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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여자 대통령 꼭 닮은 조선 여왕, 폭군 혜주

by 이윤기 2016.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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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 닮은 조선 여왕 '혜주'


400년만에 봉인이 풀린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조선 역사를 다룬 소설 <혜주>를 읽는내내 여러 차례 여성 대통령이 연상되었습니다. 소설 <혜주>는 지난 30년 간 역사 연구와 저술활동을 해왔다는 것만 밝혀놓은 소설가 정빈의 작품입니다. 


"지난 30여 년간 역사 연구와 저술을 해왔다. 더 이상의 작가 소개는 원하지 않는다"고 씌어진 저자 이력을 보고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인 '역사소설' 일 것이라고 지레짐작 하였습니다만, 막상 책을 읽어보니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 관련 없이 쓴 그야말로 '소설'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라졌다고 하는 소설의 주인공 헤명공주는 말할 것도 없고, 선대왕인 그의 아버지 광조 그리고 후대 왕인 덕종도 조선왕조의 계보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난 30년 간 역사 연구와 저술활동을 해온 작가의 학문적 성과가 담긴 때문인지 여러 장면에서 역사적 사실이 연상되기는 하였습니다. 


혜명공주의 아버지인 광조는 신하들이 그의 숙부인 원산군 몰아내고 왕위에 세운 인물입니다. 예컨대 신하들이 일으킨 반정으로 왕이 되었습니다만, 재위 중에 선정을 베풀었고 공신 세력을 기반으로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고 재위 20년 간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습니다. 원래 아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모두 병으로 죽고 나이 어린 딸만 남아 있었습니다. 재위 20년 간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광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종친 중에 새로운 임금을 세우자는 주장과 선왕의 뜻에 따라 '헤명공주'를 옹립하자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지만, 어머니 순현왕후와 조정안 당파의 이해가 맞물려 신라 이후 처음으로 여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발칙한 상상력....참담하고 아픈 현실 떠올리게 하는 소설


왕위에 오른 혜명공주는 성군의 자질을 보이는 듯 하지만, 이내 십상시와 같은 간신들을 곁에 두고 그들의 꼬임에 넘어 갔을 뿐만 아니라 애정행각에 빠져 국사를 소흘히 하게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유모였던 민상궁과 요즘 청와대 십상시를 떠올리게 하는 당대 최고의 술객 노천 그리고 어릴적부터 인연이 있었던 승려 무극이 3인방이 되어 국정을 농단합니다. 


뿐만 아니라 임금이 된 혜명공주가 승려 무극과 애정행각에 빠지면서 더욱 국정을 소홀히 하고, 중요한 국정 현안은 술객 노천의 이야기에만 의지합니다. 노천은 '혜주'에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하면서 비위를 맞추는 간신배 노릇으로 임금을 '폭군'의 길로 이끌어갑니다. 


여왕은 자신의 국정실패와 임금의 애정행각을 비판하는 괴소문과 괴벽보가 나돌자 소문을 내는 자들을 엄벌에 처하라고 지시하는 등 점점 더 광기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왕의 허물을 이야기하는 자를 잡아다 혀를 자르는 형벌에 처하고,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란 성균관 유생의 목을 베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결국 재위에 오른지 4년 만에 폭군이된 여왕은 신하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날 궁색한 처지가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립니다. 이 소설엔 태백산맥은 저리가라 할 만큼 남녀상열지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승려와 중전, 승려와 상궁이 애정행각을 벌입니다. 


여왕이된 혜주도 어릴적부터 허물없이 지냈던 승려 태허의 상좌였던 승려 무극과 애정행각을 벌입니다. 승려를 궁궐로 불러들여 벼슬을 주고 밤낮 가리지 않고 애정행각을 벌이는데 가히 여자 연산군을 떠올리게 합니다. 결국 여왕이 권좌에서 쫓겨 날 때는 승려 무극과의 애정행각 뿐만 아니라선왕의 딸이아니라 승려 태허와 민상궁이 친부모라고 하는 기막힌 사연까지 모두 밝혀집니다. 


두물섬 참사...승려와 밀회 그리고 전염병 장질부사까지


조선 최초의 여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책을 읽다보면 여러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건국이래 최초의 여자 대통령을 연상하게 됩니다. 세월호 사고를 떠올리게 하는 대홍수, 메르스 사태를 닮은 장질부사 대유행, 대통령의 7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여왕의 남자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물섬 대홍수 사건은 이렇습니다. 두물섬 지역에 국지적 대호우로 강물의 수위가 상승하여 섬 주민을 구조하기 위한 대형 선박 혹은 땟목 투입을 요청하고, 구조인력 투입 및 이재민 보호시설 예산 지원을 해달라는 장계를 올립니다. 그런데 조정으로 올라간 장계는 누구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습니다. 


"도승지 방기선은 장계를 검토한 후 치산치수 주무부서인 공조로 이첩했다. 장계를 이첩 받은 공조는 내부회의를 거쳐 선공감으로 다시 이첩했다. 선공감은 공조의 산하기관으로 토목 및 영선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다. 최종적으로 장계를 이첩 받은 선공감은 자체 회의 끝에 이는 경기도 관찰사가 처리할 일이라며 각하시켰다."


이 지역을 맡고 있던 광주목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병조판서 앞으로 급히 서찰을 보냅니다.


