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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시사, 사회

1956 팔레스타인 저항군 닮은 남자는 다 죽여라

by 이윤기 2012.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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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을 아시나요? 아주 오래 전에는 팔레스타인을 언론이 말하는 '중동의 화약고'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분명치는 않지만 미국과 이스라엘 같은 시오니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지 않게 되면서 팔레스타인을 다르게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직접 가보지 못했지만 그 지역의 역사와 현실을 소개하는 책들을 읽으면서 일제 강점기하의 우리나라와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 혹독한 이스라엘의 지배 아래 신음하는 민중들이 어렵게 목숨을 부지하는 수용소 같은 곳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관심을 가지면서 본 책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조 사코라는 미국 만화작가가 쓴(글과 그림) <팔레스타인>이라는 책입니다.

1996년 미국도서출판 대상을 수상한 이 책은 2002년에 국내에 번역되었는데, '시오니즘'의 나라 이스라엘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팔레스타인 지배를 적나라하게 묘사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살인과 폭력적인 지배에 맞서 폭발한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인 '인티파다' 현장을 생생하게 취재하여 소개하였습니다. 당시 이 책을 보면서 설령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의 식민지라고 하더라도 이럴 수는 없다'하는 분노를 강하게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한 이스라엘의 폭력적 대응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목표는 팔레스타인을 식민지처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모두 없애버리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956년 팔레스타인 칸 유니스와 라파 민간인 학살 사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은 조 사코가 쓴 두 번째 팔레스타인 이야기입니다. 그는 2002년 11월과 2003년 3월 사이에 가자 지구를 여행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조차 잊혀가는 '칸 유니스 사건'과 '라파 사건'의 증언을 모은 책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칸 유니스 사건'과 '라파 사건'은 1956년에 이스라엘이 이집트 통치하에 있던 가자지구를 강제 점령하는 과정에서 자행한 '양민학살' 사건입니다. 칸 유니스 사건은 유엔 집계로만 275명이 사망한 대규모 학살 사건이었으며, 라파 사건 역시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입니다.

조 사코는 1956년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하여 생존자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여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을 완성한 것입니다.

굳이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1950년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이나 1951년의 거창양민학살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하여 낯선 외국인 작가가 취재를 한 것입니다. 지금 같은 시절이 아니라 엄혹했던 군사독재시절쯤 된다고 할까요? 아니 이 정도로는 예가 될 수 없겠네요.

일본이 세계 2차 대전 초기 일본군이 동남아시아를 싹쓸이 하면서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일본군 강제위안부 사건'을 파헤치는 작가가 있었다고 한다면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 취재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조 사코가 1956년에 일어난 두 건의 양민학살 사건을 취재하러 가자지구에 들어갔을 때도 매일 폭탄이 터지고 아파치 헬기의 기관포가 사람을 죽이고, 이스라엘 불도저와 굴착기가 팔레스타인 정착촌 건물을 강제 철거하는 작은 학살이 매일 계속되었으며, 10년이 지난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2008년 12월 27일부터 2009년 1월 18일까지 22일 동안 무려 1400명 이상의 가자 주민들이 학살당했으며, 2011년 현재에도 이스라엘 군인들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공격하고 살해 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본문 중에서)

"이스라엘은 전투기를 2500여 차례 출격시켰고, 전차 포병 부대 함정 등을 동원하여 가자 전역을 초토화했다. 이에 대항해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은 겨우 778발의 수제 로켓과 박격포를 날렸을 뿐이다. 이 22일 동안 이스라엘 군인들은 1400명 이상의 가자 주민들을 살해했고,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들은 8명의 이스라엘인을 살해했다." (본문 중에서)

말하자면 1956년에 일어난 '칸 유니스 사건'과 '라파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1956년의 '칸 유니스 사건'과 '라파 사건' 이전부터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인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 이스라엘에 의해 물 샐 틈없이 봉쇄된 가자 지구 

이스라엘 정부의 지원을 받는 유대 테러 단체인 하가나, 이르군 스턴 갱 등의 유대 테러 단체들이 1948~1949년 사이에 팔레스타인 마을을 습격하여 전체 마을의 50%가 넘는 531개 마을을 파괴하였습니다.

