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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5 서해남, 선배와 쓸쓸한 작별

by 이윤기 2016.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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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특별히 기억에 남는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만, 저에게는 1985년이 매우 특별한 해 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1985년 봄입니다. 


그리고 어제밤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닌 그와 30년 만에 작별하였습니다. 오십사 년, 아니면 오십오 년쯤 되는 그의 인생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1985년 봄에 만난 그는 겨우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저의 삶에 아주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학 1학년이 되고 나서 담배를 배운 것도 그가 피우는 세상에서 가장 맛깔스런 담배 맛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후로 지난 30년 동안 그 보다 더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그는 영락없는 니코틴 중독이었고 그냥 온 몸으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담배가 손끝을 떠나지 않았으며, 글쓰기나 대화에 집중할 때는 필터까지 태우는 일이 다반사였고, 담배 꽁초의 남은 불씨로 새 담배에 불을 붙이는 일도 많았습니다. 가방이나 주머니에는 늘 여분의 담배가 있었고 담배가 떨어지면 심각한 불안 증상을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정확히 언제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 하였는지 모르겠지만, 30년 동안 쉬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면 그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두 선배는 똑같이 "그렇게도 담배를 좋아 하더니만......결국엔.......너무 일찍 갔네"하고 안타까워 하였습니다. 


그의 후배로 지내면서 글쓰기와 세상을 이해하는 공부를 하였던 기간은 1985년 봄부터 1986년 봄까지 만 1년, 그리고 1988년 가을과 겨울 언저리의 몇 달간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는 1985년 이후 30년 동안 제가 지금처럼 살도록 하는데 가장 크게 영향을 준 몇몇 사람 가운데 한 명입니다. 


적어도 저에게 그는 세상 누구보다도 훌륭한 시인이었습니다. 그가 쓴 시 한편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여러 밤을 같이 지내며 그가 습작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1985년과 1986년의 저에게는 그는 김남주 시인과 같은 큰 산 이었고 김남주 시인과 같이 문학을 무기로 삼은 '전사'였습니다. 


그때는 김남주 시인은 감옥에 있을 때인데 청년 김남주의 모습이 꼭 그의 모습과 아주 많이 닮았을거라는 막연한 상상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필명을 서해남이라고 정한 것은 고향이 해남이었기 때문인데, 김남주 시인의 고향도 해남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김남주 시인을 닮고 싶었지 싶습니다. 


제 생애를 돌아보면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던 1985년, 그 때 저에게 아주 많은 영향을 주었던 3~4명의 선배들이 있는데 그도 그중 한 명입니다. 저에게는 얼마 전 돌아가신 신영복선생 같은 사상가 보다  제 삶에 더 크고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람입니다. 그와 그 당시 저를 아껴두던 선배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평생 신영복 선생 같은 분을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왔을 때, 짦은 기간 이었지만 마창노련에서 실무자로 일하던 그를 도왔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YMCA에서 노동자 배움터 교실의 실무를 맡아 일하면서 지역 노동운동의 여러 현장에서 가끔씩 그를 만났습니다. 1988년인가 1989년인가에는 마창노련에서 실무자로 일하던 그가 사무실에서 테러를 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마창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을 기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마창노련을 떠나고 한동안 무심히 살다가 그가 결혼을 하고 아이 아빠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가톨릭여성회관에서 노동자 문학교실도 열고 창작 동아리(참글?) 활동을 한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그의 아이가 YMCA아기스포츠단을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때도 그 무렵이었지 싶습니다. 그의 아이가 YMCA를 졸업한 후에는 15 ~6년 가까운 시간 동안 간간히 스쳐가는 바람처럼 그의 소식을 전해들었을 뿐입니다. 


지금 블로그를 만들어 잡문이라도 쓸 수 있는 미천한 능력이라도 갖게 된 것도 그와의 인연 덕분입니다.  초등학교 백일장에도 나가 본 일이 없는 저에게 생애 처음으로 글쓰기를 공부를 시켜 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985년 가을과 겨울즈음에 저는 스파르타 서선생 글쓰기 교실의 유일한 수강생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아마도 이태준의 '문장강화'였을 것으로 기억되는) 오래된 글쓰기 책을 읽어보라고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 책이 옛집 어디엔가 남아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시를 쓰던 그가 동화를 써서 신춘문예에 당선 되었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작가로서 널리 이름을 알리는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사는 곳과 내가 사는 곳이 멀지 않았는데도, 일부러 만나 일상을 나누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가 폐암으로 1년이 넘는 투병 생활을 하였던 것도 모르고 지냈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같은 병실에 있었던 사람을 통해 이사람 저 사람을 건너건너 그의 죽음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어제밤 사진 속에 남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왔습니다. 살아 있을 때 그를 한번 더 찾지 않았던 것이 후회 스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오면서 10년 이 넘게 소식을 나누지 않았던 옛 선배들 전화번호를 찾아내어 연락을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봄에는 꼭 한 번 만나자고 다짐을 받았습니다. 


그의 인생 전부가 어땠는지는 모릅니다만, 1980년 대를 함께 치열하게 살았던 동료들의 환송 조차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 같아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의 고단한 세상 살이가 어땠는지 잘 모릅니다만, 적어도 저에게 그는 앞으로도 영원히 <경대문화> 편집장입니다. 


오늘은 그의 육신이 이 세상과 작별하는 날 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