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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시사, 사회

흑인 노예를 대신하는 처참한 아동 노예?

by 이윤기 2012.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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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4강 진출로 온 국민이 흥분을 감출 수 없던 그 무렵, 축구공을 만드는 어린이 노동의 심각한 착취 현장을 소개한 글을 읽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월드컵은 페어플레이 정신을 바탕으로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 줄 수 있는 대표적인 국제행사로 알려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월드컵을 이윤추구의 장으로만 생각하는 초국적 기업들이 있다. 


이들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서 제3세계와 아시아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으며, 심지어 5살 6살 어린 아동들의 노동까지도 심각하게 수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32조각의 가죽과 1620회의 바느질, 어린이들의 하루 일당 300원, 축구공 하나 만드는데 13시간, 하루 노동시간 12시간, 만드는 아이들 15000명, 나이키 축구공 15만원."( '축구공의 경제학')


이른바 '축구공의 경제학'이라고 알려진 통계들이다. "32개로 쪼개져 있는 가죽들을 힘껏 꿰매다 보면 어느새 손에 셀 수 없는 상처들이 난다"고 한다. 상처가 나도 약이 없고, 5살 때부터 축구공을 만들던 아이들은 스티커를 붙이는 화학약품의 강한 독성으로 인해 시력을 잃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많은 양심적 세계시민들이 제3세계 아동노동의 심각한 착취를 고발하는 이런 기사를 읽고, 어린이 노동에 반대하는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초국적 기업들이 만든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한 줄 알았다.


어린이 노동으로 지탱하는 자본주의의 야만성


<다른 세상의 아이들>을 쓴 제레미 시브룩은 어린이 노동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오늘날 서남아시아와 방글라데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어린이 노동의 심각성을 고발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서남아시아에서 이루어지는 어린이 노동이 어떻게 '세계화 시대'의 자본주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노예노동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린이 노동으로 대체되었는가? 


1800년대 영국에서 이루어졌던 어린이 노동 착취와 200년 후 방글라데시 어린이에 대한 노동 착취는 무엇이 다르고 또 같은지를 보여준다. 200년 전에 기록된 여러 기록물들을 통해서 200년의 시간적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방글라데시 어린이 노동자의 삶이 너무나 똑같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제레미 시브룩은 "19세기 초 영국과 오늘날 방글라데시의 자유시장적 폐해 및 카리브지방과 북아메리카의 노예 플랜테이션 사이에서 나타나는 유사성을 추적해 왔다". 그는 해로운 노동시장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변화하며 세계의 다른 장소로 옮겼을 뿐이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고발하고 있다. 


그는 산업화 시기의 영국에서 어린이 노동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아프리카 노예 노동력을 대체하게 되는지를 상세하게 추적하고 있다. 영국 본토의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공장과 탄광에서 여성과 어린이의 수가 증가했고, 그리하여 어린이 노예수도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훗날 더 이상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공급받을 수 없게 될 때를 대비하여 어린이를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흑인 노예를 대신한 어린이 노동


"부모를 잃거나 버려진 아이들이 정원 이상으로 넘치는 런던 구빈원에는 즉시 고용 가능한 어린이 노동자들이 많았고, 게다가 그들은 불타는 고향에서 영국 노예선 화물칸으로 끌려온 흑인들에 비해 주인의 손아귀에서 훨씬 더 수동적이고 무력했다.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아이들의 경우에도 삶은 기껏해야 힘겨운 것이요 선택은 흔히 이런 저런 노예상태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었다. (본문 중에서)"


1843년에 씌어진 어린이고용위원회 보고서들은 캘리코날염·레이스·양말·금속·질그릇·유리·종이·담배제조업의 여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위원회는 아이들이 보통 서너 살에 자기 집에서, 다섯 살에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며, 일고여덟 살에 이르면 정식으로 고용된다고 보고했다. 1일 노동시간은 12시간인 경우가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는 15시간, 16시간, 18시간 순이었는데, 대체로 어른들의 노동시간과 비슷했다. (본문 중에서)"


19세기 초 영국에서 아이들은 공장 바닥에서 면화 쓰레기를 주웠다. 기계 밑으로 기어 다녀야 하기 때문에 몸집이 작을수록 좋았고 공장 아이들의 4분의 3은 방적기에서 끊어진 실을 잇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21세기 방글라데시 다카의 의류공장 아이들도 비슷하다. 언니 누나들이 일하는 재봉기 아래쪽 바닥에 앉아 쓰레기를 치우고 실을 자르고 단추를 꿰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19세기 초 영국과 21세기 방글라데시의 어린이 노동 실태를 비교함으로써, 서구에서 사라진 노예노동과 어린이 노동이 장소를 옮기고 대상만 바뀌었을 뿐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아울러 노예 노동과 어린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서구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결국 서남아시아의 ‘현대판 노예노동’과 어린이 노동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방글라데시의 착취당하는 어린이들


제레미 시브룩은 <다른 세상의 아이들>에서 오랫동안 취재를 통해 방글라데시 곳곳에서 만난 아이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소개하고 있다. 


"아클리마는 여섯 살이다. 그녀는 햇빛에 변색되고 벽돌가루로 더럽혀진 꽃무늬 드레스 위에 진주빛깔의 구슬 목걸이를 걸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와 두 언니들과 함께 벽돌을 깬다. 그녀의 가족은 통틀어 하루에 50~60다카(800원 안팎)를 번다. 그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열두 살의 하니프는 베이비택시 정비를 배우며 하루에 20~30다카를 번다. 그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하니프는 벌써 5년간 일해오고 있지만, 첫 3년간은 수입이 전혀 없었다. 자심은 아홉 살이다. 그는 선반을 운전하며, 고장 및 사고차량을 수리하는 데 필요한 부품을 만든다. 자심은 일을 시작한 지 고작 몇 달 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까지는 단 한 푼도 벌지 못했다. 


