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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운 사람, 문홍빈을 기억하겠습니다

by 이윤기 2014.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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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사람', '따뜻한 사람', '선한 웃음', '환한 웃음' 이 모든 아름다운 단어들의 조합은 쉰하나의 나이로 갑자기 생을 마감하고 떠난 한 남자를 일컫는 말들입니다.


평소 건강했던 지난 20일 필리핀에서 그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뒤에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황망하고 애통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1964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나 향년 51세로 소천한 문홍빈은 학교에서 교육학과 사회복지학을 공부했습니다. 기독교 대한감리회 작은 교회 성서연구원 간사, 크리스찬 아카데미 간사, 한국YMCA 전국연맹 부장을 거쳐 안양YMCA 사무총장으로 일하던 중 필리핀 출장을 떠났다가 순직했습니다. 




필리핀으로 봉사활동을 떠난 YMCA 대학생 회원들을 격려하러 갔다가 국내서부터 이어진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피곤한 몸으로 밤늦게 잠이 들었는데,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를 떠나보내는 여의도 장례식장에는 자주 보던 환한 웃음을 머금은 사진과 함께 평소 그가 마음에 새기던 말들이 커다란 현수막으로 걸려 있었습니다. 


"의미를 더하여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의미입니다."

"사람이 소중하게 되면 모든 것이 소중하게 된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합니다."

"아이들 손잡고 마을을 어슬렁어슬렁 거리는 어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꿈 없이 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입니다."

"그 길이 쉽진 않았지만 동료들과 함께 꿈을 나누고 나니 참 좋습니다."


한국으로 운구되어 온 그를 떠나보내는 예식을 하는 동안 가족과 동료들, 그와 함께 새로운 마을을 꿈꾸던 안양YMCA회원들은 그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음에도 그의 뜻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기도문처럼 되뇌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입니다." 


그를 떠나보내는 장례식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그는 늘 활짝 웃는 사람입니다." 


잇몸이 훤히 드러나는 함박웃음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그는 참 따뜻한 사람입니다." 


그를 떠나보내는 지난 며칠 동안 정말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던 말입니다. 




그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무렵 한국YMCA 연맹에서 일을 시작한 무렵이었습니다. 첫 인상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활동가의 느낌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솔직한 첫 인상은 어딘지 모르게 약간 '꺼벙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사람됨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누구를 만나도 환한 웃음으로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나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이 그날 회합에 잘 참여할 수 있도록 다정하게 손 내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진면목을 경험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안양YMCA 사무총장을 맡을 무렵부터입니다. 대안교육에 대한 서로의 관심이 일치했고, 만나서 함께 공부하고 함께 현장에서 실천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을 나누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를 만나면 마음이 설렜습니다. 늘 새로운 배움을 얻어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치원 또래의 아이들과 'TV 안 보기 운동'을 몇 년간 지속해 오던 우리에게 'TV 끄기 운동'이라고 바꾸면 참가자들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의미를 적극적으로 담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언어 사용에 민감하고,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고운 단어를 잘 골라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늘 깊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었고, 깊은 고민 후에 사람들을 설득하고, 함께 참여 시킬 수 있는 적절한 대안을 내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청빈한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추하지 않으면서도 검소한 삶, 소박한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학업을 마칠 무렵 "돈을 벌기 위한 일(직장)은 선택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밝혔고, 떠나는 날까지 정말 그렇게 살다 갔습니다.


