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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시사, 사회

가난한 사람들을 당신의 여섯째 아들로 삼으라!

by 이윤기 2008.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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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와 90년대, 치열한 변혁을 꿈꾸던 한국 사회운동이 새로운 세기를 맞으며 다양하게 분화 발전하고 있다.

이런 분화과정에서 우리나라에도 뚜렷하게 '명상과 혁명'을 실천하는 한 흐름이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생명운동으로 드러나고 있는 이 흐름에는 과거 변혁운동에 치열하게 참여하였던 활동가들 상당수가 참여하고 있지만, 과거 변혁운동과는 다른 철학과 관점으로 나아가고 있다.

연기적 세계관을 토대로 기도와 명상을 중심으로 하는 자기성찰과 사회변화 못지않은 자기변화를 중심에 두는 실천운동이 다양하고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생활협동조합운동이나 정토회를 중심으로 펼치는 빈 그릇 운동과 같은 실천운동으로 나타나나기도 하고, 경부운하 예정지를 걸으며 '생명의 강'을 만나는 활동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혁명과 명상! 얼핏 어울리지 않을 두 단어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 그는 바로 비노바 바베이다. 간디와 더불어 현대 인도를 대표하는 정신적 지도자이자 사회개혁가로 꼽히는 그는, 간디의 제자이자 동료로 '비폭력저항운동'(사티야그라하)을 이끌었고, 인도독립 이후에는 전대미문이 '토지헌납운동'(부단운동)을 펼친 사회운동가이다.

1985년에 태어난 비노바 바베는 열 살 어린나이에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인류를 위해 헌신하기로 서약하였으며, 영적인 진리와 실천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찾던 중 간디를 만났고, 인도와 인도인들을 새롭게 진리로 이끄는 실천운동에 합류 하였다.

1951년 4월에 토지헌납운동(부단운동) 시작한 후 그는 6년 동안 8000km가 넘는 거리를 걸었고, 지주들을 만나 가난한 이웃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도록 설득하여 스코틀랜드 넓이에 달하는 넓은 땅을 헌납 받았다고 한다. 그는 간디와 더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개혁운동가였으며, 한 번도 정치에 몸담은 바 없지만 당대 인도에서 가장 정치적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예배, 명상, 교육은 모두 육체노동과 분리될 수 없다

학자로서 그는 평생 동안 힌두교 경전을 비롯한 인도 정신문명의 뿌리가 되는 고전을 연구하였고, 뛰어난 산스크리트어 학자였으며 탁월한 교사이기도 하였다. 그는 정규학교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생애 대부분 기간 동안 늘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살았다.

교사로서 비노바는 간디와 함께 대안학교운동인 나이탈림(신교육)운동을 일으켰다. 대안학교운동에 대한 비노바의 교육철학 고스란히 담고 있는 책 <삶으로 배우고 사랑으로 가르치라>는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삶과 동떨어지지 않은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강조하였으며 아쉬람 생활을 통해 똥 치우는 일에서부터 요리하는 일까지 노동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며 가르쳤다.

특히 실을 잣고 베를 짜는 일을 통해 마을을 가난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을 잣고 베를 짜는 일을 공예로 발전 시켰다. 간디는 비노바를 일컬어 "모르긴 몰라도 완벽한 베짜기에 대해서는 인도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또한 비노바는 평생을 수행자로서 살았다. 기도와 명상 그리고 경전을 읽고 암송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노동은 늘 예배와 명상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육체적인 노동을 통하여 하느님을 예배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육체적인 노동은 예배의 한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노동과 예배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육체적인 노동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첫째로는 물질적으로 그리고 둘째로는 정신적으로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본문 중에서)

그는 쓰레기를 줍는 일은 명상을 위한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만일 내가 빗자루 대신 묵주나 염주를 들었더라면 아무도 나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쓰레기를 줍는 일을 택한 것은 나에게는 묵주를 잡은 것과 같은 일이다."(본문 중에서)

자유로운 영혼이 선택한, 자유로운 죽음

도보 여행을 하는 비노바는 늘 이엉으로 엮은 집과 대나무로 세운 오두막에서 잠을 잤지만, 숙소에는 수상이나 대통령이 찾아올 정도로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렇지만 비노바는 일흔 다섯이 되었을 때 모든 사회적 정치적 행동에서 손을 떼기로 작정한다. 그는 도보 여행을 중단하고 기도와 명상을 하며 지낸다.

