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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생태, 환경

시간의 숲에서 깨닫는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

by 이윤기 2015.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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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야마오 산세이가 쓴 <더 바랄게 없는 삶>


7200년 된 삼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일본 가고시마 남단에 있는 야쿠시마라는 섬에 7200년 된 삼나무 죠몬스기가 살아 있는 신령스러운 숲이 있다고 합니다. 흔히 우리 역사를 반만 년 역사라고 하는데, 우리 역사보다 더 오래 살고 있는 삼나무 죠몬스기가 살고 있는 숲이 있는 섬 야쿠시마. 


죠몬스키를 만나러 가는 야쿠시마 여행을 앞두고 야쿠시마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다 24년 간 이 섬에 살다 2001년에 삶을 갈무리 한 야마오 산세이라는 시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마오 산세이를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쓴 책을 찾아봤습니다. 국내에 번역된 책이 네 권이나 있었는데 두 권은 절판이 됐길래 판매 중인 두 권을 구입했습니다. 그 중 한 권이 바로 <더 바랄 게 없는 삶>입니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도쿄에 살았던 그는 야쿠시마로 이사 한 후 농사를 지으며 시와 글을 쓰고 살았는데, 그는 그런 야쿠시마에서의 삶을 '더 바랄 게 없는 삶'이라고 했더군요. 제목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야쿠시마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최성현은 야마오 산세이가 살았던 마을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더군요.


"일본 열도 남쪽 끝에 있는 작은 섬 야쿠시마. 그 섬의 바닷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산 속에 있는 작은 마을. 마을 사람들이 식수로 쓸 만큼 시냇물이 맑은 마을. 논밭을 빼고는 정글 같은 숲에 둘러 싸여 있는 마을. 한사리 때면 바다에 나가 조개를 줍고 굴을 따는 마을. 성가실 만큼 자주 사슴과 원숭이가 출몰하는 마을.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낚시를 놓아 뱀장어를 잡는 마을. 가구 수가 적어 사람이 귀한 마을." - 본문 중에서


<더 바랄 게 없는 삶>을 쓴 야마오 산세이는 서른 일곱 살에 도쿄에서 야쿠시마 섬의 이 마을로 이사해 살다가 예순 둘의 나이로 그곳에서 삶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시인이 죽음을 앞두고 쓴 책이며, 책 후반부에는 그가 암에 걸려 삶에서 죽음으로 옮겨가는 이야기도 나와 있습니다. 


사람보다 사슴과 원숭이가 많은 섬


책은 야마오 산세이의 삶을 잘 드러내는 시 한 편으로 시작됩니다. 제목은 '왜'인데 '아버지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시입니다. 그 일부만 읽어봐도 그의 사람됨을 짐작하게 하는 시인데, 제법 길기는 하지만 그의 삶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전문을 옮겨봅니다. 


- 아버지에게


왜 너는 도쿄 대학에 갈 생각을 안느냐고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물었다

저는 와세대 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그때 나는 

키에르케고를 전집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미 시험 공부할 사이가 없었다.


왜 너는 대학을 그만 두냐고

대학 3학년 때 아버지는 물었다

나는 방자하게도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생각이 없었고

졸업장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비겁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고

중학교만 졸업한 

아버지의 길에도 거스르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왜 너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냐고

올 삼월에 암으로 죽은 친구가 물었다

그 친구는 깊은 연민과 힘을 가지고

평생을 사랑 하나로 일관한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디나 다 중심이고

또 거기에는 그 나름의 질서가 있으니

정부 따위는 필요없는 게 아니냐고 대답하지 않고

너 또한 아나키스트일 게 분명하다고 대답했다


왜 너는 

도쿄를 버리고 이런 섬에 왔느냐고

섬 사람들이 수도 없이 물었다

여기에는 바다도 있고 산도 있고

무엇보다도 수령이 7200년이나 된다는 죠몬 삼나무가

이 섬의 산 속에서 절로 나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지만

그것은 정말 그랬다

죠몬 삼나무의 영혼이

이 약하고 가난하고 자아와 욕망만이 비대해진 나를

이 섬에 와서 다시 시작해 보라고 불러 주었던 것이다


왜 그대는 

지금도 외롭고 슬프냐고

산이 묻는다

그 까닭을 저는 모릅니다

당신이 

저보다도 훨씬 외롭고 슬프고

훨씬 풍요롭게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 싶지만

그 까닭을 저는 모릅니다.


<더 바랄 게 없는 삶>은 야마오 산세이가 자신의 삶을 회고 하면서 나무와 숲과 자연에 관해 쓴 수필집입니다. 가쥬마루라는 나무 이야기, 흙, 풀, 암대극, 벚꽃 같은 자연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입니다. 산문 사이사이에는 그가 쓴 시들이 담겨 있어 더 깊은 울림을 전해줍니다. 


