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봄과 가을, 블로거 무터킨더가 쓴 독일의 학교와 교육이야기를 연달아 읽었습니다. "예습하고 와서 수업을 방해하면 공무집행방해"라는 구절이 가장 기억에 남았던 <꼴찌도 행복한 교실>은 제가 읽은 첫 번째 책이었습니다.
그해 겨울이 다가올 무렵, 두 번째 책이 나왔더군요. 자전거, 수영은 물론이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독일 교육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독일은 99%의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 후부터 알파벳을 읽기 시작하고, 한 학기가 다 가도록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단어를 익히다가 읽기 쓰기를 익히며, 수학은 1부터 20까지 숫자를 더 하고 빼면서 1년을 보낸다고 하더군요.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선행학습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입학 후에도 느긋하게 기초를 다지는 독일 교육을 보면서 여간 부러워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책 <슈퍼차일드>는 독일 교육에 대한 정 반대 이야기가 넘쳐나는 책입니다.
PASA 시험과 신자유주의 교육 광풍이 독일 교육을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입니다. 독일이라는 국명을 모두 빼고 읽으면 마치 입시와 경쟁으로 점철된 한국의 교육 상황을 보는 있는 듯한 착각이 생길 정도입니다.
너에게 사랑을 투자하니 나중에 성공으로 갚아라
'슈퍼차일드'는 부모의 과대한 기대를 짊어진 독일 아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독일에서도 저출산의 영향으로 자녀들에게 쏟는 부모의 관심이 과거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고 합니다.
"관계의 집중도가 높아졌을 뿐 아니라 경제적 비용과 아이를 돌보는 시간 또한 늘어났다. 한 마디로 자녀 수는 줄었고 자녀에게 쏟는 부모의 관심은 커졌다. 부모들은 아이와 놀아주며 즐겁게 해주고 온갖 응석을 다 받아준다." (본문 중에서)
부모들이 아이를 왕처럼 떠받들 뿐만 아니라 부모가 스스로 하인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부모의 관심이 커졌는데, 오히려 아이들이 느끼는 행복은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관심이 아이에 대한 과도한 기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영재면 얼마나 좋을까? 운동을 아주 잘 하거나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도 괜찮고, 아무튼 천부적인 재능이 있음 좋으련만…." (본문 중에서)
오늘날 많은 독일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영재이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아이를 위하는 마음보다는 부모의 야망과 허영이 더 크다고 합니다. <슈퍼차일드>는 부모의 애정과 관심 뒤에 다음과 같은 숨겨진 메시지가 있다고 꼬집습니다.
"똑똑하고 빛나는 사람으로 커서 나중에 나를 빛나게 하라고. 지금 너를 정성으로 돌보는 거야. 너에게 사랑을 투자하니 나중에 성공으로 갚아라." (본문 중에서)
독일에서 아이를 영재로 키우는 각종 프로그램이 난무하고 있으며, 과거 어느 때보다 조기교육에 열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아이큐(IQ) 정규분포에서 영재라 할 만한 130 이상은 여전히 약 2%뿐입니다.
슈퍼차일드? 완벽한 아이들에 대한 기대
저자는 천부적인 재능에 대한 기대뿐만 아니라 또래 아이들과 비교하는 것도 위험 수준에 도달했다고 진단합니다. <유치원과 학교에서 요구하는 능력> 같은 보고서를 보면 아이들은 숨 막힐 정도로 완벽한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겨우 만 4세인 우리 아이들은 자신감이 있어야 하고, 협동심, 갈등해결 능력, 다문화 수용, 책임감, 감정이입, 사교성, 인내심, 자립심, 패배인정 능력 등을 갖춰야 한다. 확언컨대 어른도 이런 능력을 모두 갖추기는 쉽지 않다." (본문 중에서)
만 4세 아이들이 이런 능력을 모두 갖춰야 정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교사와 상담사들, 그리고 이른바 전문가들은 아이들을 '슈퍼차일드'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적게 낳았으니 과거보다 더 풍족하게, 더 똑똑하게 키우라는 메시지가 난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과잉 기대가 멀쩡한 아이들을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로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지난 몇 해 사이에 리탈린 처방이 급증했다. 1993년에 소비된 리탈린이 34kg 이었는데, 2006년에는 1221kg이었다. 3591%가 상승했다. … 노바티스 제약회사는 2006년 한 해 '리탈린으로 3억3천만 달러(약 3천3백억 원)을 벌었다."
