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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여행 연수/인도 연수

오로빈도 아쉬람과 오로빌 공동체

by 이윤기 2008.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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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O 해외연수⑥ - 과연, 오로빌은 인류가 지향하는 공동체 모델인가?

폰티췌리에서의 오로빌 방문 일정은 호텔을 나와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오로빈도(1872~1950)의 아쉬람을 방문하는 일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오로빈도 아쉬람은 폰티췌리 시내에 있었는데, 고급스러워 보이는 주택가의 한 가운데에 아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성스러운 장소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되어있는데, 이 곳도 마찬가지로 방문객들은 아쉬람 건너편에 있는 신발장에 신발을 벗어두고 ‘멍석’처럼 생긴 길을 따라 아쉬람으로 들어가게 되어있었다. 아쉬람 앞에는 스리 오로빈도를 추모하는 추모객들을 위하여 꽃을 판매하는 상인들도 있었고, 관광객들에게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인도 전역에 스리 오로빈도는 1872년 캘커타 상류층의 자제로 태어나 7살때 영국으로 건너가 캠브리지 Cambridge를 졸업하고 21살이 되어 인도에 돌아왔다. 인도에 돌아온 그는 바로다 칼리쥐 Baroda College에서 영어교수로 출발하여 총장으로까지 승진하며 당대 인도의 주목받는 젊은이가 되었으며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에도 참여하게 된다.

대학마저 그만두고 1906년 자리를 고향 캘커타로 옮겨 벵갈 Bengal 지역의 영향력있는 독립 운동가로 활동하다 급기야 감옥에 갇히게 된 그는, 바로다에 머무는 동안 우연히 접하게 된 명상요가의 수행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이 감옥에서의 집중된 명상요가 수련이 그를 촉망받는 정치가로부터 총체적인 자기성찰과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수행자로 변신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오로빈도 선생은 감옥에서의 수행으로 인하여 정치적 활동보다는 수행자로서의 삶에 더 의미를 두게 되었고 캘커타의 경찰들을 피하여 1910년 폰디췌리 Pondicherry로 내려와 새로운 삶을 위한 장소로 삼았다고 한다.

오로빈도 아쉬람이라 불리는 폰디췌리의 인테그랄 요가 아쉬람 은 불란서 출신의 여인 미라 알파사에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오로빈도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후계자역을 떠맡아 어머니(Mother) 불리워지게 된다. 그녀가 폰디췌리에 처음 도착하여 선생과 만난것은 1914년이었으며 1920년 두 번째로 선생을 다시 찾아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평생동안 곁에서 섬기기로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고 한다.

미라 알파사 여사에게 아쉬람의 모든 것을 일임한 오로빈도 선생은 1926년부터 그가 세상을 뜬 1950년까지 밖에 나서지 않고 방에서만 칩거하였다고 하며 엄청난 양의 편지와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오로빈도는 요가의 생활화와 봉사행을 위해 인도 델리에 오로빈도 요가 아슈람(Ashram : 요가 수도원)을 세워 요가의 보급과 사회봉사활동을 하였으며 여러 가지 요가를 하나로 통합하여 현대화하였다. 종합요가(Integral Yoga : 지식요가, 명상요가, 생리요가를 하나로 묶은 이론과 실천법)는 바람직한 융합을 시도하였다고 하며 인도 전역에 오로빈도 아쉬람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얀색 2층 건물의 커다란 대문을 지나 아쉬람으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오로빈도의 무덤주위를 둘러쌓고 앉아서 기도와 명상을 하고 있었다. 형형색색 짙은 향기의 꽃들이 무덤위에 가득하고 ‘성지순례’를 온 오로빈도의 추종자들이 경건한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실내에는 오로빈도와 마더의 사진과 엽서, 각종 저서, 명상음악을 판매하는 상점이 있었는데 오로빈도와 마더를 추종하는 방문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명상과 기도의 요람으로서 아쉬람의 모습을 기대하였는데, 아쉬람 안에서는 말도 할 수 없고 사진도 찍을 수 없으며 추종자들이 성지순례와 경건함으로 가득하였다.


오로빈도 아쉬람을 나와서 곧바로 오로빌로 향했다. 오로빈도 아쉬람에서 자동차로 30여분 거리에 그의 제자 마더가 세운 인류의 이상공동체를 꿈꾸는 오로빌이 있었다. 처음 도착한 국제센타에서 KBS 수요기획 출연한 한국인 최초의 오로빌리언 한국인 이현숙씨를 만났다.

