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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생명, 평화

2만 리 이상 걷고, 50만 킬로 넘게 달려보니

by 이윤기 2010.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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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이원규 산문집 <지리산 편지>

지난해 여름 아이와 함께 지리산길을 걷고 왔습니다. 지리산길을 걸었더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와 블로그에 올렸는데 많은 분들이 읽고 공감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TV동화 행복한 세상에서 방송용 에니메이션으로 제작하여 저희의 지리산길 여행이야기는 더욱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

여름에 여행을 다녀와 지리산길에 대한 관심이 한참일 때 모잡지에서 지리산길 미개통 구간을 안내하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리산 둘레를 잇는 길을 처음 개척한 사람이 이원규 시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리산과 지리산길에 대한 관심이 이원규 시인이 쓴 책 <지리산 편지>를 만나는 인연으로 이어졌습니다.

책을 사서 책꽂이에 꽂아둔 채 시간이 많이 흘러 어느 새 또 여름이 되었습니다. 다시 지리산이 그리워지는 계절이 되었고, 채꽂이에 꽂아두고 잊고 지냈던 <지리산 편지>가 생각났습니다. 장마비가 서글프게 내리는 날, 남해의 편백나무 숲에서 이원규 시인이 쓴 지리산편지를 읽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뉘어 쓴 편지가 겨울로 끝날 줄 알았는데, 다시 봄으로 이어지는 다섯 계절의 편지를 ‘화살’을 맞은 것처럼 읽었습니다. 화살을 맞은 듯이 읽은 까닭은 그가 독자들에게 ‘화살편지’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우편집배원과 우체국과 우체통을 그치지 않고 그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날아가는 화살 편지- 핸드폰을 끄고, 그대 심장의 문설주를 향하여 꽃눈의 화살촉과 일초직입 시누대의 곧은 몸과 봄 햇살의 깃을 단 화살에 편지를 질끈 동여매어 날리고 또 날립니다.”

이원규 시인은 11년째 지리산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지리산에 기대어 철새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입산 10년이 넘도록 이 골짜기 저 골짜기 빈집을 떠돌았지만, 철새처럼 집이 없어도 불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2만 리 이상 걷고, 50만 킬로를 넘게 달려보니

지난 10년 동안 지리산 칩거 기간을 뺀 나머지 날들은 언제나 길 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얻어먹고 얻어 자며 2만 리 이상을 걸었고, 모터사이클을 타고 50만 킬로미터 이상을 달렸다고 합니다.

“수경 스님, 도법 스님과 맺은 인연으로 지리산과 낙동강 도보순례와 새만금 삼보일배, 북한산과 천성산과 가야산, 평택 대추리와 생명평화 탁발순례 그리고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종교인 1백일 순례단의 총괄팀장을 맡는 등등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했지요.”

“한강 하구인 김포 애기봉 전망대에서부터 출발해 남한강, 달천(달래강)을 거슬러 오르고 백두대간인 문경새재를 넘어 영강과 낙동강을 따라가며 1천5백 리 봄 마중을 나갔습니다. 마침내 봄을 모시고 영산강과 금강 등 4대 강을 마저 걷고 서울까지 북상하면 장장 삼천리 길이 되겠지요.”

“지난 몇 년 동안 민족의 젖줄 낙동강 1천3백 리를 걷고, 또 지리산 둘레 850리를 두 번, 그리고 제주도와 경상남도 내륙과 한강, 남한강, 영산강, 금강 등 어언 2만 리 길을 훨씬 넘게 걸어 그대에게 가고 또 가지만 이 길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원규에게 문학은 언제나 이후였다고 합니다. 시는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돌아보면 한참 뒤에서 발자국 위에 미아처럼 쪼그려 앉아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의 삶에서 전위부대는 시가 아니라 물집 잡히는 발바닥 아니면 모터사이클이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속도로 걷다보니 시와 편지는 손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쓰는 게 아니라 오직 발로 쓰는 것이라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로 쓰는 편지를 족필이라고 하더군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온 세상이 거대한 원고지라면 원고지 빈 칸마다 발자국을 찍으며 시를 쓰고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렇게 쓴 편지가 바로 <지리산 편지>입니다. 그가 쓴 편지에는 기대어 사는 지리산에서부터 우리 땅 곳곳은 말할 것도 없고, 바이칼 호수와 우랄산맥으로까지 이어진 발자국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가 발로 쓴 편지에서 화살처럼 마음에 와서 꽂힌 대목을 골라 소개해보겠습니다.

매화가 풀꽃이고 풀꽃이 매화인줄 알고 나니

“매화가 아름다우니 풀꽃이 아름답고, 풀꽃이 아름다우니 매화향도 짙은 법입니다. 한해살이 풀꽃이 죽어 매화가 되고, 매화꽃이지면 그것이 또 다음 해의 풀꽃으로 피는 것이지요.”

매화나무 아래 자라는 풀꽃이 매화가 되고, 매화꽃이 떨어져 풀꽃이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더군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매화가 풀꽃이고 풀꽃이 매화인셈입니다. 모두 서로 기대어 살고 있었더군요.

