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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초등생 학급회의 보다 못한 학부모 총회

by 이윤기 2009.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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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21일) 마산 A초등학교에서 '잔디운동장 교체'를 안건으로 하는 학부모총회가 열렸습니다. 전교생이 994명인 이 학교 학부모 총회에는 112명이 참석하였습니다.

57명의 교직원을 포함하여 169명이 인조잔디와 천연잔디 설치를 결정하는 기명(?)투표에 참여하여 인조잔디 찬성 140명, 천연잔디 찬성 25명, 무효 4명으로 인조잔디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투표 결과를 들은 많은 시민들이 인조잔디의 유해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결정이 학부모 총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의아해 하시더군요.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이지만, 학부모 총회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시면 어렵지 않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단순히 수치상의 결과만 보면 큰 문제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만, 현장에서 학부모총회를 지켜본 제 입장에서는 초등학교 학급회의나 반장선거보다 못한 학부모 총회를 통해 우리 생활속 민주주의가 어떻게 정착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학급회의와 학생회장 선거 등을 통해 민주주의와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A초등학교 '학교운동장 조성을 위한 학부모 총회'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한 번 보시지요.

▲ 인조잔디로 시공한 마산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



학교에서 학부모 총회 이렇게 해도되나?

첫째, 현수막이 잘못 걸렸습니다. A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에게 분명히 '학부모 총회'를 한다고 말씀하셨고, 당일 회의 때도 '학부모 총회'라는 표현을 여러번 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일 현수막은 '학교운동장 조성 학부모회의'라고 붙어있습니다.

일 반적으로 정기총회나 임시총회는 보통 회의에 비하여 중요한 안건을 다루게 되고 총회안건은 회칙에 정해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도적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학교운동장 조성을 위한 '학부모회의'로 격하시킨 것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둘째, 의사진행권 문제입니다. 모임의 성격이 학부모 총회든, 학부모회의든 학부모 대표가 회의를 진행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학부모회가 구성되어 있다면 학부모회장이 의장이 되는 것이 상식이고, 만약 학부모회가 구성되어 있지 않다면 학교운영위원장이 회의진행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A초등학교는 '학부모 회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교감선생님이 진행하셨고, 회의에 참석한 학부모들에게 회순을 확인하거나 안건토의, 기타토의 같은 것도 전혀 없이 학교측이 정해놓은 순서에 따라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아 나중에 확인해보니 학교측에서 정해놓은 순서도 다 지키지 않았더군요. 환경단체와 교사대표, 전임 교장선생님이 각각 제안설명을 한 후에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는데, 이 마저도 시간이 없다고 그냥 생략해버리더군요.

학부모는 발언, 토론, 질문도 없는 학부모 총회

셋째, 학부모 총회에 학부모는 누구도, 단 한 차례도 발언하지 못하였습니다. 회의의 명칭은 '학교운동장 조성 사업학부모 회의'인데 학부모 중에서 누구도 "인조잔디를 하자, 천연잔디를 하자, 아니면 잔디를 하지 말자"와 같은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학부모들은 교장선생님, 환경단체 실무자, 환경담당 교사, 전임교장 선생님의 지루한 설명을 1시간 30분 가량 듣고 곧 바로 투표를 하였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학부모들이 서로 의견을 말하고, 토론하는 과정은 완전히 봉쇄 당하였더군요.

학부모들의 발언과 토론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원래 순서에 포함되어 있던 질의응답마저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생략되었습니다.

결국, 학부모들은 환경단체로부터 인조잔디 유해성에 관하여 20분간 설명을 듣고, 곧이어 환경담당 교사, 전임교장 선생님으로부터 40분 이상 인조잔디가 안전하다, 천연잔디가 오히려 위험한 측면이 있다고 하는 과장된 설명을 듣고 투표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환경단체 역시 교직원들의 일방적인 인조잔디가 안전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으면, 학부모들도 학교측 입장을 대변하는 환경담당 교사와 전임교장 선생님의 발언에 대하여 반론이나 혹은 질문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 학교운동장 결정을 위한 투표를 하고 있는 학부모들


회의 성원, 정족수도 없는 회의와 투표

넷째, 이 회의에는 정족수가 없었습니다. 회의의 일반 원칙을 적용하자면, 총회원의 과반수 참석에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학부모 총회에는 과반수가 참석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에 정족수 과반수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전에 회의 정족수에 관한 원칙은 정해져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의 당일이 되어서 참석한 학부형을 정족수로 하고 찬성과 반대의견 중에서 많은 쪽으로 결정하겠다고 발표하였기 때문에 사실 절차상 하자가 큽니다.