자신의 생애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를 꺼리고 또 자서전을 집필하는 것도 거부한다. 이 책은 비노바의 친밀한 협력자이자 제자였던 칼린디가 쓴 <비노바 바베> 회고록이다. 칼린디는 비노바가 죽은 후 그의 생애와 회고와 기억들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여든 일곱이 되어 비노바는 몸이 쇠약해지고 불편하다는 것과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는 의사 진료는 물론이고 약과 음식 그리고 물도 거부한 채 80일간 단식을 한 후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비노바 바베>를 쓴 칼린디는 친밀한 협력자이자 제자로서 비노바의 생애를 훌륭한 조각그림으로 맞추어 놓았다. 칼린디는 비노바가 조각 그림을 그린 화가라면, 자신은 그림을 맞추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비노바의 생애를 단편적으로 끼워맞추는 일에 실수가 있을 수도 있었다면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칼린디가 맞춘 조각 그림은 인류의 스승으로서 비노바 바베의 삶을 소개하는 들여다 볼 수 있는 훌륭한 창이 되고 있다. 칼린디가 맞춘 그림 조각 중하나를 집어 비노바 바베가 펼친 토지헌납운동을 조금 더 가까이 살펴보자. 그가 지주들에게 땅을 헌납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모든 인간이 공기와 물과 햇빛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듯이 땅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계시였다. 사랑으로 감동 받으면 사람들은 땅까지도 나눌 수 있다. 나는 만일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기만 하다면 어떤 문제라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다. 전혀 땅을 못 가진 사람이 존재하는 한, 한 개인이 필요 이상으로 땅을 차지하는 것은 잘못이다."(본문 중에서)

생애를 통하여 성직자로서 삶을 놓지 않았던 비노바는 지주들이 가난한 사람과 땅을 나누는 일을 신의 계시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기와 물과 햇빛 그리고 땅은 어떤 사람이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혀 땅을 못 가진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여섯 째 아들로 삼아라

8000km가 넘는 길을 걸으며 지주들을 만날 때마다 그는 유명한 '여섯 형제의 비유'를 들어 그들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만일 당신에게 아들 다섯이 있다면, 가난한 자들의 대표자를 여섯 째 아들로 생각하고 당신 땅의 육분의 일만 나에게 주시오. 땅이 없는 사람들과 같이 나눌 수 있도록 말이오."(본문 중에서)

비노바는 지주들에게 여섯 째 아들 몫으로 당당하게 지주들에게 땅을 요구하였다. 그는 경작할 수 없는 땅을 내놓은 지주들에게는 "먼저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그가 단순히 땅을 구걸하러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엿 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사람에 대하여, 지극히 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좋은 성품에 주목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좋은 성품, '어느 정도' 진실은 가지고 있는 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찾아내 일치를 이루어내야 하며, 일치를 깨뜨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를 엿 볼 수 있는 일화는 또 있다. 그가 토지헌납운동을 하러 전국을 다니는 동안 처음에는 땅을 헌납 받았지만, 나중에는 돈으로 헌납하겠다는 부자들을 만나게 된다. 1952년 10월, 처음으로 돈을 헌납 받으면서, 돈은 헌납하는 사람이 그냥 가지 있으면서 매년 육분의 일을 내라고 말 한다.