그가 사는 지리산 자락 섬진강변에는 매화가 많이 핍니다. <지리산 편지>에는 여러 꽃들이 등장하지만 매화향 그윽한 차를 마시는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옵니다. 이런 호사(?)를 누려보지 못한 도회지 것들은 돌아오는 봄에 매화향에 취해보고 싶은 마음이 발동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매화향에 취하는 것은 너무 상투적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작은 풀꽃의 자세로 몸을 낮추고 절을 해보라고 합니다. 아내에게, 남편에게, 아이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맞절을 해보라고 합니다. 커다란 거울을 세워놓고 거울 속의 자신과도 몸을 낮추어 맞절을 해보라고 권합니다.

알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해보았노라고 말 합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깊어지고 충만한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시인은 세상에 악연은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악연이라고 합니다. “악연은 잘못된 만남이 아니라 한 하늘 아래 살면서 아예 만나지도 못하는 것”이 악연이라는 것이지요.

“연기암의 물봉선 하나가 지는 데도 필연적인 이유가 있고, 그 꽃잎 위에 내린 이슬 하나에도 실로 머나먼 여정과 엄청난 비밀이 스며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65억 분의 1의 확률로 만난 그대와의 인연, 그 얼마나 섬뜩할 정도로 소중한지요. 극소와 극대, 순간과 영원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세상에 악연은 없다고 합니다. 시인의 편지를 읽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한 하늘 아래 살면서 아예 만나지도 못하는 것에 비하면 모든 만남은 틀림없이 인연인 듯합니다.

매화가 풀꽃이고, 풀꽃이 매화인 줄 아는 것처럼, 내가 너고, 네가 또 나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모두가 인연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요.



한 번 지리산과 맺은 인연은 쉬이 끊기지 않는다

지리산에 가보셨는지요? 대학시절 처음 천왕봉을 다녀온 후에 참 많이 지리산자락에 기대었습니다. 지리산 둘레길, 백무동 자락, 마천자락, 실상사 주변, 벽소령 아래 의신마을, 노고단, 쌍계사 계곡, 칠선계곡, 중산리 계곡, 대원사계곡 그리고 몇 차례의 지리산 종주와 여러 차례의 지리산 산행 짧은 만남이지만 지리산과 인연을 오랫동안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리산과 한 번 인연을 맺은 사람은 누구나 지리산을 그리워합니다. 날 잡아 꼭 한 번 다시 지리산에 가겠다는 계획을 수 없이 세웁니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되면 지리산은 늘 만원이라고 합니다. 지리산이 몸살을 앓게 된다고 합니다.

제가 지리산과 맺은 인연도 산이 몸살을 앓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하는 시를 썼습니다. 작년 여름 난생 처음 지리산 종주를 다녀온 후배에게 이 시에 곡을 붙어 안치환이 부른 노래를 선물로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마침 지리산이 또 몸살을 앓은 휴가철이네요. 시인은 지리산에 오는 사람들에게 딱 세 가지만이라도 지켜주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첫째, 기름기 많은 푸짐한 음식은 되도록 숙소에서 해결하고 청정계곡에서는 미리 준비한 시원한 국수나 과일 등으로 점심을 먹는 것은 어떨지요. 둘째, 계곡 물은 결국 우리 모두의 식수원이니 탁족까지는 좋지만 제발 세제나 샴푸 등을 함부로 쓰는 것을 자제해야 하겠지요. 셋째, 술만 들이켜지 말고 천천히 녹차라도 음미하며 지리산을 온몸으로 담아가는 것은 어떨지요.”

짧은 휴가철에 지리산의 푸른 눈으로 세상을 둘러볼 줄 아는 경이로운 지혜를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지리산을 함부로 대하고 스스로를 망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은?

봄, 여름이 지나고 가을 편지에는 단풍이야기가 나옵니다. 계절이 가을이니 단풍이야기는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럽기도 하겠지요. 사람들은 단풍나무며 붉나무며 온 산을 물들이는 노랗고 붉은 기운에 취하지만, 시인은 가을 들녘과 농부의 구리빛 근육에 진짜 단풍이 든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의 기운은 저 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설악산이며 내장산이며 지리산이 아니라 바로 구례 들녘이나 하동군 악양면 무딤이 들녘의 황금빛 물결이며, 그 물결 속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함께 사는 농부들의 구리빛 근육입니다.”

단절을 모르는 농부의 삶은 봄에 여름을 생각하고, 여름에 가을을 생각할 뿐 아니라 봄에 가을을, 가을에 봄을 준비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벼를 수확하면서 동시에 내년 봄에 피어날 자운영 꽃씨를 뿌리는 것이 농부의 삶이라는 겁니다.

돌아오는 가을에는 황금빛 들녘에서, 온몸과 정성을 기울여 일하는 농부의 구리빛 근육에서 진정한 가을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보아야겠습니다. 삶을 자연의 속도로 살지 않으면 이런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한 번쯤 쉬어야 하는 길이 십 리 길이고, 하루 종일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가 바로 백리길이지요. 이는 사람만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꽃이 북상하는 속도, 단풍이 남하하는 속도가 모두 비슷하다고 합니다. 자연의 속도와 사람의 속도가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은 사람의 속도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한 시간에 십 리, 하루에 백리 길을 걷는 경험이 쌓여야 자연의 속도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속도를 회복하여야 자연의 속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구요. 시인은 “걷는 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빠른 길”이라고 합니다.

시인이 발로 쓴 <지리산 편지>가 당신에게도 삶을 돌아보고 자연의 속도에 맞추어 생명을 회복하게 하는 ‘화살 편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리산 편지 - 10점
이원규 지음/북스캔(대교북스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