이현숙씨는 오로빌에 있는 20여명의 한국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이 곳에 거주한 고참 오로빌리언이다. 그녀의 모습은 KBS 수요기획에서 본 모습 그대로이다. 까무잡잡하고 피부가 건강해 보였지만 약간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이현숙씨는 아무런 오렌테이션도 없이(다짜고짜) 우리는 오로빌의 이곳 저곳으로 안내하였다. 몇 몇 사람들이 기본적인 현황에 대한 설명은 들어야하지 않느냐고 하였지만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겠다고 하였다.

첫 번째로 들런 곳은 ‘Free Store'로서 누구나 필요한 물건을 바꿔가는 곳으로 재활용가게이기는 하지만, 화폐가 사용되지 않는 곳이다. YMCA가 운영하는 녹색가게가 외형은 비슷하지만 기본적으로 공동체적인 성격은 훨씬 강하였다. 화폐를 매게로 하지 않고 필요한 물건은 가져갈 수 있고 필요하지 않은 무건은 또 조건 없이 내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규모 공동체의 장점을 활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오로빌에서는 돈이 필요 없다. 모든 경제활동은 전산화된 시스템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로빌 밖으로 나갈 때가 아니면 돈이 필요하지 않다. ‘Free Store'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가져다두고 필요한 물건을 가져가서 사용할 수 있는 이름 그대로 Free 한 시스템과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이현숙씨는 아이들의 옷도 대부분 이 곳에서 가져가 입힌다고 한다. ‘Free Store'는 늘 단기 체류자들과 방문자들이 두고 가는 옷과 물건들로 인해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


Free Store가 자리한 곳은 원형의 건물인데, 하늘이 열려있어 채광과 통풍이 우수하면서도 비를 피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가운데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작은 공연장이 만들어져있고 그 주변으로 실내 건축물이 들어서있다. Free Store를 방문했을 때 이 곳에서 만난 프랑스 출신의 다른 오로빌리언은 “얼마 전에 북한 사람 2명이 방문했었다”고 전해주었다. 북한동포라는 이야기만 들어도 귀가 번쩍하는 것은 분단국가의 국민이기 때문이리라.

두 번째 방문한 곳은 달라이라마가 첫 번째 벽돌을 쌓았다고 하는 ‘티벳센타’, 티벳이 중국으로 넘어감으로써 해외로부터 많은 지원이 있어서 수월하게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최근에 만들어지고 있는 아메리칸 패밀리언센타는 20명의 미국젊은이들이 직접 공사에 참여하여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큰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다음에는 픽쳐센타에 들렀는데, 이 곳은 세계적인 수준의 엔지니어들이 모여서 ‘마더’가 세운 계획에 따라서 오로빌을 만들어가고 있는 ‘설계 사무소’와 같은 곳이다. 곳곳에 오로빌의 미래를 담은 모형과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인도에서 보기 어려운 최신형 컴퓨터들을 이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현숙씨가 근무하는 엔트리 그룹 사무실은 도서관이 있는 곳에 있었는데, 오로빌의 건축물은 어느 하나도 단순하게 지어진 것이 없었다. 건축재료도 마찬가지였는데 점심을 먹고 오후에 방문한 황토흙벽돌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 같다.

오전 일정의 마지막으로 중등학교를 방문하였는데, 최근에 지은 최신 건물에 29명의 청소년들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미국 출신의 젊은 여성 교장선생님이 학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학교건축을 제안해서 완성되었다고 한다. 나이든 선생님들이 젊은 교장선생님을 도우면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였다.


오로빌의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솔라 치킨’에서 점심을 먹게 먹었다. 채식으로 준비된 7-8개의 메뉴가 넉넉하게 제공되었고, 국적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사방이 탁 트여 바람이 잘 통하는 식당에서 즐겁게 식사를 하였다. 하루에 7-800여명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이 곳은 모두 자원봉사자에의 해서 움직인다고 한다.