"돈은 헌납하는 사람이 그냥 가지고 계십시오. 하지만 그 사람은 매년 공공의 복리를 위해서 봉사하는 일에 재산의 육분의 일을 내놓아야 합니다. 나는 단순히 기록된 서약서만 받겠습니다. 서약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은 헌납자의 양심에 맡길 것 입니다."(본문 중에서)

이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 상식을 벗어나는 결정이다. 돈을 모아 기금을 만드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비노바는 만일 기금을 만들면 회계장부를 만들고 기록하고 보고하고 사업을 구상하는 일에 시간을 소모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돈을 헌납한 사람들에게 책임과 분별력을 모두 맡기는 새로운 방식으로 돈을 헌납 받은 것이다. 실제로 그는 생애를 통틀어 사회가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신뢰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나는 누차에 걸쳐서 사람의 생명에 호흡이 필요하듯이 사회의 생명을 위해서는 신뢰가 필요하다고 말해왔다. 신뢰는 사회의 호흡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약속한 사람들을 신뢰하였다."(본문 중에서)

사람에 대한 이런 신뢰는 비노바 자신이 어린 시절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노바는 스스로 "나의 정신을 형성하는데, 어머니가 했던 역할에 버금갈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만난 훌륭한 사람들과 위대한 인물들의 책도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실천적인 신앙'에 비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체격이 건장한 거지에게 적선을 베푸는 어머니에게 비노바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적선을 베푸는 것은 게으름만 키워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의 어머니는 사람을 가리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냐, 우리가 무엇인데 누가 받을 만한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판단한단 말이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문간에 찾아오는 사람이면 누구든 다 하느님처럼 존중해 주고 우리 힘이 닿는 대로 베푸는 거란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게니."(본문 중에서)

<비노바 바베> 회고록에는 어린 시절 엄격하지만 자애로운 그리고 실천적 신앙를 가졌던 어머니에게 받은 영향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베푸는 것은 하느님과 같은 일이고, 쌓아두는 것은 지옥"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어린 아들에게 날마다 나무에 물을 주지 않고는 밥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베풀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훗날 비노바는 모든 사람은 나누고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부자라면 당연히 베풀어야 하지만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상에 못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무엇이라도 베풀만한 것이 있다면 나누고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땅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재산을,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이나 육체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서 사랑과 애정은 모은 인간의 가슴 속에 가득히 배어  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 베풀 것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베풀고 또 베풀어야 한다."(본문 중에서)

결국 그는 지주들 마음을 움직여 땅을 베풀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돈과 연장들과 지식을 베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칼린디는 이것을 '상상력의 경제학'이라고 말한다. 그는 가진자들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르게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 '비폭력'으로 마음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80년대와 90년대, 치열한 변혁을 꿈꾸던 한국 사회운동이 새로운 세기를 맞으며 다양하게 분화 발전하고 있다. 이런 분화과정에서 우리나라에도 뚜렷하게 '명상과 혁명'을 실천하는 한 흐름이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다. 생명운동으로 드러나고 있는 이 흐름에는 과거 변혁운동에 치열하게 참여하였던 활동가들 상당수가 참여하고 있지만, 과거 변혁운동과는 다른 철학과 관점으로 나아가고 있다.

연기적 세계관을 토대로 기도와 명상을 중심으로 하는 자기성찰과 사회변화 못지않은 자기변화를 중심에 두는 실천운동이 다양하고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생활협동조합운동이나 정토회를 중심으로 펼치는 빈 그릇 운동과 같은 실천운동으로 나타나나기도 하고, 경부운하 예정지를 걸으며 '생명의 강'을 만나는 활동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혁명과 명상! 얼핏 어울리지 않을 두 단어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 그는 바로 비노바 바베이다. 간디와 더불어 현대 인도를 대표하는 정신적 지도자이자 사회개혁가로 꼽히는 그는, 간디의 제자이자 동료로 '비폭력저항운동'(사티야그라하)을 이끌었고, 인도독립 이후에는 전대미문이 '토지헌납운동'(부단운동)을 펼친 사회운동가이다.

