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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형님 빽으로 다녀 온 중국 유람...아 놀랍다

by 이윤기 2014.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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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과 함께 교과서에 나오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박지원의 대표저서는 <열하일기>. 여기까지가 고등학교 졸업 이후 마흔을 훌쩍 넘길 때까지 박지원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전부입니다.

 

'박지원이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힌다는 것은 마흔이 넘어 읽은 소설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열하일기>를 읽게 된 것은 제가 속한 단체 회원들과 함께 읽을 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제목만 기억하고 있는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회원들과 함께 읽은 <열하일기>는 북드라망에서 출간한 고미숙 등이 번역한 책입니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단 하나의 텍스트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열하일기>를 들 것이다. 또 동서고금의 여행기 가운데 오직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또한 <열하일기>를 들 것이다." (본문 중에서)
 

다른 책을 읽으며 쌓인 고미숙의 텍스트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이 책을 골랐습니다. 아울러 서문에 나오는 그이의 <열하일기> 예찬론을 듣고 나면 더욱 흥미가 솟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질적인 대상들과의 뜨거운 접속의 과정이고, 침묵하고 있던 말과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발굴의 현장이며, 예기치 않은 담론들이 범람하는 생성의 장이다." (본문 중에서)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를 나열한 흔해 빠진 여행기와는 차원이 다른 여행기가 바로 <열하일기>라는 것입니다. 연암 박지원이 참여했던 사행단은 1780년 5월 25일 한양을 출발하여 6월 24일에 압록강을 건넌 후 8월 1일 연경에 도착하였습니다. 압록강부터 연경까지의 거리는 33참 2030리 길입니다.

 

자동차가 있는 오늘날에는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하루 만에도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만1780년에는 보통 먼 길이 아니었더군요. 여행기 곳곳에는 사행단이 강을 건너면서 겪은 어려움이 반복되어 나오는데, 강에 다리가 놓여있지 않은 당시에 강을 건너는 것이 그야말로 가장 큰 일에 속하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답니다.

 

 

 

한양-압록강-연경-열하 왕복 5000리 여정

 

청나라 사행단은 연경에서 머물다가 국내로 돌아오는데, 박지원이 참여했던 사행은 황제가 연경을 떠나 열하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연경에서 다시 열하까지 사행이 연장되었습니다. 박지원이 참여했던 사행단이 열하까지 다녀오는 특별한 일정이었기 때문에 이 여행기의 제목이 <열하일기>로 되었던 것입니다.

 

압록강을 거쳐 연경까지 가는 길은 여느 사행단과 다름이 없었지만, 북경에서 열하까지는 아무도 다녀온 일이 없는 초행길이었다고 합니다. 황제의 행재소가 있었던 열하는 북경에서 또 다시 420리 동북쪽에 있는 위치하고 있었답니다.

 

8월 1일 연경에 도착하여 황제의 명을 기다리던 사행단은 열하로 오라는 황제의 부름을 받고 장거리 여행에 지친 사행단의 규모를 축소하여 8월 5일에 다시 열하로 향합니다. 황제의 부름을 받은 칠순 잔치에 늦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달려 8월 8일 열하에 도착하여, 14 일까지 열하에 머무르다 연경을 거쳐 그해 10월 27일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고미숙 등이 번역한 <열하일기>는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는 도강록에서부터 시작하여 연경을 거쳐 열하까지 갔다가 연경으로 되돌아 온 8월 20일까지의 여행 과정을 그때그때 기록한 글과 인상 깊은 장소와 사건에 대하여 따로 제목을 달아 쓴 글들을 두 권으로 번역한 책입니다.

 

박지원이 연경을 거쳐 열하까지 다녀오는 사행에 참여하는 행운을 얻은 것은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축하를 위한 사절에 그의 삼종형 박명원이 정사로 임명된 덕분이었습니다. 정사는 말하자면 사행단장에 해당되는데, 연암이 사행단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영조의 사위였던 '형님의 빽'으로 특별한 임무 없이 연경을 거쳐 열하까지 유람을 다녀왔던 셈입니다.

 

<열하일기>를 읽어보면 연암이 중국(청나라와 그 이전 왕조를 모두 포함하여)의 문화를 높게 그리고 좋게 평가하고 대신 조선을 한심하게 평가한 대목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산'이라고 했을 때 '품질 낮은 제품'이라고 하는 선입견을 가진 것과는 전혀 딴판으로 중국의 앞선 문화와 문물을 칭송하는 글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조선의 그릇 굽는 가마는 열효율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이야기나 불길이 잘 들게 쌓은 중국식 벽돌 가마의 장점을 묘사한 것이나 석성대신 벽돌로 쌓은 중국 성벽이 노력을 덜 들여도 견고하다는 것, 그리고 수레의 보급이나 도로 정비 등이 잘 되어 물류의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입니다.

 

 

 

18세기 동아시아의 선진국 청나라 여행

 

특히 조선이 전쟁과 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말도 제대로 사육하지 못하면서 '북벌' 운운하는 것을 매우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제주 목장에는 방목한 말들은 세조 이래 400년 동안 종자를 개량하지 않아 조랑말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전쟁에는 쓸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궐에서 기르는 말에서부터 장수들이 타는 말에 이르기까지 토산 품종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모두가 요동이나 심양등지로부터 사들인 말들이다. 한 해에 새로 생기는 말이라고는 겨우 너댓 필에 불과하니 만일 요동이나 심양 길이 끊어지는 날이면 또 어디에서 말을 얻을 것인가." (본문 중에서)

 

임금을 호위하는 백관들은 말이나 나귀를 빌려 타고 임글을 따르고, 군영의 장수들도 말을 빌려 타고 훈련을 하러 나가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선에는 좋은 말 종자도 없고, 말을 제대로 사육 할 줄도 모르며 말을 수송과 군사 목적으로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보다 우리나라 선비들이 글씨가 뒤쳐지는 까닭을 설명한 대목도 인상적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옛 사람들의 진짜 글씨를 접할 기회가 없어 금석에 새겨놓은 글씨를 보고 익히는 탓도 있지만, 품질이 조악한 우리나라 종이와 붓도 문제라고 불만을 토로 하였더군요.

