비밀 계좌에 숨겨지고 이들 비밀 계좌를 거쳐 돈세탁을 마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장 지글러는 스위스가 오늘날 지구상에서 손꼽히는 부자나라가 된 것은 모두 이들 검은 돈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는 아랍에미리트연방이며, 스위스가 그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부자 나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연방이 자랑하는 천연자원은 두말할 나위 없이 석유다. 그렇다면 헬베티아 수장국의 자원은? 남의 돈이다." (본문 중에서)

 

"1989년 현재 스위스 중앙은행은 2590톤의 금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중앙은행 금 보유량으로는 세계 3위에 해당한다. 지구 전체에서 인간이 거주하는 지역 면적의 0.15퍼센트에 불과한 좁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라고 해야 세계인구의 0.03퍼센트가 고작인 이 작은 나라는 전 세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세계2위 금융시장, 세계 1위 금시장, 세계 1위 재보험시장이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이 뿐만 아니라 어떤 돈이든 집어 삼키는 막강한 스위스 은행들이 보유한 자산규모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라고 합니다. 세계적인 잡지 <유로머니>가 공개한 세계에서 가장 힘센 주요 은행의 목록을 보면 상위 25개 은행 중에 상위 순위를 UBS, 크레디 스위스, SBS와 같은 스위스 은행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스위스 은행들을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금융기관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하는 자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고 합니다. 장 지글러는 이를 깨끗한 돈, 회색 돈, 검은 돈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거래를 통한 깨끗한 돈,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활동하는 지도급 인사들이 자국 정부의 징세를 피하기 위해 도피시킨 자금 또는 제 3세계의 적지 않은 지도자들이 불법적으로 빼돌린 돈을 가리키는 회색돈,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검은 돈 또는 더러운 돈, 이렇게 세 가지다."(본문 중에서)

 

검은돈이란, 짐작하다시피 마약이나 무기 밀매를 비롯하여 다른 여러 범죄 활동에 가담하는 조직들이 벌어들인 일종의 장물 내지 전리품과 같은 자금들을 말합니다. 이런 돈이 스위스에 몰리게 된 것은 1934년 11월 8일 스위스에서 제정된 '은행비밀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나쁜 돈이 모이는 나라, 스위스

 

이때부터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숨기고 싶은 돈, 주인이 누구인지 밝히고 싶지 않은 돈, 어떻게 벌어들인 돈인지 감추고 싶은 모든 돈은 모두 스위스로 몰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위스 은행들은 이런 비밀 계좌에 담긴 돈으로 세계 금융시장을 주무르며 세계 최고 수준의 금융 수익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지요.

 

장 지글러가 밝힌 검은돈의 흐름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볼까요? 이미 20년 전의 자료이기는 합니다만, 스위스 은행으로 유입되는 마약 밀거래 관련 수익으로 금융시장에 투자되는 자금의 규모는 연간 5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는 미국 국방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규모이며, 서양의 모든 국가들이 한 해 동안 석유를 구입하기 위해 지출하는 총액에 버금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깨끗하게 세탁된 돈은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파리나 뉴욕의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돈은 도쿄, 런던, 시카고 등지의 증권거래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뉴욕에 자리 잡은 시망 받는 기업들의 대차대조표에서 장기대출금으로 잡힌다."(본문 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모두 고객에 대한 비밀 보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스위스의 '은행비밀법'과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와도 절대로 자금출처를 조사하지 않는 스위스의 금융제도, 그리고 범죄와 관련된 돈의 입출금을 막지 않는 금융제도가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런 제도적 바탕 위에 스위스 은행가들의 부도덕과 은행을 감독해야 할 스위스 고위관료들의 부패 그리고 때로 무능하고 때로 부패한 사법 당국의 협조까지 한 몫하고 있습니다. 국가 시스템 전체가 총제적 부패에 기반하고 '유럽 한가운데 놓인 해적 떼의 소굴'이라는 장 지글러의 지적이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당대 스위스를 대표하는 양심적 지식인 중 한 명인 장 지글러가 자신의 조국을 '해적 떼의 소굴'이라고 지칭하는 까닭은 이 정도로 충분히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좀 더 구체적인 사례와 자세한 통계 숫자, 마약과 무기 밀매의 경로가 궁금한 독자들은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를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남미, 미국, 중동, 유럽을 연결하는 마약과 무기밀매 네트워크,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와 아이티의 독재자 베베독, 자이르의 독재자 모부투가 각각 독재의 권좌에서 빼돌려 스위스 은행에 숨긴 천문학적인 규모의 국부 유출에 대하여 알고 싶은 독자들도 직접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필리핀과 아이티, 자이르의 새로운 정부들이 아직도 민중을 수탈해 간 이 자금을 되찾아가지 못하는 까닭도 알 수 있습니다. '오랜 민주주의의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여전히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탐욕에 찌든 나라...가장 낙후된 민주국가 스위스

 

장 지글러는 자신의 조국을 일컬어 '탐욕으로 병든 나라'라고 지칭합니다. 민간 사회지도층에서 시작된 부패와 탐욕의 혜택이 스위스의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나눠지고 있고, 다수는 이미 자신들의 부도덕을 자각하지도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개탄합니다.

 

그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스위스의 민주주의와 연방제는 오늘날 가장 낙후된 민주주의가 되어 버렸으며, 납득하기 어려운 부패와 무능으로 침몰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 책은 1990년 초판 1쇄가 나온 이후 전 세계 28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는 이 책 출간으로 스위스에서 의원 '면책 특권'을 박탈당했으며, 스위스 주요 언론들로부터 '조국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 자신과 가족들이 모욕 당하고, 살인의 위협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는 익명이라고는 없습니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은행들 그리고 그 은행을 이끌어가고 있는 수장들, 스위스 정부 관료와 사법 기관의 공무원들 그리고 세계적인 범죄 네트워크의 두목들을 모두 실명으로 거론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친일인명사전처럼 스위스의 금융범죄 인명사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책을 읽는 내내 어떻게 이렇게 모두 실명을 까발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하면서 줄소송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십분 이해하였지요.

 

무려 다섯 개 나라에서 아홉 건의 소송에 휘말리고 은행의 신뢰도와 명예를 훼손시킨데 대한 책임을 물어 수백만 스위스 프랑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지만, 누구도 이 책에 담긴 사실관계에 대한 오류를 찾아내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기억되어 있던 스위스에 대한 환상을 밑바닥부터 송두리째 바꿔놓는 핵폭탄 같은 위력을 가진 책입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깡패같은 제국주의 미국보다는 그래도 영세중립국 스위스가 좀 더 좋은 나라라고 생각되시거든 이 책을 읽고 꼭 다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 10점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홍기빈 해제/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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