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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이승만이 자랑스러운 대통령이었다면?

by 이윤기 2011.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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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의 간부와 회원들이 억지에 가까운 사과을 하겠다고 하여 4.19 유공자와 가족들에게 거절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독재자, 분단 대통령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 한겨레 칼럼을 보니 젊은날 그가 한성감옥에서 5년 넘게 중죄수로 복역하였다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29살 때 조선의 운명에 대한 애끓는 호소를 담은 <독립정신>이라는 아주 인상 깊은 글을 썼다고도 합니다.

젊은 이승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한겨레 칼럼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흐른 만큼 역사 속 지도자를 좀 더 개관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에서 보도록 노력해보자"는 것이 핵심입니다.

칼럼을 읽고 이승만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젊은 이승만의 단면은 제가 일하고 있는 YMCA에도 몸 담았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지도자였던 모양입니다.


감옥살이를 마친 이승만은 미국 유학에 나섰고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학생부 간사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다음은 <서울YMCA 운동사>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이승만의 모습입니다 .

"이승만은 1910년 그레그(G. A. Gregg)의 교섭을 받을 때 모트(J. R. Mott)의 간곡한 청원에 끌려서 프린스톤 철학박사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학생부 간사로 오게 된 것이다. 1910년 10월 말의 일이었다. 그가 주일 낮마다 성경반을 인도할 때에는 평균 189명의 학생들이 참집하였다 한다. 그는 1911년에 청년학관의 교장일을 맡아보았고, 1911년 5월 16일에서 6월 21일까지는 브록크만과 전국을 순회하여 큰 성과를 거두며 YMCA 학생운동의 모형을 구축해 나갔던 것이다. 37일 어간에 13개 선교구역을 방문하고 33회의 집회에서 7535명의 학생들을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1911년 6월 개성에서 회집되었던 학생 YMCA 하령회에서 일제가 105인 사건이 음모를 진행하였다하여 윤치호 등을 체포한 사실은 이미 약술하였지만, 여기에 이승만이 가서 주역을 담당하였던 관계로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1912년 3월 26일 서울을 떠나 제 2차 망명길에 올랐던 것이다."(서울YMCA 운동사) 

프린스톤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YMCA 지도자들의 청을 받고 1910년 말에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학생부 간사로 부임하였다는 것입니다. 불과 1년 6개월의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그가 인도하는 주일 성경반에 젊은이들이 모였으며, 한 달 어간의 전국 순회 강연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전국순회 강연의 성과 때문이었는지, 일제는 학생YMCA 하령회와 당시로는 이른바 공안(?)사건에 해당되었던 105인 사건을 연루시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합니다. 학생YMCA 하령회의 책임자였던 이승만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1912년 3월 26일 2차 망명길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YMCA와 이승만과의 인연은 부끄러운 일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YMCA 역사나 학생YMCA 역사를 이야기 할 때 대통령을 지낸 YMCA 지도자 이승만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대신 독립협회가 해산당하면서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있던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이 대거 YMCA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역사는 빼놓지 않습니다. 3.1운동에 YMCA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사실도 빠뜨리지 않지요.

만약, 훗날 이승만이 존경 받을 만한 지도자가 되었다면, 이 정도의 짧은 인연만으로도 YMCA 후배들이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회원들에게, 후배 실무자들에게 YMCA 역사를 이야기 할 때 이승만에 관한 이야기를 빠뜨릴리가 없겠지요.

그러나 이른 기대와 달리 해방 이후 정치인으로 고국에 돌아온 이승만은 친일파와 손잡고 '분단' 대통령이 되었으며, 헌법을 유린하여 종신 대통령을 꿈꾸고, 부정선거와 불법 정치공작을 저지른 추악한 지도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가 짧은 YMCA 학생부 간사 시절을 보내는 동안 눈에 띄는 활약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YMCA 후배들이 보기에 부끄러운 지도자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젊은 시절 젊은 계몽운동가 이승만의 자랑스런 모습은 훗날 추악한 정치지도자 이승만의 모습에 묻혀버린 것입니다. 젊은 날의 공과 늙은 이승만의 과를 균형있게 보는 노력이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이승만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가 뒵 집히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젊은 시절 이승만이 계몽운동가로서 세운 공로에 비하면, 늙은 정치인 이승만이 저지른 과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