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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1945.8.15...항복 없는 일본의 종전 선언

by 이윤기 2015.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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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조정래의 <정글만리>,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시장으로 바뀐 중국


<태백산맥>을 쓴 국민작가 조정래 선생의 <정글만리>를 읽었습니다. 벌써 2년째 책꽂이에 꽂혀 있던 2013년에 출간된 책을 지난여름의 끝자락을 보내며 읽었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세상일을 잊고 싶을 때 소설 읽기는 훌륭한 도피처가 되곤 합니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 일터를 도망쳐 집으로 온 날, 마침 아내와 아이들이 읽고 재미있다고 했던 <정글만리>가 떠오르더군요. 분노와 실망감으로 잠도 잘 오지 않고, 그렇다고 생산적인 일도 잘 안 될 때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통해 삶을 되돌아보는 '소설 읽기'가 훌륭한 위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지난 몇 주간 저에겐 <정글만리>를 비롯한 몇 권의 소설이 그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마침 청소년들을 데리고 중국을 통해 백두산 자전거 순례를 다녀온 터라 중국을 무대로 한 이야기에 더욱 관심이 가더군요.


<정글만리>는 중국에서 활약하는 종합상사와 종합상사에서 일하는 주재원들을 통해 중국 시장을 둘러싼 한·일 기업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칩니다. 그 경쟁 관계를 중심으로 한 세계 기업들의 수출 전쟁 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현실감 있게 풀어내는 책입니다.




중국 시장을 둘러싼 무역전쟁


중국 거대 기업에 대한 수출을 성사시키기 위한 종합상사 주재원들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기업들의 접대문화가 유흥업을 먹여 살린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중국 기업들과 거래하는 상사 주재원들의 '꽌시' 관리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특히 힘 있는 중국 관리들을 '꽌시'로 두는 경우는 가족 대소사뿐만 아니라 집안사람들에게 생기는 변고들도 마치 당사자에게 일어난 일처럼 챙겨야 하더군요. <정글만리> 등장인물인 전대광부장이 바로 이런 노력을 통해 유능한 상사 주재원으로 인정받습니다.


힘 있는 중국 관리와 돈 있는 중국의 신흥부자들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징표가 있는데,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얼나이'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첩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권력을 이용해 재산을 축적한 고급관리와 개혁개방 이후에 부자가 된 기업가들은 얼나이 숫자로 권력과 부를 가늠할 수 있을 지경이라는 겁니다.


'세계의 절반은 여자'라고 하는 중국 공산 혁명 당시의 구호를 무색하게 하는 축첩행위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데도, '문제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아니'라는 희한한 중국 문화가 이를 묵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의 치밀하고 꼼꼼한 취재가 바탕이 된 소설이기 때문에 중국 문화의 아주 다양한 모습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중국이 G2 경제 대국이 되는데 세계 최고 수준의 내수시장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왜 G1이 될 것으로 예측되는지를 실감 나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경제전문기관이나 경제학자들이 나서서 제각기 예측을 해대느라고 분주한데, 내가 가장 믿는 건 미국 쪽 견해요. 왜냐하면 그들이 중국이 G1이 되는 걸 가장 원치 않기 때문이고. 그런데 미국의 입김이 가장 센 IMF에서 2016년으로 점쳤고, 또 다른 연구소에서는 2020년쯤이라고 했소. 그럼 그 둘 더하기 나누기 2를 하면 어때요?" (본문 중에서)


이 소설이 처음 출간될 때가 2013년이었는데, 당시 IMF의 예측으로 2016년이면 미국을 제치고 G1이 될 것으로 예측하였다는 것입니다. 과연 2016년에 중국이 G1이 될는지는 저 같은 비전문가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만, 중국시장의 성장 속도가 엄청나다는 것은 실감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G1 되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


최근 중국을 거쳐 백두산을 다녀오는 여행길에 경험한 가장 놀라운 현상이 바로 '샤오미 현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저가 스마트폰과 품질 좋은 저가 IT 제품을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샤오미' 제품에 대한 인기가 과거 일본산 전자제품을 연상케 하였기 때문입니다.


불과 20~30여 년 전만 해도 일본으로 출장이나 여행을 가면 카메라, 워크맨, 시디플레이어 같은 전자제품이나 전기밥통을 사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20년쯤 전 제가 처음 일본 여행을 갔을 때만 해도 도쿄의 아키하바라 전자상가는 꼭 들러야 하는 단골 코스에 속했습니다.


