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과 세상/책과 세상 - 시사, 사회

노무현정부, 세 번 기회 다 놓쳤다.

by 이윤기 2009. 1. 20.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서평]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가 엮은 <노무현시대의 좌절>


노무현 전 대통령을 처음 본 것은 20여 년 전 대학 시절 당시 마산지방법원 재판정이었다.  당시 그는 변호사 신분이었다.


그 날은 훗날 민주노동당 대표를 지낸 통일중공업 노조위원장 문성현 사건 재판이 열리던 날이었다. 


서울 상대 출신 지식인 청년(문성현)이 노동자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과정과 이 땅의 노동현실과 민주주의에 대해 격정적인 최후 변론을 하는 노무현 변호사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로부터 몇 년 후 87년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마산창원지역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이 건설될 무렵 어느 가을날, 수출자유지역에서 열린 마창노동자 집회에서 노동자들을 향해 노동악법철폐를 주장하는 연설을 하던 노무현 변호사를 기억하고 있다.

노동자 입장에서 노동악법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연설을 듣던 노동자들이,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을 외치던 그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이때만 하여도 아무도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대통령 선거를 얼마 앞둔 어느 날 밤, 창원에 있는 모 복지관 회의실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대통령 후보 노무현을 만났다.

노무현에 대한 기억 몇 가지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당선했고, 개표 방송이 있었던 그날 밤, 당선 확정된 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무 기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바로 그의 승리가 가지는 특별한 의미와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종필과 손잡은 DJP 연합과 같은 비겁(?)한 방식이 아니라 국민참여 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가 되고, 초기 여론조사 결과를 꾸준히 뒤엎고 마침내 당선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국정치를 왜곡해왔던 기득권구조인 보수언론, 지역주의, 그리고 재벌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축적한 정치 자산으로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 진보, 개혁 진영에서 일하던 여러 선배들이 청와대와 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보며 기대를 키웠고, 탄핵정국을 거치며 의회에서 진보개혁진영이 수적 우위를 점하고 대대적인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그런 기대가 현실이 되는 줄 믿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을 필두로 하는 4대 개혁입법 실패, 그리고 대연정 제안으로 개혁세력을 혼란스럽게 하더니 지지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미 FTA 타결이라는 어이없는 짐을 지워놓고 임기를 마쳤다. 노무현 정부는 개혁과 진보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한국사회에 실현시키는데 실패하였다.



촛불집회의 성공과 노무현정부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에 소속된 구갑우를 비롯한 13명 연구자들이 쓴 글을 모은 <노무현 시대의 좌절>에서 필자들은 "촛불집회의 찬란한 성공과 이후 우여곡절의 직접적 원인은 노무현 정부의 실패"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노무현정부의 실패는 정권 담당자들만의 책임이 아니라 진보개혁진영 전체의 실패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진보개혁진영의 많은 인사들이 노무현정부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에, 누구도 노무현정부의 실패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진보개혁진영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성찰이 요구된다."(본문 중에서)

<노무현 시대의 좌절>은 바로 노무현 정부의 실패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성찰을, 뼈저린 성찰을 시도하는 책이다. 자칫 이명박 정부의 무능과 무지로 인하여 노무현 시대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 흐지부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정책실패를 부인하는 노무현 시대 사람들에 대한 정면 비판을 시도하는 책이다. 

그렇지만, 연구회 구성원 중 상당수가 노무현 정부의 정책의제에 관하여 직간접적으로 책임을 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날카롭게 비판하되, 마치 남의 일이었던 것처럼 대하지 말자"는 원칙에 합의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진보개혁진영 전체의 실력부족을 감안하고 새로운 미래 비전을 구상하기 위하여 '실패'라는 평가를 두려워하지 말자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들은 냉정한 성찰과 비판적 평가가 필요한 이유로 "이명박 정부의 실패가 진보개혁진영에게 다시 기회를 가져다 줄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들은 진보개혁진영이 단순히 '이명박 때리기'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다시 집권하는 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절박함을 담아 이 책을 쓴 것이다.

노무현 정부, 주체 역량이 부족했다

이 책에서는 노무현 정부를 평가하는 틀을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하는데, 시대 과제, 대외정세 그리고 주체 역량이 바로 그것이다. 즉, 시대 과제를 얼마나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부합되는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는가? 그리고, 한국이 세계체제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그로 인한 경제, 외교안보 제약을 고려하여 평가하자는 것이다.

특히, 주체 역량과 관련하여서는 여러 가지 세부 사항을 적용하는 평가기준을 세웠다.