"본관 휘하 양근의 이수두가 날로 수위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주변 지역의 침수피해가 우려됨은 물론이요, 강 가운데, 섬 주민들의 안전이 몸시 화급한 실정입니다. 현재 두물섬에는 총 이십여호에 백여 명의 백성들이 살고 있사온데 이번 물난리로 한 척 있던 나룻배마저 떠내려가 주민들이 고립된 상황이옵니다. 병부에서 군선이라도 투입해 속히 백성들을 구조해주시길 앙망합니다. 만약 때를 놓친다면 그들은 전부 수장될 것이 분명하오며, 그럴 경우 지역민심은......"


대홍수로 두물섬 백성들 구조가 촌각을 다투는 상황일 때 여왕은 회운사에서 승려와 밀회를 나누느라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엄명을 내립니다. 결국 두물섬 사람들은 인근 동네 사람들이 두 눈 뻔히 뜨고 지켜보는 상황에서 섬 전체가 통채로 수목되는 어이없는 죽음을 당합니다.


참사 지후에 사고 소식을 다시 여왕에게 보고하지만, 여왕은 여전히 승려와 밀회를 즐기느라 보고를 묵살합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소설에는 밀회 장면이 매우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태백산맥보다 훨씬 더 적나라한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곤 합니다. 


이듬해는 한양에 호랑이가 출몰하여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하더니 이내 극심한 가뭄이 닥칩니다. 그리고 가뭄에 이어서 장질부사(장티푸스)가 발생하여 다시 한 번 백성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지만 조정은 속수무책이고 여왕에게는 제대로 보고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결국 2천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고 찬바람이 불자 확산을 멈추게 됩니다. 


권좌에서 쫓겨 난 여왕 혜주...비참한 말로는 예언적


여왕의 잇단 국정 실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성균관 유생 서상기는 여왕 혜주에게 옥좌에서 물러나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그는 '주상의 실정 및 국기문란 7개 죄목'을 지적합니다. 


- 법적 근거도 없이 별직, 정탐서 등을 만들어 국법을 농락한 죄

- 적법한 절차없이 단설형을 제정하여 권한을 남용한 죄

- 조선조의 국정 방침인 숭유억불 정책을 위반한 죄

- 두물섬 참사를 사전에 막지 못하고 사후조처를 소홀히 한 죄

- 내수사 쌀 매점매석 의혹 사건의 재수사를 막은 죄

- 혜민서의 역병 예방 및 사후조치를 소홀히 한 죄

- 궐내에 정인을 끌어들여 음사를 일삼은 죄


하지만 상소를 올린 서상기는 참형에 처해지고, 서상기의 죽음에 떨쳐 일어난 성균관 유생들은 모두 의금부로 끌려가게 됩니다. 백성들은 누구나 '폭군 연산군'을 떠올리게 되지요. 결국 조정 중신들은 폭정을 일삼는 여왕을 폐위시키게 됩니다. 조정은 여왕을 폐위시키며 앞서 밝히 7개 죄목에 2가지 죄목을 더합니다. 


- 서준기 같은 올곧은 유생을 척살한 죄

- 자격이 없는 자가 왕위에 올라 왕실을 능멸한 죄


결국 4년 간의 탈법과 전횡은 여왕 '혜주'의 폐위와 자결로 막을 내립니다. 신하들은 탈법과 전횡 그리고 정인을 끌어들여 음사를 일삼았던 여왕을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오기와 독선을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무능한 임금은 또 처음 봤습니다. 본인이 잘 모르면 신료들에게 물어보기라도 하면 될 텐데 침전에서 혼자 모든 걸 처리하려니 무리수가 따르는 건 당연지사지요. 솔직히 말해 폐주가 군사를 알겠습니까? 외교를 알겠습니까? 기껏해야 문고리 권력인 우별직 노천과 좌별직 무극 그리고 민 상궁의 치마폭에 놀아난 꼴이니 주변 사람을 잘못 쓴 것도 다 폐주 자신의 책임이지요"


어디서 많이 보고 듣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은가요? 소설은 후반부로 갈수록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들로 채워집니다. 저자 소개에 "지난 30여 년간 역사 연구와 저술을 해왔다. 더 이상의 작가 소개는 원하지 않는다"고 한 것도 혹시 작금의 현실을 비슷하게 풍자한 때문인가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튼 새로운 임금을 보위에 앉힌 조정 중신들은 폐위된 여왕의 극악무도한 탈법과 전횡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왕실의 자손도 아닌 여왕의 재위기간을 역사에서 지워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왕조의 역사에 여왕이 사라졌다는 것이 소설 <혜주>의 얼개입니다. 


소설을 펼쳐들고나면 이내 흥미로운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출생의 비밀을 숨기고 여왕이 옹립되기까지의 과정은 약간 허무맹랑하게 느껴집니다만 권좌에 오른 후에 국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여왕이 문고리 권력에 둘러쌓여 나라와 백성을 나락으로 몰고 가는 과정을 보면 작금의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펼쳐든 소설을 마지막장까지 읽게 만드는 에너지도 바로 '작금의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비유와 풍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현실이 통쾌하지 않아 소설을 읽어도 답답한 마음은 여전합니다. 이런 소설이 독자들의 인기를 끄는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혜주 - 10점
정빈 지음/피플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