앞서 소개한 시를 읽으면서 짐작했겠지만, 그는 아나키스트이자 자연주의자입니다. 그는 나무와 풀, 바위와 돌을 비롯한 모든 것들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때때로 섬에 있는 돌을 육지의 친구들에게 선물했다고 하는데 그냥 평범한 돌이 아니더군요. 


"내가 여행 길에 가지고 나가는 돌은 그것으로 적어도 지상 천오백 년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 돌에 친화력을 느끼는 사람에게 선물을 하고 있다." - 본문 중에서


야쿠시마의 돌에만 이런 시간의 흔적이 담겨 있을까요? 지질의 역사를 조금만 알고나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어디서나 이런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돌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은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7200년 된 삼나무가 살고 있는 숲


그는 섬에서 자생하는 꽃과 나무에 관해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계절에 어느 곳에 가면 어떤 꽃이 피는지 알고 있더군요. 꽃의 모양과 향기는 물론이고 어떻게 군락을 이루고 자생하고 있는지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제가 가려고 하는 7200년 된 삼나무 죠몬스기가 있는 숲 다음으로 흥미로웠던 장소는 '야하즈타케'라 부르는 동굴 신사였습니다. 높이 6~7미터 폭 6~7미터 깊이 30미터 가량의 동굴이 그대로 신사라고 하더군요. 건물은 없고 동굴의 끝에 신을 모신 작은 시설이 있을 뿐인데, 시인은 해마다 설날이면 가족과 함께 이곳에 예배를 다녔다더군요. 


"동굴은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 주거지였을 것이 틀림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안에 들어가면 몇 백만 년에 걸쳐 내게 이어져 온 유전자가 안도를 하는 듯 이유를  알수 없는 소박한 신성감에 젖어든다는 점이다." - 본문 중에서


"그 동굴의 암석은 바다 밑에서 수억 년의 시간과 지상으로 융기하기 시작한 이후로도 적어도 천사백만 년이란 시간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인류가 이 지상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야마오 산세이는 이 동굴을 '6500만 년'의 시간을 간직한 동굴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삶의 끝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서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을 기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눈으로 자연을 보는 시인에게는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바위나 돌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모두 신령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가장 재미있었던 글은 '뱀장어와 아들'이라는 수필이었습니다. 저수지에서 거대한 뱀장어를 잡는 큰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섬에 살면서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깨뱀장어 낚시하는 법을 배워가는 추억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잡는 재미도 재미지만 섬을 떠나 자립해 가는 자식들도 반드시 함께 데리고 가서 보는 사이에 절로 배우도록 해 왔다. 그 덕분에 이제까지 자식 넷을 모두 이 섬에서 키워 내보냈는데, 모두 거거따기와 뱀장어 잡는 기술만은 익히고 갔다." - 본문 중에서


자식들에게 아버지와 함께 한 작은 수렵의 기억이 그들의 인생에 어떤 형태로든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된 막내가 뱀장어 잡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하였을 어린 시절 '수렵'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자연에서만 대물림 되는 수렵의 추억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한 수렵 체험은 부자가 함께 한 추억이면서 동시에 수렵을 함께 하는 '동지' 사이에서만 생길 수 있는 특별한 동지애를 나누는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들이 아버지와 아들에게 대물림되는 것은 자연을 가까이 하는 삶에서만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한편 세상의 진보와 생명의 순환에 관한 시인의 이야기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들은 개인으로 태어나 성장하고 마침내 죽지만 그 생명은 조상에서 자손으로 이어져 가는 양상에서 한 발도 진보하지 않고 다만 순환할 뿐이다. 휴대폰이 없었던 천 년 전의 인간도 현재의 우리와 다를 바 없이 태어났고 성장했고 마침내 죽었다." - 본문 중에서


천 년 뒤의 인간이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문명의 이기를 갖는다 하더라도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다는 순환의 법칙에서는 진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사람에게는 그리고 자연에게는 진보라는 숙명과 동시에 순환내지 회귀라고 하는 또 하나의 숙명이 내재돼 있다는 것입니다. 


숲에 들어가면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은 사람이라는 순환보다 더 큰 자연의 순환에 둘러싸여 있을 때 마음의 평화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7200년 간 살고 있는 죠몬스키가 있는 야쿠시마의 숲에서 생명의 근원에서 느낄 수 있는 평화를 경험하고 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야마오 산세이가 그랬던 것처럼. 


더 바랄게 없는 삶 - 10점
야마오 산세이 지음, 최성현 옮김/달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