1985년에 태어난 비노바 바베는 열 살 어린나이에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인류를 위해 헌신하기로 서약하였으며, 영적인 진리와 실천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찾던 중 간디를 만났고, 인도와 인도인들을 새롭게 진리로 이끄는 실천운동에 합류 하였다.

1951년 4월에 토지헌납운동(부단운동) 시작한 후 그는 6년 동안 8000km가 넘는 거리를 걸었고, 지주들을 만나 가난한 이웃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도록 설득하여 스코틀랜드 넓이에 달하는 넓은 땅을 헌납 받았다고 한다. 그는 간디와 더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개혁운동가였으며, 한 번도 정치에 몸담은 바 없지만 당대 인도에서 가장 정치적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예배, 명상, 교육은 모두 육체노동과 분리될 수 없다

학자로서 그는 평생 동안 힌두교 경전을 비롯한 인도 정신문명의 뿌리가 되는 고전을 연구하였고, 뛰어난 산스크리트어 학자였으며 탁월한 교사이기도 하였다. 그는 정규학교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생애 대부분 기간 동안 늘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살았다.

교사로서 비노바는 간디와 함께 대안학교운동인 나이탈림(신교육)운동을 일으켰다. 대안학교운동에 대한 비노바의 교육철학 고스란히 담고 있는 책 <삶으로 배우고 사랑으로 가르치라>는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삶과 동떨어지지 않은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강조하였으며 아쉬람 생활을 통해 똥 치우는 일에서부터 요리하는 일까지 노동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며 가르쳤다.

특히 실을 잣고 베를 짜는 일을 통해 마을을 가난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고, 실을 잣고 베를 짜는 일을 공예로 발전 시켰다. 간디는 비노바를 일컬어 "모르긴 몰라도 완벽한 베짜기에 대해서는 인도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또한 비노바는 평생을 수행자로서 살았다. 기도와 명상 그리고 경전을 읽고 암송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노동은 늘 예배와 명상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육체적인 노동을 통하여 하느님을 예배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육체적인 노동은 예배의 한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노동과 예배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육체적인 노동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첫째로는 물질적으로 그리고 둘째로는 정신적으로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본문 중에서)

그는 쓰레기를 줍는 일은 명상을 위한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만일 내가 빗자루 대신 묵주나 염주를 들었더라면 아무도 나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쓰레기를 줍는 일을 택한 것은 나에게는 묵주를 잡은 것과 같은 일이다."(본문 중에서)

자유로운 영혼이 선택한, 자유로운 죽음

도보 여행을 하는 비노바는 늘 이엉으로 엮은 집과 대나무로 세운 오두막에서 잠을 잤지만, 숙소에는 수상이나 대통령이 찾아올 정도로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렇지만 비노바는 일흔 다섯이 되었을 때 모든 사회적 정치적 행동에서 손을 떼기로 작정한다. 그는 도보 여행을 중단하고 기도와 명상을 하며 지낸다.

자신의 생애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를 꺼리고 또 자서전을 집필하는 것도 거부한다. 이 책은 비노바의 친밀한 협력자이자 제자였던 칼린디가 쓴 <비노바 바베> 회고록이다. 칼린디는 비노바가 죽은 후 그의 생애와 회고와 기억들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여든 일곱이 되어 비노바는 몸이 쇠약해지고 불편하다는 것과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는 의사 진료는 물론이고 약과 음식 그리고 물도 거부한 채 80일간 단식을 한 후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비노바 바베>를 쓴 칼린디는 친밀한 협력자이자 제자로서 비노바의 생애를 훌륭한 조각그림으로 맞추어 놓았다. 칼린디는 비노바가 조각 그림을 그린 화가라면, 자신은 그림을 맞추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비노바의 생애를 단편적으로 끼워맞추는 일에 실수가 있을 수도 있었다면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칼린디가 맞춘 조각 그림은 인류의 스승으로서 비노바 바베의 삶을 소개하는 들여다 볼 수 있는 훌륭한 창이 되고 있다. 칼린디가 맞춘 그림 조각 중하나를 집어 비노바 바베가 펼친 토지헌납운동을 조금 더 가까이 살펴보자. 그가 지주들에게 땅을 헌납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모든 인간이 공기와 물과 햇빛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듯이 땅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계시였다. 사랑으로 감동 받으면 사람들은 땅까지도 나눌 수 있다. 나는 만일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기만 하다면 어떤 문제라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다. 전혀 땅을 못 가진 사람이 존재하는 한, 한 개인이 필요 이상으로 땅을 차지하는 것은 잘못이다."(본문 중에서)

