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 정치

아테네는 왜 추첨으로 대표를 뽑았을까?

이윤기 2026. 8. 13.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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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KBS1 라디오 <라이브 경남>에서 매주 월요일 이윤기의 세상읽기 코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방송 내용과 조금 다른 초고이기는 하지만 기록을 남기기 위해 포스팅 합니다.(2026. 8. 4 방송분)

 

추첨보다 못한 민주주의, 과반 다수결

 

지난주 방송에서 지방의회 의장단 선출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갈등과 민생보다 감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모습을 전해드렸습니다. 의장과 상임위원장 선출과정에서 지역 유권자의 표심을 무시하고 과반을 차지한 정당이 모든 자리를 차지하는 불합리한 구조를 함께 지적하였는데요. 오늘은 여러 사람이 모여 대표를 뽑거나 구성원들 간에 생각이나 이해가 다른 의사결정을 과반 다수결을 대신할 수 있는 사례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학급 반장 선거나 계모임 회장 선거부터 시, 도의원이나 국회의원, 그리고 대통령 선거까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은 선거를 통해 다수의 지지를 받는 사람을 대표로 뽑는 것입니다. 워낙 익숙하기 때문에 가장 민주적인 대표 선출 방법으로 여기고 있는데요. 하지만 대표를 민주적으로 뽑는데, 선거를 통해 다수결로 뽑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단히 공정하면서도 가장 널리 사용되는 방법 중 하나는 추첨입니다. 계모임이나 단체의 경우 대표를 맡을 사람이 없을 때, 제비뽑기로 대표를 억지로 맡기는 일이 있는데, 이럴 때는 뽑힌 대표가 제 역할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사례를 보면 다수결로 대표를 뽑는 것보다 더 나은 결론이 이르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아테네는 왜 추첨으로 대표를 뽑았을까?

 

정치학자들은 고대 아테네에서 사용된 추첨제도는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구현시킨 제도로 평가합니다. 우리말로 민주주의라고 번역하는 데모크라시의 어원은 데모스인데요. 데모스는 인민, 국민, 시민과 같은 전체 구성원이 스스로 통치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기원전 7세기 후반 무렵 아테네는 평민들의 경제력이 성장하고 군사적인 역할이 확대되면서 정치 참여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추첨제 도입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추첨제 도입 이후 아테네 사람들은 배심원
, 500인 평의회 의원, 기타 행정관을 모두 추첨으로 뽑았다고 합니다. 추첨은 특정 세력의 권력 독점을 막고, 관직을 정기적으로 교체하기 때문에 소수 엘리트주의를 차단할 뿐만 아니라 구성원 누구나 대표가 될 수 있어 민주주의 원칙에 더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지금처럼 인구도 많지 않고 사회가 복잡하지 않았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텐데요. 가만히 둘러보면 지금도 더 평등하게 대표를 뽑기 위해 혹은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대표를 뽑거나 어떤 일을 결정하기 위해 추첨으로 대표를 뽑는 일은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추첨으로 대표를 뽑는 곳은 바로 주민자치회입니다. 지역마다 사정이 조금씩 달라 읍면동장 추천으로 위원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특정 지역에 거주하면서 정해진 교육을 이수하는 일정 조건을 갖춘 사람 중에서 추첨을 통해 주민자치위원을 뽑도록 하고 있습니다. 주민 누구나 주민자치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평등권을 확실하게 보장하면서 선거로 대표를 뽑을 때 발생하는 과도한 경쟁을 없애고, 선거관리 비용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추첨제로 대표를 뽑는 것입니다.

 

투표보다 나은 추첨, 주민자치위원 선출

 

아울러 유럽 몇몇 나라는 지방의회를 대신하는 시민의회를 제도화 시키고 있습니다. 벨기에는 2019년부터 선거로 뽑힌 지방의회가 있는데도, 입법과정에 주민참여를 높이기 위한 비상설 시민의회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시민의회는 최대 50명의 시민을 추첨을 통해 선발하고, 3~4개월 동안 주말에 모여 집중토론을 하여 선거의회에 제출하는 역할을 합니다. 벨기에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파리시는 2021년부터 상설 시민의회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선거형 의회와 별개로 무작위 층화추출로 선발된 100명으로 구성된 시민의회를 운영하는데요. 전체회의는 1년에 2 번 열리지만, 사안별로 구성되는 상임위원회는 연중 활동을 합니다. 17명의 시민의원과 전문가, 이해관계자들이 모여 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3개월 동안 협력하여 권고안을 만들어 시민의회에 제출하는데요. 시민의회는 이를 법안으로 만들어 선거의회인 파리시의회에 제출하고 의회가 토론하고 투표하는 방식으로 운영합니다.

 

우리나라도 주민이 직접 조례를 발의할 수 있는 제도가 있지만, 절차가 복잡하고 과도한 주민서명 절차 때문에 실제로 조례가 만들어지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워 유명무실합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시민의회를 도입하면 추첨으로 뽑힌 시민의회가 선거로 뽑힌 지방의회와 함께 지방정부를 운영에 참여할 수 있을것입니다. 시민의회가 제도화되면 상시적인 주민참여가 보장되어 1인 시위를 비롯한 집회 시위도 줄어들고 집단 민원도 감소하여 사회적 갈등 비용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일랜드 시민의회

 

추첨으로 뽑는 파리 시민의회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시도가 있었습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7월말부터 3개월에 걸쳐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두고 시민참여 공론화 과정을 진행하였습니다. 행정부나 국회가 모든 걸 결정하던 관행을 깨고, 각계 전문가 9명으로 구성된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시민참여단 500명을 선발하였습니다.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시민참여단 선발은 전국 26명에 대한 1차 전화조사 후에, 공론화 참여 의향자 5047명 중에서 추첨을 통해 500명을 확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시민참여단에는 친원전 및 탈원전 입장을 가진분들이 섞여 있었고, 원전 찬반 전문가들이 작성한 문서와 영상물을 보고 학습 할 수 있게 하였구요. 여러 논란도 있었지만, 7회의 지역 순회 토론회, 5회의 TV 토론회, 1회의 미래 세대 토론회를 거쳐 최종적으로 23일간 합숙 숙의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처음 진행하는 공론화 과정에서 여러가지 미숙한 진행도 있었고, 친원전측과 탈원전측의 갈등하고 부딪히며 공론화 과정이 무산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최종 결론을 끌어냈습니다.

 

문재인 정부 원전 공론화...소중한 합의제 사례

 

결론은 공사가 진행 중이던 신고리 5, 6호기는 건설하지만, 앞으로 원전을 확대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앞으로 원전을 늘이자는 의견은 9.7%에 불과하였고, 현상유지 35.5%, 축소 의견은 53.5%였습니다. , 환경단체들이 반대하던 신고리 5, 6호기 공사는 재개되었지만, 향후 탈원전 정책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똑같은 결론이 났어도 대통령과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했다거나 혹은 국회에서 다수결로 결정했다면 양측 모두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시민대표를 선거가 아니라 투표로 선출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갈등과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우리 모두가 결과에 더 쉽게 승복하는 대표 선출 방식은 다수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승자독식의 과반다수결로 결정하는 경우 결국 반대파와 소수파는 무관심과 불참을 선택하게 됩니다. 서로의 이해를 조정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결론에 이르는 합의제와 추첨제는 다수결보다 더 나은 민주주의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속한 크고 작은 모임부터 합의제와 추첨제를 도입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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