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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남자친구의 '특별한 사랑'이 '성폭력'이었다면?

by 이윤기 2009.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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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앨런 스트래튼이 쓴 <레슬리의 비밀일기>

남자 친구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꾸만 '성관계'를 요구해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앨런 스트래튼이라는 재능 있는 작가가 쓴 <레슬리의 비밀일기>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미국이 아니라 지구상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둔 십대 여자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고민일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성관계를 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 혹은 성관계를 요구하면 썩 내켜하지는 않지만, 거절하지 않는 여자친구는 나와 같은 성적 욕구를 가진 것이라고 이해해도 될까?"

많은 남자아이들이, 아이뿐만 아니라 남자들이 그렇게 이해하고 싶어 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를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일찍이 '포르노'와 음란물을 경험하는 남자 아이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착각 일 수 있다.

<레슬리의 비밀일기>는 남자친구인 제이슨의 성관계 요구를 자신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이라고 믿었던, 주인공 레슬리가 그것이 특별한 사랑이 아니라 성폭력이었음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세밀하게 그려내는 작품이다.

부모의 이혼, 전학, 매일 잔소리를 퍼붓는 엄마, 새로운 여자에게 푹 빠진 아빠, 도무지 정을 붙일 수 없는 학교라는 지긋 지긋한 일상에 빠진 래슬리에게 '백마 탄 왕자'인 제이슨이 나타난다. 케이티를 제외하고는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없는 래슬리는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여자친구들에게는 남자 경험이 많은 척하고 다닌다.

그러나 사실 첫 번째 데이트에서 어디까지 가야 할지, 키스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제이슨을 만난 뒤로 자나 깨나 남자 친구만을 떠올리는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십대 소녀다.


평범한 10대 소녀, '특별한 사랑'이 '성폭력'임을 깨닫다

모든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준수한 외모를 가진 제이슨, 부자동네의 화려한 저택으로 초대한 후 '사랑하는 사이'라며 요구하는 성관계를 거절하지 못하는 사춘기 소녀의 고민과 소위 '킹카'인 잘난 남자친구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 하는 십대 소녀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바로 다음과 같은 레슬리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애들이 일기를 쓰든 말든 난 계속해서 쓸 거다. 단 2초 만이라도 제이슨 생각을 안 하려면 어쩔 수가 없다. 내 인생 전체가 그에 대한 생각으로 이루어져있는 것 같다."

"하느님께, 만일 제이슨이 나타나서 저한테 데이트 신청을 한다면 앞으로는 하느님을 믿을게요"


그러나 첫 번째 데이트 이후 남자 친구 레슬리의 성관계요구가 사랑이 아니라 성폭력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믿었던 나이 많은 남자친구 제이슨은 만날 때마다 '성관계'를 요구하고, 폭력을 일삼는다.

레슬리는 제이슨의 성관계 요구가 있을 때마다나 "딱 오늘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내일부터는 절대로 제이슨이 하자는 대로 안 할 거야"라고 다짐하지만 다음에는 또 사랑(?)하는 제이슨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만다.

어느 날 레슬리가 쓴 비밀일기가 새로 오신 영어선생님에 의해서 학교에 알려지자, 제이슨은 레슬리와의 관계가 탈로 날까봐 두려워 몰래 찍은 알몸사진으로 협박까지 한다. 마침내 레슬리가 겪은 '사랑'이라고 믿었던 일들이 사실은 '성폭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레슬리는 가장 친한 친구인 케이티와 자신의 일을 의논하면서 용기를 얻고, 제이슨의 집요한 스토킹과 물리적 폭력 앞에 당당하게 맞서며 아슬아슬한 위험 상황을 스스로 헤쳐 나가는 당찬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이슨에게 성폭력과 집요한 스토킹을 당했던 레슬리는 막상 제이슨을 고발하는 문제 때문에 다시 한 번 어려움과 갈등을 겪는다.

"제이슨의 변호사가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기 위해 힘들고 어려운 질문들을 던져댈 거라고. 설사 법정세서 내 말을 믿더라도 제이슨은 기껏해야 몇 달 정도 소년원에 가는 게 전부라고 했다. 아직 열일곱 살 밖에 안 됐고 이제까지 다른 말썽을 피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부당한 성폭력과 새로운 희생자들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결심으로 부모의 막강한 재력으로 뒷받침되는 변호사의 법률 자문을 받는 제이슨을 '법정'에 세우는 용기를 발휘하게 된다. 작가인 앨런 스트래튼은 레슬리가 다른 피해자들이 증언을 거부하는 막막하고 암담해 보이는 현실을 뛰어넘어 용기를 발휘하는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면 제이슨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게 된다. 제이슨이 공식적으로는 초범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소름 끼쳤다."

"다른 애들은 증언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증언을 한다고 해도 제이슨은 금방 풀려나겠지, 하지만 만약에 내가 증언하지 않는다면, 제이슨은 나중에 또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자기가 '초범'이라고 주장할 거야. 내가 법정에서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게 커다란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럼 다음번에는 제이슨도 빠져나갈 수 없겠지. 기록이 남을 테니까. 공식기록 말이야."


레슬리는 제이슨이 더 이상은 모범생인척 할 수 없도록 하고, 똑같은 본성을 숨기고 있는 남자아이들에게 이 이야기가 전해져서 경고의 메시지가 되도록 하며, 반대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여자애들에게는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끝까지 제이슨이 처벌 받도록 어려운 증언의 과정을 견디어내고 마침내 법정에서 승리한다.

암담한 현실의 극복하는 레슬리의 용기

10대들이 당하는 성폭력은 대부분 너무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것이 성폭력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성폭력에 대응하는 방법을 잘 몰라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반대로 남자 아이들은 잘못된 성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신의 여자 친구가 분명하게 싫다는 의사표현을 하지 않으면 '좋아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레슬리의 비밀일기>는 미국도서관협회에서 선정한 '청소년을 위한 좋은 책'과 '청소년들에게 인기 있는 책'으로 동시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성폭력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십대 소녀들이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또 십대들의 생활을 솔직하고 흥미진진하게 보여줘 책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에게도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아이들과 터놓고 이야기하기에 쉽지 않은 주제이긴 하지만, 반대로 남자 아이든, 여자 아이든 10대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읽고 토론해보기를 권할 만한 작품이다. 이혼한 부모를 둔 '레슬리'가 끝까지 자신의 어렵고 힘든 종내에는 위험했던 상황을 결국 부모와는 의논하지 못하였다는 점이 내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