아쉬운 것은 오로빌에서 생산한 농산물의 자급율이 20%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오로빌은 농산물의 자급율을 높이기 위하여 농사에 많은 지원을 하고 있지만, 워낙 척박한 토양 탓에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오로빌이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오로빌의 인구통계를 보면 명확하다. 오래전에 나온 정무진 선생의 우리는 지금 인도로 간다에는 700여명, 중앙M&B에서 발간한 세계로가다 시리즈에는 1,200명, 그리고 2002년 4월에 동아일보 기사에는 1,700여명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우리의 안내를 맡은 이현숙씨도 오로빌에는 1,700여명이 살고 있으며, 늘 수백명의 방문객들이 함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 곳에는 어른과 아이를 포함하여 20여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고 한다.


오후에는 산업지역을 방문하였다. 최근 수요기획에도 소개된 이 곳은 프랑스인 기술자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는데, 재료의 5%만을 시멘트로 섞어서 일반 벽돌보다 훨씬 단단한 압축 황토벽돌을 생산하고 있다. 새로운 소재를 연구하는 연구소와 압축프레스를 닮은 벽돌 찍는 기계가 사람의 수작업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로빌의 많은 건축물들이 이 벽돌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하며,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이 기술을 배우겠다는 요청이 있다고 한다.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소개된 이후에 국내에서도 몇 번의 문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어서 가내 수공업 형태로 이루어지는 야생화를 이용해서 소품을 만드는 곳, 수공예로 등을 만드는 공장, 실크 공장 등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이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오로빌리언이 아니라 인근지역에 살고 있는 타밀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평균 월 200루피 정도의 임금을 받고 있어서 인도의 평균 소득에 비하여 약간 높은 급여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오로빌이 자본주의적 임노동에 의하여 이윤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고 오로빌리언은 하루 5시간의 의무노동을 하는데 비하여 타밀 사람들은 8시간 혹은 그 이상 노동을 하는 것도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산업지역에서 일하는 오로빌리언들에게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는 자발적이고 창조적 노동인데 비하여, 공장에서 일하는 타밀 사람들은 인도의 여느 노동자와 다름없는 장시간 단순 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들은 인근 폰티체리에 살고 있는 다른 타밀 사람들에 비하여 안정된 일자리와 높은 소득을 보장받고 있기 때문에 만족스러워 한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마티르 만디르’이다. 축구공 모양의 금도금 원형접시가 붙어 있는 ‘명상의 성소’이다. 버스를 타고 여러번 주변을 지나갔음에도 다시 버스를 타고 마티르 만디르의 입구로 이동하였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성지순례’를 하러온 많은 인도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줄을 서서 들어서자 입구에서부터 ‘침묵’을 강요한다. 볼런티어라고 명찰을 붙인 사람들이 10여미터 간격으로 늘어서서 끊임없이 ‘조용히, 그리고 빨리 빨리’ 걸어가라고 강요한다. 마치 권위주의와 억압이 만연하던 시기에 한국에서 완장(!)을 찬 사람들을 보는 듯하였다. 마티르 만디르의 100여미터 앞에서부터는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사람들에 떠밀려서 들어간 이 곳은 원형 조형물속에 계단을 만들어서 천정 가운데 에머럴드가 있는 곳까지 걸어서 올라갔다가 내려오도록 되어있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 곳은 명상의 성소라고 하였지만, 방문객은 명상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워낙 많은 방문객으로 인하여 그럴만한 형편이 되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조형물에 대한 이들의 ‘통제와 감시(맨발과 침묵, 자원봉사자의 감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인도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완성된 조형물로서의 보존가치를 인정받지도 않은 건축물을 지나치게 ‘우상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첫 날 방문했던 인도를 대표하는 건출물 ‘타지마할’의 경우도 바로 앞에서 신발을 벗고 올라가도록 하였는데...1968년 마더가 오로빌을 시작할 때의 정신으로 오로빌이 박제화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숙씨의 이야기에서도 ‘마티르 만디르’는 마더의 이상과 전망이 고스란히 실현되는 곳으로 표현되었다.

그렇다면, 오로빌은 현재 오로빌에 살고 있는 오로빌리언들에 의해서 생명을 가지고 늘 새롭게 재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마더’에 의해서 창조된 모습대로 가고 있다는 것인가. 100년 후 5만명의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아름다운공동체를 과연 ‘1968년의 비젼’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2003년 4월 13 ~ 22일까지 진행된 NGO 활동가 인도 해외연수 참가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