독일에서는 매년 60만 명의 어린이가 ADHD 진단을 받는다고 합니다. 전염성이 없는 이 증상이 지난 12년 사이에 2배나 증가한 것입니다. 부모와 교사들은 교육적으로 아무 잘못이 없으며 '뇌가 잘못됐다'고 책임을 미루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운동을 많이 하는 것은 ADHD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육 당국은 체육수업 시간을 늘이지는 않고 있답니다. 또, 프로젝트 수업이나 수공예 수업은 산만한 아이들에게 특히 좋은데, 그런 수업을 늘이지 않고 있지요. 대신 이런 메시지가 난무하고 있다고 합니다.
"독일은 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어차피 천연자원이 부족하니 인적자원에 투자할 수 밖에 없다. 경제 성장이 위험에 처했다. 우리는 세계화에 뒤쳐졌다." (본문 중에서)
주어 '독일'을 '한국'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정말 많이 듣던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독일에서 이런 메시지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특히 PISA 시험에서 형편없는 순위를 기록한 이후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교육기구나 교육 관련 단체가 아닌 경제기구인 OECD가 실시하는 PISA 시험 결과가 독일 교육을 흔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PISA 시험 도입 이후, 독일 학교에서는 성적이 가장 중요한 평가요소가 됐다고 합니다.
PISA 시험이 독일 교육을 흔들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펠리치타스 뢰머는 '실제로 독일 아이들은 성적 압박을 많이 받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독일에서 하웁튜 슐레(5년제 실무 학교) 졸업생은 노동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과거 그들은 수공업자나 기술자가 됐지만, 오늘날은 치료를 받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웁트 슐레 졸업장이 쓸모 없어진 건 두말할 것도 없고 요즘엔 레알슐레(6년제 실업계 학교) 졸업장도 가치가 많이 떨어졌다. 남은 건 오직 김나지움에 가서 아비투어에 합격하고 대학에 가는 길밖에 없다. … 성적 압박에서 살아남아 김나지움(9년제 대학 진학 준비교육 기관)에 입학하면 아비투어(학력 증서)를 향한 더욱 가혹한 압박이 아이들을 짓누른다." (본문 중에서)
아울러 정치적 이유 대문에 몇몇 주에서는 9년제 김나지움을 8년제로 바꿨다고 합니다. 문제는 학제는 8년으로 줄었지만 배워야 할 내용은 그대로 남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전보다 더 압박을 받고, 성적에 대한 부담도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아이큐가 제아무리 높아도 성적과 공부 압박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학교 수업 이외에 매일 숙제를 해야 하고, 중간·기말고사와 각종 학력평가 시험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여가 시간을 꿈도 꿀 수 없다." (본문 중에서)
이 인용문만 읽어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독일학교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의 평범한 중고등학생들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독일 교육 당국은 한국의 교육 당국을 점점 닮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시험을 위한 공부에 내몰리고, 패스트푸드 지식을 쌓는데 급급하며, 학교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인력생산 공장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기업에 복종하는 이상적인 노동자를 만드는 교육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교육은 경제성장을 위해 복무하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오늘날 독일 가정을 '신자유주의에 갇힌 위태로운 가족'이라고 정의합니다. 신자유주의가 국가 간의 무역 장애를 모두 없애고 국가가 세금과 규정에 관여하지 않고 완전히 뒤로 물러나 있으면, 가장 빨리 복지를 실현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자유주의의 약속은 전혀 이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점점 더 불공평한 사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부자 나라였던 독일 아이들이 가난의 위협을 받게 됐고, 여러 경제 통계들이 독일에서 아동 빈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줬습니다.
지금처럼 미니 잡, 반일제, 일용직, 비정규직이 확산되고 이혼이 증가하며 학교 중퇴가 보편화되면 점점 더 가난한 노동자가 늘어나게 될 거라는 것이지요. 저자는 무너지는 독일 사회와 독일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합니다.
1. 경제가 아닌 아이를 위한 교육을 하라.
2. (신자유주의에 물든) 교육학적 조언을 제검토하라.
3. 아이들과 충분히 교감하라.
4. 학교는 지식공장이 아니라 배움의 오아시스다.
5. 개인에게 맞는 학습을 준비하라.
6. 느긋한 부모가 여유로운 아이로 키운다.
7. 항상 입장을 바꿔 생각하라.
8. 관찰과 진단 말고 관심을 가져라.
9. 적극 수용하고 예방하라.
10. 기업의 유연한 사고가 행복한 가정을 만든다.
신자유주의의 침탈로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진 오늘날 독일 교육에 날카로운 분석과 진단에 비해 저자가 내놓은 대안은 조금 평범합니다. 이 열 가지 제언은 대부분 부모의 변화를 요구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독일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 사회적 연대를 확대하라는 중요한 주장이 빠진 것은 크게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신자유주의의 침탁을 받은 독일 교육을 통해 한국 교육의 지금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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