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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교육, 대안교육

싼 값에 샀다는 건 누군가 그 희생을 치른다는 것

by 이윤기 2015.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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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이 쓴 새 책이 나왔다는 신문기사를 읽으며 여간 설레지 않았습니다. 마침 지난 5월에는 이오덕, 권정생, 하이타니겐지로 선생님의 삶과 책을 전시하는 '아이처럼 살다' 전시회가 서울도서관에서 열리기도 하였지요. 


'온 삶을 아이들처럼 살다 간' 세 분을 모두 좋아합니다만, 어쩐지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의 작품이 가장 끌리더군요. '아이처럼 살다' 전시회에 갔더니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을 일컬어 "상냥함을 태양처럼 품고 산 사람"이라고 하였더군요. 


그가 쓴 책들에서 건져낸 표현 같더군요. <상냥하게 살기>, <태양의 아이> 같은 책 제목들이 연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상냥하게 살기>는 "일본의 대표 작가이자 교육실천가였던 저자가 세상에 대해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던 40대 무렵에 발표한 64편의 글을 모은 산문집"입니다. 


자급자족 생활을 위해 아와지 섬으로 귀농한 뒤에 경험하는 초보 농사꾼의 실패와 성공담, 농업을 천대하는 정부 정책, 교과서 왜곡과 헌법 개정에 대한 비판적 입장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경험하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어린이 문학작품에서 알아챌 수 없었던,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의 일본 사회와 정치에 대한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특히 5.18 광주민중항쟁과 서준식, 서승씨 간첩조작 사건을 통해 애국심과 통일에 관하여 쓴 글을 읽을 때는 놀랍고도 서글펐습니다. 


자연이 사람을 상냥하게 만든다


이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제어는 역시 '상냥함'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상냥함은 그냥 친절함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자연과의 만남,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되는 마음가짐 같은 것입니다. 


"밭을 갈고 채소를 자급자족하면서 나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 하나하나 이야기할 생각인데, 모든 생명은 둘도 없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내 안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다. 여태껏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아도 그것이 생명의 집합체이며 세상의 모든 생명은 대등한 관계로 이어져 있기에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그는 아와지 섬으로 들어와 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상냥해진다' 하더군요. 섬과 도시 사이를 바다가 막아주기 때문에 '상냥해지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책에는 떠돌이 닭과 병아리들을 함께 키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떠돌이 닭이 병아리들이 병아리들의 대리모가 되어주면 좋겠다는 기대는 빗나가고 말지만 서로 싸우거나 괴롭히는 일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자연 그 자체로 살아가는 동물은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에는 냉혹하리만큼 가차 없지만 다른 생명에게 비뚤어진 간섭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하이타니 겐지로가 직접 유정란을 부화시킨 병아리들을 키우는데, 이웃집 농부가 알을 품던 닭 한 마리를 데려다주면서 생긴 일입니다. 자연의 섭리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 살아가는 사람의 삶, 그리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모습이 이처럼 다릅니다. 그 까닭은 사람이 자연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1934년생인 하이타니 겐지로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밀'은 가난의 기억으로 남은 농작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제비가 주식이었고 볶은 밀이 귀한 간식이었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만이 가지는 밀밭에 대한 추억이 있더군요,


"밀기울을 물에 풀어 끓여 먹은 적도 있다. 아무리 없이 살던 시절이라지만 정말로 먹기가 힘들었다. 그걸로 한 끼를 때워야 할 때면 눈물이 복받쳤다. 그 눈물을 보고 더 힘들어했던 건 부모님이었으리라."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섬에 와서 처음 밀농사를 지어 수확을 앞두고 있을 때 어린 시절 밀에 얽힌 추억들을 회상하면 쓴 글입니다. 밀 이삭을 뭉쳐 넣어 껌처럼 씹던 추억으로부터 어머니를 도와 맷돌을 돌리던 기억으로까지 이어지더군요. 


싼 값에 팔린다는 것은 누군가 그 희생을 치른다는 것


이 책에는 섬으로 귀농하여 살면서 경험하는 농사이야기가 많습니다만, 농사를 지으며 일어나는 의식의 변화과정도 흥미롭습니다. '마을 경제2'라는 글에는 싼 것이 좋은 것이라고 믿었던 생각이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시에서 살면 무조건 값싼 물건이 최고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싼 것이 최고라는 사고방식에는 큰 함정이 있다. 몇몇 사람의 희생으로 물건값이 싸졌는데도 그런 물건을 사는 것은 죄라는 의식이 없다면 그 사회는 타락하고 만다."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얼마 전 읽은 야마오 산세이의 책에서도 이런 글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도쿄에서 살다가 자급자족을 하기 위해 야쿠시마로 귀농한 야마오 산세이 역시 어느 날 가게에서 '야자 잎 모자'를 헐값에 사면서 수공예로 모자를 만든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는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하이타니 겐지로 역시 농산물 값이 너무 싸고 농민들이 바라지 않는데도 유통과정에서 투기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음식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고 고백합니다. 농산물 값이 싸다는 것은 어떤 농민이 그 희생을 치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슈퍼에 파는 깨끗하게 손질되어 진열된 채소의 이면에는 농민들의 눈물이 숨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밥풀 하나도 남기지 못하게 하던 내 아버지도 '쌀 한 톨이 농부의 땀 한 방울'이라고 가르치셨지요. 바로 이런 깨달음도 그가 말하는 '상냥함'의 원류입니다. 