 

"우리나라 종이는 다듬지 않으면 결이 거칠어 쓰기 힘들고, 다듬질을 지나치게 하면 표면이 빳빳해져서 붓이 잘 머무르지 않고 먹을 잘 받지 못한다. 그런 이유로 조선의 종이가 중국의 종이만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중략) 붓은 부드러워 손이 가는 대로 잘 따라 주는 것을 최고로치지, 뻣뻣하고 날카로운 붓을 좋은 붓이라 일컫지는 않는다." (본문 중에서)

 

연암은 조선의 붓을 "마치 제멋대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철부지 어린애와 갔다"고 불평할 뿐만 아니라 명품인 마간석 벼루에다 명품인 후칠 먹을 갈아서 왕희지의 글씨체를 따라 써봐야 종이와 붓이 형편없으니 글씨도 볼품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18세기 조선에서는 황금을 흙처럼 여겼다는데...

 

<열하일기>가 워낙 방대하고도 자세한 기록인지라 새롭고 신기한 이야기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에피소드를 하나 더 소개해보면 '금'이야기입니다. 금은보화라는 말처럼 많은 옛이야기 속에 금은 진귀한 보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18세기에 씌어진 <열하일기>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서는 금이 별로 값어치가 없었다고 합니다. 연암이 열하에서 황금으로 지붕을 만든 궁궐의 누각을 보고 쓴 글입니다. <열하일기>를 따르면 만나는 중국 장사치들마다 앞 다투어 조선 금을 사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연암협에 있는 우리집이 송도에 가까워서 가끔 그곳에 드나들곤 했었다. 송도는 연경에 드나드는 장사치들의 거점이었다. 해마다 칠팔월부터 시월까지 금값이 폭등하여 한 푼쭝에 엽전으로 마흔다섯 닢, 또는 쉰 닢씩 하지만 조선에서는 금을 쓸 곳이 많지 않았다...(중략)또 시집가는 색시의 가락지나 머리꽂이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금은 그 가치가 흙이나 별 차이가 없그늘, 이곳에서 금이 이토록 귀하게 취급되는 건 어인 까닭일까." (본문 중에서)

 

엽전으로 마흔다섯 닢 혹은 쉰 닢의 값어치가 지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니 지금 금값과 비교해 볼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당시 조선에서는 그다지 금을 귀하게 치지도 않았고 그 값어치가 흙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하니 좀처럼 납득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연암이 18세기를 대표하는 걸출한 학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은 학교에서 배운 역사 공부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열하일기>를 보면 해박한 지식과 넓고 깊은 공부를 헤아려 볼 수 있는 대목이 자주 등장합니다.

 

<사기>를 비롯한 성현들이 쓴 여러 옛 책에서 인용한 대목과 조선의 옛 문헌에서 인용한 대목이 워낙 많기 때문입니다. 또 중국 지식인들과의 필담을 보면 조선의 역사와 문화 지리와 천문은 물론이고 중국 시문과 역사와 문화를 두루 꿰고 있습니다. 18세기 조선과 중국(청나라)에 관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기록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열하일기>를 보면 중국 지식인뿐만 아니라 장사치들도 연암의 내공을 대번에 알아봅니다. 연암의 내공(?)을 알아 본 많은 중국 지식인들이 연암과 교류하고 싶어 하고, 학문을 하는 않는 거리의 장사치들은 연암에게 글이라도 받고 싶어 합니다.

 

<열하일기>를 보면 연암은 사람을 별로 가리지 않습니다. 특히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은 중국의 장사치들입니다. 필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장사치들과 만나 여행지 경로가 아닌 여러 고장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호기심을 채우는 대목이 여러 차례 있습니다.

 

만주 말과 한족 말을 할 줄 모르지만 붓과 종이만 있으면 필담을 통해 중국 지식인들과 학문을 논하고 문물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실제로 <열하일기>는 연암이 직접 보고 기록한 것과 한자로 소통할 수 있는 중국 사람들과 주고받은 필담을 기초로 씌어졌습니다.

 

중국 지식인들과 주고받은 필담을 보면 연암의 높은 학문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호쾌한 성품까지도 읽을 수 있습니다. 또 그가 쓴 여행기를 보면, 그가 남다른 호기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흔들리는 말을 타고 가면서도 하루하루 보고 들고 경험한 일을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겼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됩니다.

 

한편 <열하일기>는 번역본이라도 주석이 없으면 문장을 읽고도 그 뜻을 바르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수두룩한데 그 까닭은 이른바 고전의 반열에 든 옛 책들에서 인용한 문장들이 워낙 많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이 책에는 그런 문장마다 모두 주석이 붙어 있습니다. 또 본문과 관련 있는 수많은 사진과 삽화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모두 독자를 위한 번역자들과 편집자들의 세심한 수고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다른 번역본 <열하일기>를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매 쪽마다 등장하는 주석과 삽화를 보면 이 책보다 친절한 번역본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번역자들이 청소년들도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였다고 하니 어른이 읽기에는 어려움이 없는 책이라고 여겨집니다. 조선 최고의 문장을 꼭 일독해보시기 바랍니다.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상 - 10점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북드라망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하 - 10점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북드라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