이미 1948년부터 수많은 테러 사건이 일어났지만 작가가 1956년에 일어난 '칸 유니스 사건'과 '라파 사건'에 유독 주목한 것은 테러행위의 주체가 이스라엘 정부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유대테러단체가 아니라 이스라엘 정규군이 대놓고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칸 유니스 사건'을 취재하기 위하여 작가 조 사코는 가자 지구에 들어가서 1950년 저항운동에 참가하였던 팔레스타인 전사들을 찾아다닙니다. 이 책은 1956년의 두 사건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다큐멘터리 카메라처럼 조 사코가 증언자들을 만나는 취재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2008년 12월, 22일 동안 1400명의 가자 주민들이 학살당하다

작가가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증언자들의 증언이 어떤 대목에서 일치하고, 어떤 대목에서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가공하거나 결론내리지 않고 그대로 보여줍니다. 

1956년 11월 3일 칸 유니스 마을에 들이닥친 이스라엘군은 집집마다 쳐들어가 남자들을 죽이고 집에서 끌어낸 남자들을 마을 한 곳(팔레스타인 은행자리) 담벼락에 모아놓고 브렌 기관총과 베레타 기관단총으로 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쏴 죽입니다.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은 기관총 총알이 난무하는 이 잔혹한 학살 현장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사람들과 당시 남편과 아들이 죽어가는 현장을 목격한 여인들의 증언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작가는 마치 영화촬영을 하듯이 어떤 장소에서 어떤 자세로 군인들이 사람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는지, 어떻게 사람들을 몰아갔는지, 생존자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하는 장면을 생생한 그림으로 재현해냅니다. 뿐만 아니라 오래된 일에 대한 증언자들의 엇갈리는 기억들도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 이스라엘 군대와 저항군을 묘사한 본문 그림   

칸 유니스 사건 발생 불과 열흘 남짓 후에 '라파 사건'이 일어납니다. 라파 마을에 들이닥친 이스라엘 군인들은 15세에서 60세까지 남자들을 마을 학교에 소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강제 소집되어 학교로 가는 동안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고 집에 숨어 있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합니다.

이스라엘군은 학교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을 8~10시간이 넘게 신원조사를 벌여 '팔레스타인 저항군'들을 색출해 냅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저항군 명단에 들어있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심문해서 또 다른 이름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저항군을 색출(?)합니다.

저항군 색출을 빌미로 양민을 학살하다

이스라엘군의 폭력에 겁먹은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자백하는 사람도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고발하는 일도 있었으며, 팔레스타인 첩자가 직접 팔레스타인 저항군을 찍어내기도 하였답니다.

이렇게 색출된 수백 명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감옥으로 끌려갔고, 또 다른 수백 명의 사람들은 마을 인근의 사막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여기까지는 가자 지구 난민촌에서 조 사코가 증언자들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작가의 시선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 사코는 이스라엘과 유엔의 자료를 찾아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증언과는 전혀 다른 이스라엘의 시각으로 채워진 공식 문서들에 기록된 1956년 사건도 함께 보여줍니다.

이 책에는 마치 학술논문처럼 많은 참고 문헌과 기록물의 출처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조 사코는 1956년 칸 유니스 사건과 라파 사건의 작은 단서라도 찾기 위하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증언자들을 만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익명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신원 밝히는 것을 꺼려 하였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학살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독립과 평화는 요원해 보입니다. 실제로 2006년 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후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땅의 22%에 완전한 주권국가를 건설하겠다고 요구하고 있지만, 팔레스타인 땅 대부분을 무력으로 점령한 이스라엘은 이런 요구조차 거부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하마스를 승인하지 않는 미국과 서방세계를 등에 업은 이스라엘은 지금도 팔레스타인 지역을 물샐 틈 없이 봉쇄하고 있으며 1956년의 끔찍한 학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은 만화라고 만만한 책이 결코 아닙니다. 456쪽의 만만치 않은 두께에다 흔히 만화하면 그림만 봐도 대충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빼곡한 글자 역시 놓쳐서는 안 되는 책입니다.

영상이나 사진보다 더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 마치 흑백 판화 같은 느낌을 주는 조 사코의 그림은 독자들이 팔레스타인에 몰입하게 합니다. 팔레스타인을 알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 10점
조 사코 지음, 정수란 옮김/글논그림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