생애를 통하여 성직자로서 삶을 놓지 않았던 비노바는 지주들이 가난한 사람과 땅을 나누는 일을 신의 계시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기와 물과 햇빛 그리고 땅은 어떤 사람이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혀 땅을 못 가진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여섯 째 아들로 삼아라

8000km가 넘는 길을 걸으며 지주들을 만날 때마다 그는 유명한 '여섯 형제의 비유'를 들어 그들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만일 당신에게 아들 다섯이 있다면, 가난한 자들의 대표자를 여섯 째 아들로 생각하고 당신 땅의 육분의 일만 나에게 주시오. 땅이 없는 사람들과 같이 나눌 수 있도록 말이오."(본문 중에서)

비노바는 지주들에게 여섯 째 아들 몫으로 당당하게 지주들에게 땅을 요구하였다. 그는 경작할 수 없는 땅을 내놓은 지주들에게는 "먼저 경작할 수 있는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그가 단순히 땅을 구걸하러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엿 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사람에 대하여, 지극히 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좋은 성품에 주목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좋은 성품, '어느 정도' 진실은 가지고 있는 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찾아내 일치를 이루어내야 하며, 일치를 깨뜨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를 엿 볼 수 있는 일화는 또 있다. 그가 토지헌납운동을 하러 전국을 다니는 동안 처음에는 땅을 헌납 받았지만, 나중에는 돈으로 헌납하겠다는 부자들을 만나게 된다. 1952년 10월, 처음으로 돈을 헌납 받으면서, 돈은 헌납하는 사람이 그냥 가지 있으면서 매년 육분의 일을 내라고 말 한다.

"돈은 헌납하는 사람이 그냥 가지고 계십시오. 하지만 그 사람은 매년 공공의 복리를 위해서 봉사하는 일에 재산의 육분의 일을 내놓아야 합니다. 나는 단순히 기록된 서약서만 받겠습니다. 서약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은 헌납자의 양심에 맡길 것 입니다."(본문 중에서)

이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 상식을 벗어나는 결정이다. 돈을 모아 기금을 만드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비노바는 만일 기금을 만들면 회계장부를 만들고 기록하고 보고하고 사업을 구상하는 일에 시간을 소모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돈을 헌납한 사람들에게 책임과 분별력을 모두 맡기는 새로운 방식으로 돈을 헌납 받은 것이다. 실제로 그는 생애를 통틀어 사회가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신뢰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나는 누차에 걸쳐서 사람의 생명에 호흡이 필요하듯이 사회의 생명을 위해서는 신뢰가 필요하다고 말해왔다. 신뢰는 사회의 호흡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약속한 사람들을 신뢰하였다."(본문 중에서)

사람에 대한 이런 신뢰는 비노바 자신이 어린 시절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노바는 스스로 "나의 정신을 형성하는데, 어머니가 했던 역할에 버금갈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만난 훌륭한 사람들과 위대한 인물들의 책도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실천적인 신앙'에 비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체격이 건장한 거지에게 적선을 베푸는 어머니에게 비노바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적선을 베푸는 것은 게으름만 키워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의 어머니는 사람을 가리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냐, 우리가 무엇인데 누가 받을 만한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판단한단 말이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문간에 찾아오는 사람이면 누구든 다 하느님처럼 존중해 주고 우리 힘이 닿는 대로 베푸는 거란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게니."(본문 중에서)

