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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책 읽는 아이는 마법에 걸린다.

by 이윤기 2009.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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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황선미가 쓴 <처음가진 열쇠>

<처음가진 열쇠>는 <나쁜 어린이표>,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유명한 황선미 선생님이 쓴
동화책입니다.

이미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앞서 나온 책들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황선미 선생님 작품이라 굳이 말이 필요 없는, 따로 서평이 필요 없는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황선미 선생님은 아이들의 속마음을 잘 드러낼 뿐만 아니라 어른들을 자꾸만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끌어가는 탁월한 작가입니다.


폐결핵을 앓고 있는 말라깽이 명자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자꾸만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책의 배경이 1975년이고, 주인공인 명자는 초등학교 4학년입니다. 1975년에 저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으니 명자이야기에 제 어린 시절이 자꾸 겹쳐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4학년이 된 명자는 폐결핵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다가 이제 조금 차도를 보이고 있다. 새 학기가 되어 반장인 도영이가 추천을 해서 폐결핵도 다 낳지 않았고, 학교를 마치면 집안일을 거들어야 했지만 끝내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육상선수로 뽑혔습니다.

폐결핵을 앓고 말라깽이가 되었지만 명자는 달리기만 시작하면 쌩쌩이가 되는 다리 때문에 코치 선생님도 친구들도 명자가 아프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명자는 가난한집 맏딸이라서 집안일도 거들어야 하고, 달리기 연습도 해야 했기 때문에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등교 시간에 쫓겨서 숨이 깔딱 깔딱할 때까지 학교로 뛰어가고, 하교시간에는 엄마가 돌아올 시간이 다되면 죽을힘을 다해 집으로 뛰어갔으니 달리기가 생활이었던 셈입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책이 가득한 신기한 교실을 발견하고부터 명자는 허기를 채우듯이 허겁지겁 읽어대면서 차츰 차츰 '마법'에 걸립니다. 마법에 걸린 명자에게 도서실을 운영의 책임을 맡으신 '얼굴이 동그란 아줌마 선생님'은 도서실 열쇠를 맡아 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와서 도서실 문을 열어 놓고, 저녁때는 잠그고 가고, 아이들이 보던 책은 정리하는 일입니다.

글쎄요. 선생님께, 그것도 좋아하는 선생님께, 지시나 명령이라도 싫지 않았을 터인데. 더군다나 명자는 난생 처음으로 '제안'이란 걸 받게 됩니다. 선생님께 그것도 좋아하는 선생님께 이런 비슷한 제안을 받아 본 적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명자의 기분이 얼마나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좋았을지 다 알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새벽 일찍 일을 나가시는 아버지 때문에 늘 일찍 일어났고 학교에도 가장 먼저 갔습니다. 학교 전체에서 가장 먼저 가는 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늘 가장 먼저 학교에 온다는 것을 알게 되신 선생님이 저에게 교실 문을 열고 닫는 책임을 맡기셨을 때, 마치 선생님이 교실을 몽땅 저한테 맡겨주신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며 행복했던 기억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부모님은 학교공부만 열심히 하고, 시험 점수만 좋으면 되는 줄 아셨기 때문에 저도 명자 또래가 될 때까지 제대로 책읽기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육영수씨가 대표였던 육영재단에서 만든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를 정기구독 하도록 권하시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덜컥 손을 들었다가 낭패를 본 기억도 나고 문교부에서 정해놓은 무슨 옛날 이야기책을 읽고 독후감 방학숙제를 했던 기억도 어렴풋이 납니다.

제가 명자처럼 책읽기에 빠져든 건 초등학교 4학년이 된던 해, <새소년>이라는 어린이 잡지책을 만들어내던 출판사에서 나온 소년소녀 칼라북스(기억이 정확하다면) 전집 중에서 독후감 숙제를 위해 <15소년 표류기>와 <로빈훗의 모험>을 읽고 나서부터였습니다. '

수 백번은 족히 읽었지 싶습니다. 제가 읽은 모든 책을 통틀어 가장 여러 번 읽은 책입니다. 어른이 되어서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저도 밤이 늦도록 읽은 책을 또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명자처럼 마법에 걸린 저는 5학년이 되면서 우리 집 가까운 곳에 사는 책이 많았던 부자 친척집 책을 몽땅 읽었던 기억도 납니다. 그 집에는 어른들과 아이들이 따로 다 방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책만 가득한 방도 따로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재라고 부르더군요.

큰방에 가득한 책들 중에 제가 읽을 만한 책은 몽땅 읽어치웠는데, 지금은 무슨 책을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20권쯤 되는 전집 중에 우주에 대한 공상과학소설 같은 것을 본 듯합니다.

점점 마법에 깊이 빠져들어 6학년이 되었을 때는 학교 도서실을 명자처럼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이때는 도서실에 요즘처럼 새 책이 별로 없었습니다. 새 책을 읽고 싶은 욕심이 자꾸만 생겼고, 마침내 마음을 누를 수 없어 저금통장을 털어버렸습니다.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친척들에게 받은 돈을 모아 놓은 저금통장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중학교 갈 때 찾아서 쓸 거라고 하셨는데, '지름신'이 내려서 그만 질러버렸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선생님에게서 인지 모르지만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는 제 돈을 털어 책을 사고 혼쭐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명자처럼 책을 읽으며 수없이 여러 번 마법에 걸려보았지만, 이 세상 아이들을 몽땅 마법에 빠뜨리는 황선미와 같은 훌륭한 '마법사'는 되지 못하였습니다.

명자는 어떻게 어른이 되어 세상아이들을 몽땅 마법에 빠뜨릴 수 있는 멋진 마법사가 될 수 있었을까요? 책 속에 그 해답이 있답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건, 가난한 게 아니다. 구박 받는 것도 아니고, 힘든 것도, 아픈 것도 아니다. 좋아하는 걸 못 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본문 중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정말 좋아하는 것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아마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두려움을 이기고 코치 선생님께 육상부를 그만 두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도서실 선생님에게도 열쇠를 맡겠다고 용기를 내서 말하였기 때문에 행복해 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 가진 열쇠>에서 4학년인 명자는 잘할 수 있는 거랑, 하고 싶은 것을 놓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꼭 하고 싶은 것을 선택을 합니다. 바로 이 대목입니다.

"나는 수도 없이 생각했다. 잘할 수 있는 거랑, 하고 싶은 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달라서 선택을 하기로 했다. 더 늦기 전에 말이다." (본문 중에서)

꼭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훗날 명자는 세상의 많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 같은 많은 어른들마저도 ‘마법’에 걸리게 하는 탁월한 마법사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생애를 바쳐 할 수 있는 정말 좋아하는 일을 꼭 찾아 하면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 가진 열쇠>(황선미 글·신민재 그림·웅진주니어·134쪽·7500원)
 

처음 가진 열쇠 - 8점
황선미 지음, 신민재 그림/웅진주니어(웅진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