상냥함의 원류는 자연과 아이들


하이타니 겐지로가 말하는 상냥함의 또 다른 원류는 아이들입니다. 이 책의 2부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이들의 삶과 아이들이 쓴 글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인간적인 상냥함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어떻게 체득되는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생활과 삶을 통해서 체득되는데, 이때 생활이란 물질적인 풍요여부와 상관없이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과정을 말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생활과 자신이 단단히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더 없이 상냥해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모가 권위만 휘두르거나 아이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할 경우 단절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잠깐 언급하였던 것처럼 이 책에는 하이타니 겐지로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레이건과 전두환사이에 오고 간 '인권보다 안보가 우선'이라는 공동 성명서 읽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과연 무엇이 살아 있는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입니까. 하루 삼시 세끼 끼니만 이어가면 사는 것입니까? 도대체 한 나라에서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 명이 자기 나라 군인들한테 희생되어 피를 흘려가며 쓰러져 죽어 가는데 나만,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말입니까?'라고 광주사태에 항의하고 분신자살을 시도한 젊은 노동자 김종태 씨의 숭고한 민족애는 뭐가 되는가."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책을 읽다 한국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놀랐고, 저자가 5.18광주민중항쟁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웠습니다. 아마 한국인들 중에도 5.18광주민중항쟁은 알아도 김종태씨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또 재일교포 간첩단(서준식, 서승 형제) 사건으로 온갖 고초를 겪었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읽으며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그가 쓴 책을 여러 권 읽었지만 하이타니 겐지로가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애국심이란 단순히 적국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만 아니다


하이타니 겐지로는 두 아들이 죽음 목전에까지 가는 고초를 겪은 서준식, 서승 형제 어머니 오기순씨가 조국을 원망하지 않고 조국의 국민들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조국애'란 무엇인가 하고 반문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애국심은 가상의 적국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애국심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장애인이 웃는 얼굴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려는 마음, 길을 걷다가 나무 그늘에서 쉴 수 있는 나라를 만들려는 마음을 우리는 애국심이라고 부른다."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전쟁이 났을 때 가장 먼저 고통 받는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나라를 만들려는 마음이 애국심이고, 정치가들과 부도덕한 기업들의 부정부패를 뿌리 뽑으려는 마음이야말로 애국심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민중에게는 깊은 인간애와 높은 윤리의식이 있는데 나라의 지도자들에게는 없다는 점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호전적인 정치가들을 낳는 풍토까지 똑같은 것이 너무 슬픈 일이라고도 이야기 하더군요. 


하이타니 겐지로는 '오키나와'에 대해서도 어떤 부채의식 같은 미안함 혹은 애틋한 마음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마오 산세이의 책에서도 오키나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는 공감대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오키나와 풍진아'라는 글이 있습니다. 1965년 오키나와를 휩쓴 풍진 때문에 난청을 앓는 장애아가 600명이나 태어났는데도 본토에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키나와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사실 오키나와는 단순히 차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오키나와의 역사를 보면 오히려 국가내 내부 식민지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베트남전 참전 죄값을 치르는 오키나와 아이들


하이타니 겐지로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풍진에 감영된 것은 미군들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실은 이미 충분히 확인되었는데, 일본 정부만 외면하고 있다더군요. 베트남 전쟁을 위해 오키나와에 드나들었던 미군들이 미국에서 대유행하던 풍진을 옮겨왔다는 것입니다. 


"풍진의 감염원이 미군이라면 (난청을 앓는)이 아이들은 분명 전쟁 희생자입니다. 아무 죄도 없는 이 아이들이 베트남전에 가담한 일본인의 죄값을 대신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하지만 절대 다수의 많은 일본인들은 오키나와에 이런 장애아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 일본의 현실이라고 합니다. 독자들은 또 한 번 애국심에 대하여 질문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끝으로 단순한 친절을 넘어 서는 저자가 생각하는 상냠함에 대하여 조금 더 소개해 보겠습니다. <상냥하게 살기>라는 책 제목으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여러 글에서 상냥함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인간의 상냠함은 조상이 남겨준 문화유산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느냐에 달렸다."


"그것보다 더 힘들고 슬픈 것은 사람들 마음 속에서 서민감각이라는 상냥함이 사라지는 일이다." 


"섬사람들의 상냥함은 모든 생명을 대등하게 바라보는 지점에서 생겨나는 것 같았다."


"오키나와는 그런 상냥함의 문화로 지탱되어온 곳이기에... 인간의 존재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수업을 하자 다연한 일이지만 오키나와 아이들은 훌륭한 집중력을 보였다."


"아이들은 모든 사라에 매우 예민하다. 아이들의 상냥함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평등하다'는 생명의 근원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생활과 자신이 단단히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더 없이 상냥해진다."


"어린이가 지닌 상냥함의 근원은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느끼는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냥함은 인간의 조건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길'로써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상냥하게 살기> 본문 중에서


저자는 아이의 인생이든 어른의 인생이든 둘도 없이 소중하다는 의미에서 대등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함께 배우려는 자세는 늘 아이보다 부모나 교사에게 부족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어른들을 얕잡아 본다고 하지만 실은 아이를 얕잡아 보는 부모와 교사들이 훨씬 많다고 주장합니다. 


"고난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야말로 인간적인 배려가 몸에 배어 있고, 깊은 절망을 헤치고 나온 사람만이 한없는 상냥함을 지닐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아이들에게서 배운 상냥함을 잃지 않고 살다 세상을 떠난 아이를 닮은 어른이었습니다. 


2005년 가을 식도암과 췌장암 판정을 받은 저자는 약물치료를 거부하고, 자신의 생명을 자연에 맡긴 채 살아가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습니다. 2006년 11월 23일 유언에 따라 장례식을 하지 않았으며 한 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갔습니다. 


상냥하게 살기 - 10점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양철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