이번에 중국 여행을 가보니 많은 분이 샤오미 매장이나 전자상가에 가고 싶어 하였습니다. 여행사에서 추천한 차와 죽세공품을 파는 전문 매장은 전혀 관심을 끌지 못하였고, 물건을 사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당연히 가이드들에게 떨어지는 수당 같은 것도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샤오미 매장과 제휴를 맺고 여행객들을 안내했다면 훨씬 매출이 많이 올랐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튼 삼성전자로 상징되는 한국의 반도체나 IT 제품들이 중국의 빠른 추격에 쫓기고 있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중국산' 하면 '값은 싸지만 품질도 낮은 제품'으로 인식되었지만, 최근 IT 제품들의 경우에는 전혀 다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흔히 '대륙의 실수'라고 널리 회자 되는 바로 샤오미 같은 제품들을 통해 값싸고 품질도 좋은 중국산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확산하고 있는 것이지요.


작가는 이런 중국 경제의 성장 가능성을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세계 최고의 내수시장을 통한 내수경제 활성화를 바탕으로 중국 경제가 서구의 예측보다 더 빠르게 발전할 것은 중국인들도 몰랐던 일이고, 서구에서도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10년 전에도 오늘날과 같은 현실이 오리라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소. 무슨 말인고 하면 2002년에 자전거를 낑낑대고 몰면서 자기가 2012년에 자가용을 타는 팔자가 되리라는 것을 전혀 몰랐을 것이오. 그 황홀한 성취를 이룩하게 해준 게 누구요. 공산당이오. 이것이 중국식의 중민 인민들의 생각이오." (본문 중에서)


눈부신 경제 성장은 안팎의 예측보다 40년이나 더 빠르게 이루어졌고, 바로 그런 빛나는 성과들 때문에 중국 국민의 공산당에 대한 평가 역시 타자의 시선으로 봐서는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 전쟁이 남긴 상처


이 소설 속에 경제와 기업 이야기만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중국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엄청난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엄청난 문화유산에 관한 이야기도 독자의 흥미를 자극합니다. 한·중·일 세 나라의 과거사와 일본의 침략과 지배 과정에서 발생한 불행한 역사는 독자들의 피를 뜨겁게 달구기도 합니다.


저 역시 <정글만리>를 읽으면서 일본 천황이 1945년 8월 15일에 항복선언을 한 것이 아니라 종전선언을 하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정글만리>에서는 북경대 학생들과 난징대 학생들이 난징학살 유적지를 답사한 후 세미나를 개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세미나에서 한국인 유학생 송재형이 동료 학생들에게 일본 천황이 낭독했던 '종전선언문'을 다시 읽어 줍니다.


"더욱이 적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 폭탄을 새로이 사용해 무고한 생명을 무시로 빼앗기 시작했으니 그 피해가 실로 어디까지 갈지 헤아릴 수 없구나. 이 이상 교전을 계속한다면 일본 한 나라의 파괴와 소멸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 문명 전체의 절멸로 이어질 것이니라.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짐의 1억 백성을 구할 것이며, 또 무슨 낯으로 황실 조상님들의 신위를 뵈옵겠는가? 이것이 짐이 정부에 열강의 공동선언 조항에 응하라고 지시한 연유다." (본문 중에서)



과연 그 선언문에는 '항복'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1억 일본 백성을 원자폭탄에서 구해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쟁을 그만두겠다는 내용이더군요. 전쟁 책임자인 일본 천황은 '항복'을 한 일이 없고, "세계의 대세와 우리(일본)제국이 처한 조건을 깊이 숙고한 결과 짐은 비상수단에 의지해 현재의 상황을 해결"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미국, 영국, 중국, 소련에 "공동선언 조항을 수락"하는 "비상수단"을 강구하였을 뿐 "항복"을 선언한 일은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치인들과 우익들의 왜곡된 역사인식이 어디서 출발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 천황의 연설문(항복문이라 볼 수 없는) 읽어보면, 미국과 영국을 뺀 나라들과는 전쟁을 일으킨 일도 없고, 주권을 침해하거나 영토를 확장하려는 생각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나 난징대학살 같은 사건들을 대하는 일본 정치권의 망언과 왜곡된 역사인식이 바로 일본 천황의 8월 15일 종전선언문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일본 천황의 종전 선언문 전문을 처음 읽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정글만리>는 책값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책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소설을 네이버에 3개월 연재하는 동안 조회 수 1200만 회, 1만 건이 넘는 댓글로 독자들의 성원을 받은 까닭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더군요.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분단 7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입니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발표했던 '종전선언문'을 꼭 한 번 찾아서 전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정글만리>에도 전문이 있습니다.


조정래 선생은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며, 그 시대의 산소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정글만리>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여행을 앞둔 분들에게 인터넷에 널린 허접한 여행기들 대신 꼭 읽어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정글만리 1 - 10점
조정래 지음/해냄


정글만리 2 - 10점
조정래 지음/해냄


정글만리 3 - 10점
조정래 지음/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