<비노바 바베> 회고록에는 어린 시절 엄격하지만 자애로운 그리고 실천적 신앙를 가졌던 어머니에게 받은 영향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베푸는 것은 하느님과 같은 일이고, 쌓아두는 것은 지옥"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어린 아들에게 날마다 나무에 물을 주지 않고는 밥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베풀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훗날 비노바는 모든 사람은 나누고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부자라면 당연히 베풀어야 하지만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상에 못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무엇이라도 베풀만한 것이 있다면 나누고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땅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재산을,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이나 육체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서 사랑과 애정은 모은 인간의 가슴 속에 가득히 배어  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 베풀 것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베풀고 또 베풀어야 한다."(본문 중에서)

결국 그는 지주들 마음을 움직여 땅을 베풀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돈과 연장들과 지식을 베풀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칼린디는 이것을 '상상력의 경제학'이라고 말한다. 그는 가진자들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르게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 '비폭력'으로 마음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수행'하기엔 감옥이 아쉬람 보다 더 쉽다

글을 마치며, 평생을 성직자로서 영성수련가로서 살아 온 삶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감옥생활에 대한 일화를 소개한다. 그는 자신이 진정한 아쉬람 생활을 경험한 것은 감옥 안에서였다고 회고한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옷 두세 벌, 물잔 한 개, 그리고 밥그릇 한 개가 전부였다. '무소유'의 서약을 실천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목욕하고, 밥 먹고, 일하는 것은 규칙에 따라서 했고,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는 것은 종소리에 따라 했다. 이 얼마나 완벽하게 규칙적인 생활인가!"

그는 평생을 하느님에게 서약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다른 사람을 신뢰하는 만큼 자신이 하느님에게 한 서약을 모두 지키면서 살았다. 그는 서약을 지키기에, 그리고 생각하고 반성할 시간을 가지기에 아쉬람 보다 감옥이 훨씬 좋은 곳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감옥은 감옥이 아니었고, 그는 갇혀 있으되 갇혀있지 않았던 것이다.

비노바는 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걷고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만나면서도 참 많은 책을 썼다. 탁월한 신학자로서의 삶을 소개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부족함 때문이고, 수행자로서 비노바의 삶을 더 소개하지 못하는 것은 큰 아쉬움이다. 이런 부족함은 독자들이 <비노바 바베>를 직접 읽는 수고를 통해 얻어야 할 기쁨으로 남겨둔다.

'수행'하기엔 감옥이 아쉬람 보다 더 쉽다

글을 마치며, 평생을 성직자로서 영성수련가로서 살아 온 삶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감옥생활에 대한 일화를 소개한다. 그는 자신이 진정한 아쉬람 생활을 경험한 것은 감옥 안에서였다고 회고한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옷 두세 벌, 물잔 한 개, 그리고 밥그릇 한 개가 전부였다. '무소유'의 서약을 실천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목욕하고, 밥 먹고, 일하는 것은 규칙에 따라서 했고,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는 것은 종소리에 따라 했다. 이 얼마나 완벽하게 규칙적인 생활인가!"

그는 평생을 하느님에게 서약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다른 사람을 신뢰하는 만큼 자신이 하느님에게 한 서약을 모두 지키면서 살았다. 그는 서약을 지키기에, 그리고 생각하고 반성할 시간을 가지기에 아쉬람 보다 감옥이 훨씬 좋은 곳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감옥은 감옥이 아니었고, 그는 갇혀 있으되 갇혀있지 않았던 것이다.

비노바는 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걷고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만나면서도 참 많은 책을 썼다. 탁월한 신학자로서의 삶을 소개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부족함 때문이고, 수행자로서 비노바의 삶을 더 소개하지 못하는 것은 큰 아쉬움이다. 이런 부족함은 독자들이 <비노바 바베>를 직접 읽는 수고를 통해 얻어야 할 기쁨으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