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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시사, 사회

MB에게 들려주고픈, 개의 한 마디

by 이윤기 2008.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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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아지즈 네신의 <개가 남긴 한 마디>

가끔 해외토픽을 보면, 사람이 개나 고양이에게 상당한 유산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사람이 개에게가 아니고 개가 사람에게 유산을 남겼다면? 아마 개짖는 소리쯤 여기고 대부분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개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에게 100억의 유산을 남겼다는 말을 전해듣는다면? 그리고 누군가 "개가 유산으로 남긴 것"이라며 100억을 전해주면 당신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거절할 수 있겠나?


통쾌하지만 씁쓸한 '풍자문학'

2008년 대한민국 풍자문학의 최고 작품은 다음 아고라 폐인들이 아고라 게시판에 올라 온 글을 엮어 낸 <대한민국 상식사전 아고라>다. 물론 순전히 내가 생각하는 기준이다.

비꼬고 비틀고 다르게 보는 풍자는, 첫맛은 통쾌하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깊은 여운이 남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때로 풍자는 풍자하는 자들이 스스로 힘없음을 시인하는 것 같아 서글프기도 하다.

<아고라>에 쏟아부은 2mb 풍자 역시 선거를 통해 현실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하여, 달리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쏟아 붓는 언어 폭탄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반문해 본다. 아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풍자는 민중의 힘을 모으는 도구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50년 전에는 힘있는 자, 가진 자들을 어떻게 풍자하였을까? 아지즈 네신이 쓴 <개가 남긴 한 마디>는은 1958년 터키에서 처음 출간된 책이다. 올해가 2008년이니 딱 50년 전에 출간된 책이다.

<당나귀는 당나귀답게>를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진 터키 풍자문학의 거장 아지즈 네신의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생사불명 야사르>를 통해서다. 이 소설에서 네신은 주민등록이 없는 '야사르'가 국가가 필요할 때는 살아있는 사람으로, 자신이 필요할 때는 죽은 사람 취급을 당하는 어이없는 현실을 풍자했다.

200개의 필명, 100권의 책, 그리고 250번의 재판

아지즈 네신은 200개가 넘는 필명으로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100권이 넘는 작품을 발표하여 터키의 국민작가로 추앙을 받는다고 한다. 터키 문학사에 있어 신화적인 존재인 그의 작품은 34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국내외에서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였다고 한다.

아지즈 네신이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이유는 그가 작가 이전에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열렬히 살았기 때문이다. 터키의 폭력적 정권, 특히 언론인들에 대한 정부의 검열과 탄압을 비판한 작품들을 발표해온 그가 내란선동이나 좌익활동이란 죄목으로 250번의 재판을 받으며 유배와 수감생활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계엄령 하에서 권력의 억압으로 신문·잡지마저 외면할 때는 스스로 신문을 발행해 칼럼을 쓰고, 출판사를 만들어 작품 발표를 하면서 비판의 칼날을 멈추지 않은 실천적 지식인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국내에 번역된 아지즈 네신의 작품을 모두 번역한 작가 이난아는 <개가 남긴 한 마디>를 "네신 문학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의 풍자 정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소개하였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 풍자의 칼날이 한결 더 서슬 퍼렇고, 읽으면 읽을수록 풍자의 묘미가 더욱 맛깔스럽게 느껴지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생생한 풍자 정신뿐만 아니라 200개가 넘는 필명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도 아지즈 네신은 요즘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는 네티즌들과도 닮은 구석이 많다. 번역 작가 이난아는 풍자를 일컬어 "인간이 지녀야 하는 살갑고도 무거운 웃음이며, 부드럽고 인간적인 비판"이라고 하였다.

아고라에 쏟아진 2mb에 대한 풍자는 예리하고 날카롭고 매서운 비판이 주를 이루는데, 네신의 작품은 부드럽고 인간적인 비판이었다는 것이다. 아마 부드럽고 인간적인 비판이었기 때문에 풍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그 풍자가 자기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하였는지도 모른다.

개가 남긴 유산은 무엇?

<개가 남긴 한 마디>에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저지르는 어처구니없고 살벌한 정책들과 실수, 민중의 고통과 분노가 담긴 이야기 열다섯 편으로 엮여있다. 이번 책의 제목으로 뽑힌 <개가 남긴 한 마디>는 주인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개 '카라바쉬' 이야기를 통해, 부패한 재판관에 대해 풍자한다.

동정심 많은 개 주인 카슴은 너무나 개를 사랑한 나머지 카라바쉬가 죽자 사람처럼 장례를 치러주려 하다가 재판관 앞에 끌려가 경을 치게 된다. 그리고 종교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죄를 추궁당한다.

개 주인 카슴은 궁지에 몰리자, 자신이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선행이 모두 카라바쉬의 행위였다고 재판관에게 이야기한다. 카라바쉬가 가난한 사람을 돕고, 기부금을 내고 라마단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공공 우물을 보수하고 학교를 후원하였다는 것.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판관은 카슴을 윽박지른다.

"당신 미쳤어? 개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한단 말이야?"

"물론, 재판관님께서는 그 개가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았는지 가늠하시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그 개가 죽기 전에 저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 미친 놈아! 너는 다른 사람들이 너처럼 머리가 돌았다고 생각하느냐? 어떻게 개가 유언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재판관님, 제발 믿어 주십시오. 정말로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금화 오백 냥을 재판관님께 드리라고 부탁했습니다."

 (카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판관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신의 이름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겠네. 카슴 선생 ! 좀 더 말해보시오. 고인이 무슨 말을 더 남겼나요? 제발 하나하나 읊어 주시오. 고인의 유언을 모조리 실행합시다. 그건 종교적으로 보나 뭘로 보나 선행 중의 선행이지 않습니까?"

 이 책 중에서 '개가 남긴 한 마디' 편을 읽으면서, 종합부동산세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떠오른 것은 무슨 까닭일까? 종부세 위헌 판결을 심판한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 중에 8명이 종부세 부과대상이었다는 신문기사가 생각났다.

이거 정말 50년 전에 쓴 거 맞아?

'늑대가 된 아기양' 편은 부당한 대우를 받던 어린 양이 참다참다 결국 늑대와 같은 분노를 표출한다는 이야기로 억압당하는 자의 고통과 분노를 풍자한다. '스타를 닮고 싶은 원숭이'는 평생 동안 남을 흉내내다 결국 누구도 될 수 없는, 정체성 잃은 원숭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 세상에 퍼진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도무지 50년 전에 씌어진 책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그의 풍자는 작금의 우리 현실에도 변함없이 투영된다. 국민들의 비판에 귀를 닫은 지도자, 자신이 바라는 정보만 전해주면 되는 총리 임명,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 법률, 자신을 칭찬하는 소리만 골라 듣는 지도자, 국민 모두가 서로 잘못이 없다며 책임을 떠넘기는 이야기는 모두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과 멀지 않아 보인다.

터키 작가 아지즈 네신이 반세기 전에 쓴 <개가 남긴 한 마디>는 5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우리 사회를 비춰보는 거울로 부족함이 없다. 동화처럼 씌어진 책이라 청소년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주기에 손색이 없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