결국 학부모 총회를 부실하게 준비하였기 때문에 전교생이 994명인 학교에 112명의 학부모만 모여서 학교운동장에 인조잔디를 조성하자고 하는 무책임한(?) 결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섯째, 회의를 위한 일반 규칙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학부모들의 의견을 묻는 투표 절차 역시 엉터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결정을 하는 투표라면 꼭 현장에 와서 투표를 하는 방식뿐만아니라 더 많은 학부모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우편투표를 할 수도 있고, 혹은 토요일 오후까지 투표 시간을 연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A초등학교 학부모 투표는 '놀토'가 아닌 토요일 오전에 당일 학부모 회의에 참석한 소수 학부모만을 대상으로 하여 치러졌습니다. 정족수에 비하여 워낙 적은 숫자인 112명의 참석학부모가 투표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이 학교 학부모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름 적어 넣는 기명투표, 그래도 문제 없다는 학교

여섯 째, 기명투표입니다. 이날 투표용지는 학부모들의 생각을 묻는 설문조사용지인지, 혹은 투표용지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투표자 이름을 적고 인조잔디에 찬성하는지, 천연잔디에 찬성하는지 표시하도록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학부모들이건 교사들이건 이런 예민한 사항을 투표로 결정하면서, 그리고 사실상 자녀를 볼모로 맡겨둔 학교가 추진하는 일에 대하여 이름을 적고 투표하면서 학교 입장과 반대되는 투표를 하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는 초등학교 사회시간에도 다 배우는 민주주의 투표와 선거의 가장 기본적이 되는 원칙입니다. A초등학교 학교운동장 조성 학부모회의와 투표는 이런 기본적인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진행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이름을 적지 않은 투표용지를 무효로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더군요.

일곱 째, 학부모 총회를 개최한다고 하면서 교직원 57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학부모 투표와 합산하여 결정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직원 의견이야 학부모 총회를 위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겠지만, 교직원들의 의견을 학부모 의견과 똑같이 반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학교장과 교직원들은 인조잔디 조성에 찬성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조잔디 조성 사업을 추진해 왔습니다. 학교장과 교직원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해 오던 인조잔디 조성공사가 유해성 논란이 벌어지면서 학부모회의를 통해 결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학부모들의 의견만 반영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교직원 투표의 합산 여부와 상관없이 인조잔디 조성으로 결정이 났지만 절차상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 이름을 적는 기명 투표용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민주주의, "찬성만 많으면 그만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학교장과 학교측에서는 절차상 전혀 하자가 없다고 믿고있다는 것 입니다.

A초등학교 인조잔디 운동장 조성 문제가 중요한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탓에 경남방송에서 기자와 카메라가 나와서 회의 전체 과정을 보두 촬영하였고 경남도민일보 기자분이 현장 취재를 하였습니다.

민주적인 회의 원칙을 지키지 않고 진행되는 학부모 총회와 학부모 투표를지켜보던 경남방송과 도민일보 기자가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이뤄지기 전에 회의 진행과 투표 절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교장선생님과 학교측에 문제제기를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나 학급회의도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민주적 의사결정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학부모 총회를 이런식으로 진행해도 됩니까?"

경남방송, 도민일보 기자의 이런 질문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교장선생님과 학교측에서는 절차상 전혀 하자가 없었다고 학부모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인조잔디 운동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학교운동장을 인조잔디로 만드느냐, 천연잔디로 만드느냐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모두 놓치고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학교를 보면서 한국교육의 앞날을 보는 듯하여 가슴이 답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