▲ 집권세력 내 핵심집단을 지원하는 개혁적 지식인 집단의 결속력과 준비정도
▲ 정치적 행정부와 집권여당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파워블럭의 정책 수립 및 지원능력
▲ 핵심집단이 마련한 국정목표와 그 실현을 위한 정책패키지 준비 정도
▲ 정치적 행정부의 관조조직에 대한 통제력 행사 여부와 적절성
▲ 다양한 이념적, 계층적, 지역적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통합하는 능력
▲ 보수신문과 반대세력의 방해를 무릅쓰고 국민적 지지와 합의를 이끌어냈는지 여부

저자들의 평가는 냉정하고 날카롭다. 노무현 정부는 "개방의 조건하에서 성장과 복지를 어떻게 실현하는가"는 시대 과제를 막연하게 인식하였으나 국정과제와 국정목표에 제대로 반영시키지 못하였다고 평가한다.

또한 대외정세 측면에서는 '지나친 의욕'과 '외교적 수모' 사이를 오가는 시행착오를 반복하였다는 것이다.

"국방백서에서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었다가 미국의 요청으로 자국민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라크에 파병하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또한 동북아균형자론을 제기했다가 강대국들을 자극하기만 한 채 이내 철회하고 말았다."(본문 중에서)

뿐만 아니라 집권 후반기 동북아시대구상도 집권후반기 일방적인 한미FTA 추진으로 퇴색함으로써, 외교안보와 통상 전략의 부재로 대외정세 변화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주체 역량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요컨대, 노무현 정부는 집권 초기에 시대적 과제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국정을 명확하게 기획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외정세의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적 측면에서도 집권세력의 미약, 정책패키지 준비 부족, 실행능력 취약,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정치적 능력 부족 등으로 이익 갈등과 관료조직, 반대 세력의 저항 등을 극복하면서 정책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본문 중에서)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로 인한 반사이익에 힘입어 승리를 재취할 수 있었고, 국민들은 노무현 정부의 실패로 진보개혁세력 전체에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개혁에 성공할 기회가 없었나?

<노무현 시대의 좌절>을 쓴 저자들은 "구조적 조건에 대응하는 핵심집단의 구성, 정책수립 및 집행능력, 정책정당의 준비 등에서 노무현정부의 주체적 역량이 대단히 미약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주체 역량이 미약하다고 하더라도 집권기간 전체를 돌아보면 최악의 실패를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적어도 세 번은 있었다고 진단한다.

첫 번째는, 집권 후 1년 이내에 개혁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이 기간 노무현 정부는 4대 권력기관에 대한 장악을 포기하는 등 지나친 탈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이면서 시간을 낭비하다가 보수세력의 반격을 받아 탄핵을 자초하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탄핵 후 총선 승리로 다수당이 된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개혁법안을 놓고 한나라당과 힘겨루기에서 실패함으로 시대 과제에 부응하는 개혁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기회를 또 한 번 잃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민주당, 민주노동당 등 넓은 의미의 진보개혁세력을 포용하면서 개혁추진의 동력을 확보하는 대신 한나라당을 포함하는 대연정을 통해 교착상태를 돌파하려다 마지막 기회마저 놓쳤다는 것이다.

결국,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필연적으로 예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대통령을 포함한 정권 핵심집단의 주체 역량부족에서 기인되었다는 주장이다. 직접 책임은 노무현 정부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있지만, 넓게 보면 진보개혁세력 모두의 실패라는 것이다.

<노무현 시대의 좌절>은 바로 이런 평가 틀을 가지고, 정치전략, 동북아 정책, 통일, 외교, 안보정책, 성장과 분배전략, 복지정책, 노동정책, 비정규직 정책, 주택정책, 지역정책, 과학기술정책, 교육정책으로 나누어 분석하고 평가하며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쓴 글이기 때문에 주제에 따라서는 생소한 자료인용과 다소 어려운 내용도 없지 않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넓은 의미에서 진보개혁진영 모두의 실패라는 것을 인정하는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반성을 쏟아내고 있다.

이명박 실패, 진보개혁세력의 기회로 이어지지 않는다

"진보개혁세력은 당위적 주장을 타성적으로 반복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복합적 정세 속에서 실현 가능한 대안을 마련하는 데는 치열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본문 중에서)

진보개혁세력이 노무현 정부와의 차별성을 강화하는 것이나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구호만으로 국민의 지지를 회복할 수 없다고 한다. 저자들은 이명박정부가 들어서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후퇴하면서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중 하나는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것이 명확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진보개혁세력이 "세계화와 분단체제의 동요라는 환경에서 작동할 수 있는 실현가능한 비전과 노선"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이명박의 실패가 저절로 우리에게 기회로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노무현 시대의 좌절>은 노무현 시대의 좌절을 딛고 일어서기 위한 뼈저린 성찰의 결과물을 모은 책이다. 2002년 12월 19일, 노무현의 승리를 진보개혁세력의 승리라고 믿고 가슴 벅찬 기쁨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던 사람들이, 참으로 파란만장한 지난 5년의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서기 위한 길을 모색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