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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

이사, 응답하라 시대의 유산들과 이별

by 이윤기 2015.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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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세대를 살림을 시작한지 20년이 훌쩍 넘었고, 며칠 전까지 살던 집에서도 10년을 조금 더 넘게 살았습니다.젊은 시절 제가 일하는 단체가 워낙 이사를 자주했기 때문에 집은 웬만하면 이사를 하지 않고 최대한 오래 살았습니다. 


첫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사한 아파트는 재건축할 때까지 10년을 넘게 살았고, 며칠 전까지 살던 집에서도 10년을 넘게 살다가 이사를 하였습니다. 워낙 오랜 만에 이사를 해서 그런지 그야말로 '묵은짐'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20년 넘게 사용한 장롱과 냉장고, 쌀통, 신발장, 장식장 등은 이번 참에 새 살림을 바꿨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이삿짐은 둘어들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런데도 탑차 한 대로는 짐을 다 실을 수 없어 따로 트럭 한 대가 더 왔습니다. 가장 많은 짐은 책이었습니다. 20년 넘게 사모은 책이 사과상자로 70상자가 넘었습니다. 사과 상자 한 박스에 책이 몇 권이나 들어가는지 새보지 않았습니다만, 30권쯤이라고 계산하면 2000권은 넘는 것 같습니다. 




이삿짐 센터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책 많은 집과 화분 많은 집이 가장 일하기 힘들다고 하시더군요. 제가 견적을 낼 때 장농도 버리고, 냉장고도 버리고, 쌀통, 거실장, 신발장, 컴퓨터 책상을 버린다고 했더니, 그런건 한 번에 딱 옮길 수 있기 때문에 별로 힘드리 않은데 책이 문제라도 하더군요. 


이사하는 날, 아침 7시에 이삿짐센터 분들이 오셨습니다. 짐을 싸는데 4시간쯤 걸리더군요. 오전 11시쯤 전에 살던 집에서 짐을 싣고 이사가는 집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사다리차로 짐을 옮기니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12시 조금 넘어서 짐을 들여놓기 시작했는데 1시간 30분 만에 집안으로 짐이 모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새로 준비한 책장에 책이 다 꽂히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70 상자가 넘는 책 중에 50상자쯤을 책장에 꽂았을 때 책장에 빈 공간 없이 꽉 차 버렸습니다. 


이삿짐센터 분들도 난감해하시고 저희도 난감하다더군요. 어차피 책은 주인이 종류별로 분류하면서 꽂아야 하기도 햇고, 당장 책장도 모자랐기 때문에 짐을 다 거실로 옮긴 후에 이삿짐 센터분들을 먼저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1박 2일 동안 책과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일단 폐기물로 버렸던 낡은 책꽂이 두 개를 다시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서재 삼아 쓸려고 했던 방에 책을 다 꽂을 수 없어서 다른 방에다 책꽂이 세 개를 넣고 버릴 책과 계속 보관할 책을 재분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더군요. 


이삿짐 센터 분들이 책꽂이 꽂아 놓은 책들을 다 다시 살펴보고, 박스를 하나하나 열어서 거실에 책을 쏟아놓고 새로 분류를 하기 시작했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습니다. 보통 책들은 분류가 쉬운데 단체 활동하면서 모아놓은 자료집들과 프린터된 자료들은 일일이 내용을 확인하고 버릴 것과 보관할 것을 구분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참 많이 걸리더군요. 


책을 분류해서 버리고 아까워서 못 버리고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골라내 재활용품으로 내보내는데 이틀이 걸렸습니다. 아이들 어릴 때보던 책을 골라내서 버릴지 말지 결정하느라 가벼운 말다툼이 한 번 있었고, 오래 된 시사월간지 '말'과 '우리교육'을 버릴 때도 많이 망설였습니다. 


아이들이 보던 책은 일단 2상자를 박스에 담아 따로 보관해놓고, '말'지와 '우리교육'은 재활용품 수집장으로 보냈습니다. '말'지를 기억하시는 분들에게는 그 시대에 '말'지라고 하는 시사잡지가 가졌던 위상(?)을 잘 아실겁니다. 20년 이상 보관해오던 자료들입니다. 


솔직히 지난 10년 간 한 번도 꺼내 읽은 일이 없는데도 웬지 그냥 내다버리기는 너무 아깝고 소중하고 그런 자료들이지요. 보지도 않으면서 뭐하러 쌓아놓고 있느냐는 질문에 명쾌하게 반박할 수는 없지만 버리기는 너무 아까운 자료였답니다. 


아들 녀석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자료들을 보며 "응답하라 1988" 드라마 소품으로 딱 맞는 책들이라고 하더군요. 10년 만에 이사를 하면서 80년 대의 유물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된 셈입니다. 


독재 권력이 언론에 재갈을 물려놓았던 그 시절에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말지를 구독하는 것이 필수였습니다. 정국의 향방과 정세를 전망하기 위해서도 말지는 꼭 읽어야 하는 잡지였지요. 그냥 잡지라고 부를 수 없는 이른바 운동권 기관지 비슷한 매체였습니다. 


더 이상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귀한 자료들을 버려야 하는 것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개인이 보관할 수 없는 중요한 자료들을 사회적으로 모아서 보관하고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