열다섯 살인 바부도 폐품을 줍는 아이다. 그는 세살 때 다카로 왔다. 그는 쓰레기 더미를 찾아 멀리 공장과 산업단지 주변지역으로 돌아다녔다. 그렇게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일하며 하루에 20~30다카를 벌었다. 리폰은 아홉 살이었다. 그는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사탕을 팔았다. 그렇게 한낮부터 밤까지 일하면서 매일 20~30다카를 벌었다.


사이폴은 여덟 살이었다. 그는 이따금 다른 가정의 집안일을 했고, 간혹 사탕을 팔았으며, 때때로 쓰레기통에서 폐품을 수집했다. 그는 하루에 5~15다카를 어머니에게 주었고 그 돈은 쌀과 야채를 사는 데 쓰였다. (본문 중에서)"


그는 수없이 많은 어린이들을 만났다. 벽돌 깨는 작업장에서, 쓰레기를 줍는 곳에서, 섬유공장과 봉제공장에서 어린이들을 만났다. 또한 하녀로 일하는 아이들, 부모도 없이 역 광장에서 먹고 자는 아이들도 만났다.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많은 아이들을 만나서 그들의 고단하고 힘겨운 삶을 <다른 세상의 아이들>을 통해 가감 없이 전하고 있다.


제레미 시브룩은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서남아시아에서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노예노동과 어린이 노동이 서구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서구에서 (대부분의) 노예노동과 어린이 노동이 사라진 것은 서구사회가 이룩한 부의 축적과 풍요 수준으로 가능하였는데, 서남아시에서 이같은 일이 결코 반복될 수 없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어린이 노동, 금지가 대안은 아니다


그는 서구가 부유해진 것은 "합병할 수 있었던 영토들, 자국민의 기본적인 편의를 위해 임의로 처분했던 다른 국가의 땅과 부·자원 수탈"로부터 기인하는 '식민경제 모델'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서남아시아 국가들에게는 같은 기회(?)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또한 너무나 서구중심적인 '양심을 위한 불매운동'류의 맹목적인 어린이 노동 반대론자들의 주장도 비판한다. 예컨대 19세기 초 런던에서부터 21세기 다카에 이르기까지 "세계전역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어린이 노동의 금지는 종종 그 가족들을 더더욱 깊은 가난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아울러,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의 회담에서 시도되었던 "어린이 노동과 죄수 노동, 예속 노동을 비롯한 현대 세계에 잔존하는 노예제도의 교묘한 변형들 일체를 금지하려는 움직임에 제3세계 정부들이 격렬히 반발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그들은 자국의 어린이 노동을 금지시키려는 사악한 보호주의에 기반한 강대국들의 기만적인 의도에 반발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인도주의자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노예노동과 어린이 노동을 근절시키기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인 여러 비정부기구들이나 국제구호NGO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어린이 교육' 역시 바람직한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 


"교육을 받았지만 일자리가 없는 수백만 명의 제3세계 젊은 남녀들이 보여 주듯이" 12년 혹은 15년의 교육이 그들의 가난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과 서구사회가 그들에게 주려는 것 사이에는 너무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도 확인시켜준다.


"그들이 원하는 바는 착취와 폭력, 괴롭힘으로부터 보호받는 것, 어른들처럼 노동자로 인정받는 것, (어른들에게도 이따금 허용되듯이) 조직을 이룰 수 있도록 허용되는 것, 그리고 가족 및 그보다 넓은 사회에서 자신들의 기여를 평가받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제레미 시브룩은 어린이 노동에 대한 금지론와 옹호론이 단순하고 간단하게 논의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경제적인 기준만으로 어린이의 일과 노동의 의미를 파악할 수도 없다고 한다.


"문화적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어린이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인정해서도 안 되고, 서구적인 가치들을 보편화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근절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본문 중에서)"


'땅'과 '일' 소농 중심의 농촌공동체가 대안


그는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가난한 도시빈민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노동이 아닌 '일'과 '땅'이라고 말한다.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만한 땅을 가진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꼭 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이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가진 비옥한 논 이외에 다른 직장이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가 만난 도시의 어린 노동자들은 한결 같이 토지를 잃고 일자리를 찾아서 농촌에서 도시로 밀려난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농 중심의 농촌공동체'가 그들이 가진 가난을 해결할 수 있으며, 산업자본주의에 기반한 착취적인 노동의 고리를 끊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세계의 어린이들이 숱하게 당하는 착취와 모멸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그것을 잊고 지내는 것은 예전에 우리 아이들이 알았던 그 고통에 관한 모든 기억을 우리의 집단적인 경험에서 깨끗이 지워버리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그 아픔을 다카의 어린 소녀들과, 쓰레기를 줍는 거리의 아이들과, 미싱 아래에서 실밥을 뜯는 아이들에게 옮겨놓고, 그들이 가진 다른 피부색, 다른 기후, 별개의 종교, 이질적인 언어를 핑계로 망각의 길로 도망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제레미 시브룩이 쓴 <다른 세상의 아이들>에는 30년 전 ‘평화시장’ 어린 노동자들의 삶과 그보다 10여 년 전 방직기계 앞에서 졸음을 참으면서 밤을 새던 ‘우리 어머니’ 또래 어린 소녀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을 읽는데 참으로 여러 날이 걸렸고 참으로 여러 번 마음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울었다.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생태적 위기와 자유무역체제로부터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도, 방글라데시 다카의 어린 노동자들도 그들의 <오래된 미래>인 '소농 중심의 농촌공동체'로부터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세상의 아이들 - 10점
제레미 시브룩 지음, 김윤창 옮김/산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