최근에는 만날 때마다 다석 유영모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습니다. 주로 유영모 선생에 관한 책을 읽은 이야기, 그분에 관한 강연을 들은 이야기들이었는데, 아마 그의 영적 스승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안양YMCA에서 일하는 동안 YMCA가 운영하는 대안학교인 아기스포츠단과 벼리학교 교장을 맡아 학교에서 공부한 교육학을 현장에서 실천했고, 대안 교육에 대한 깊은 고민과 실천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선배들이 남긴 책과 자료를 두루 공부한 뒤에 '아이들의 온전한 성장은 마을이 함께 해야 가능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경쟁하지 않는 삶, 물질이 최고인 삶을 가르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른 먹거리를 먹고, 바른 몸을 가꾸고, 바른 생각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지난해부터 그는 아이들의 온전한 삶을 지향하는 교육을 꿈꾸면서 요즘 아이들의 문제를 '자연 결핍, 놀이 결핍, 관계 결핍'으로 진단하였습니다. 아이들의 온전한 성장을 이루려면 자연 결핍, 놀이 결핍, 관계 결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연 결핍, 놀이 결핍, 관계 결핍으로부터 벗어난 아이들은 비로소 '온전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으며, 자연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인 삶의 주인으로 자라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만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 전국에서 싹틔워 보자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늘 그의 신실한 동지였던 부천YMCA 김기현 총무는 고인을 보내며 쓴 글에서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람'이라고 하였더군요. 지난 23일과 24일에는 그의 부재를 안타까워 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추모예배와 노제를 지내며 슬픔과 안타까움을 함께 나눴습니다.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열린 23일 추모예배에는 전국에서 모인 300여 명이 넘는 친구, 선후배, 동료들이 함께 그의 삶을 되돌아보며 미안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여러 명의 안양YMCA 회원들이 모여서 '사람과 마을과 꿈을 사랑한 맑은 영혼'을 가졌던 그를 회고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조사를 듣는 동안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낮은 곳에서 살았고, 내가 알던 것보다 더 따뜻한 사람이었으며, 내가 알던 것보다 더 많이 웃는 사람이었고, 한마디로 내가 알고 지냈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래서 더 슬퍼했고 더 많이 안타까워했습니다.


다음 날인 24일 이른 아침 발인 예배를 마치고 그가 온몸과 온 열정을 쏟아 부으며 일하던 터전인 안양YMCA로 옮겨 노제를 치렀습니다. 그를 태운 차가 안양YMCA 앞에 도착하였을 때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꼬마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검은 옷을 입은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를 태운 차가 안양YMCA에 도착하고 영정을 든 그의 아들과 아내가 차에서 내리자 골목을 가득 메운 안양YMCA 회원들과 지역운동을 함께 하던 활동가들, 마을 사람들은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굳게 입술을 다문 사람들도 슬픔을 삼키느라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안양 지역에서 함께 시민운동을 해왔던 활동가들은 떠나는 그를 향해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했습니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그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가 있어 안양 시민사회가 힘을 모아 일할 수 있었고, 그가 있어 안양 시민운동이 이만큼이라도 뿌리내릴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존엄한 죽음을 역설하던 그, '임종휴가' 조차 없이 떠나


지난 20일 그가 필리핀에서 급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종일 그의 페이스북을 넘겨보았습니다. 그의 페이스북에는 유난히 죽음을 성찰하는 글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낼 때마다 그는 '존엄한 죽음'에 대한 성찰이 담긴 글들을 남겼더군요.


지난 몇 년 사이에 그는 어머니와 장모님을 비롯하여 여러 선배와 동료를 떠나보냈더군요. 그때마다 그가 남긴 글들에는 '존엄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여러 글 중에 '임종휴가'에 관한 이야기도 있더군요.


그는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잘 기르는 것 못지않게, 생을 마감하는 시점에 이른 부모를 잘 배웅하는 것 또한 존엄하고 고귀한 인간의 도리이며, 이를 위한 사회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썼더군요. 


그는 출산이나 육아 휴가, 육아 휴직은 있어도 노동자들에게 임종을 목전에 둔 부모를 배웅하기 위한 시간은 주지 않는 예의 없는 사회에 관한 글을 쓴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애가 타고 간장이 녹고, 속 터지며 살아온 한 평생을 마감하는 부모와 석별의 정을 나누는 며칠조차 제도적으로 보장하지 않는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임종휴가'조차 보내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이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슬퍼하고, 더 많이 안타까워했던 것도 가족과 친구와 동료를 혼신을 다해 사랑했던 그에게 "사랑한다",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를 떠나보내며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삶을 이어 살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겸손하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청빈한 삶을 지향하며, 그가 그랬듯이 꿈을 잃지 않고 살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예수를 닮은 청년 문홍빈처럼 따뜻한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에 새기며 서울시립추모공원에서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잠깐이나마 부축하고 돌아왔습니다. 


"사람다운 사람, 문홍빈을 기억하겠습니다"



▶ 문홍빈 사무총장이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던 필리핀 보내 온 추모 영상입니다. 



▶ 안양YMCA 회원(등대촛불, 아기스포츠단 학부모, 벼리학교 학부모, 아기스포츠단 교사 등 )들의 추모 메시지 입니다. 



▶ 안양YMCA 문홍빈 사무총장 추모 예배 조사 모음 (박병준, 김기현, 국상표, 남부원님)




※ 이 기사는 5월 28일 오마이뉴스에 송고 하였던 기사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송고한 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중복 게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