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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여행

천왕복 오르느라 바빠서...여긴 몰랐지?

by 이윤기 2016.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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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을 떠올리시는가요? 젊은 시절 저에게 지리산은 남한 최고봉 천왕봉으로 다가왔고, 여러 차례에 걸쳐 지리산이 품고 있는 고봉들을 올랐습니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뒤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태백산맥> 같은 책들을 읽은 뒤에 지리산은 '빨치산'으로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지리산을 떠올리다 보면 어느새 "나는 저 산만 보면 피가 끓는다, 눈 쌓인 저 산만 보면, 지금도 흐를 그 붉은 피 내 가슴에 살아 솟는다"는 노래 구절을 흥얼거리게 됩니다. 자신의 신념을 쫒아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산에서 치열하게 살다 죽어간 그들에게 느끼는 어렴풋한 동질감 같은 것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으로 20년 전이었다면 <지리산 암자 기행>같은 제목에는 호기심조차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젠 나이를 먹어가는 탓인지 <지리산 암자 기행>이라는 호젓함이 느껴지는 제목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이미 저자 김종길이 쓴 <남도여행법>을 흥미롭게 읽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의 두 번째 여행 에세이도 설레는 마음으로 펼칠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이미 유명 여행블로거로 적지 않은 블로그 독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8년 연속 다음 티스토리 파워블로거로 활약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불교 신자가 아니지만 지리산 산행 길에 또 지리산 여행길에 여러 암자와 절을 다녀본지라 책을 펼쳐들고는 직접 가봤던 곳이 얼마나 나오는지 찾아봤지요.

<지리산 암자 기행>으로 엮인 글들도 2014년부터 1년여 동안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 '김천령의 오지 암자기행'이라는 기사로 연재되어 많은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었지요. 


지리산에 여러 골짜기와 전망 좋은 땅에 숨어 있는 낯선 암자 이름들 사이에서 한 번 혹은 여러 번 다녀왔던 벽송사, 칠불암, 원통암, 사성암, 문수암, 불일암, 법계사 같은 이름을 찾아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중 가장 많이 갔던 곳은 칠불암과 원통암이었습니다.


서산대사의 우물 남아 있는 원통암


지리산 자락 화계면 의신마을에 지인이 살았기 때문에 그가 살던 의신마을 오가는 길에 아(亞)자 방으로 유명했던 칠불암에 점심 공양을 하러 자주 갔었고, '서산대사'가 출가 수행하였던 의신마을 뒷산 원통암도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의신마을에서 원통암까지 가는 길은 인적이 드문 산길이지만 등산이라기보다는 산책에 가까운 거리입니다. 그러나 가파른 길이라 등산하는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서야 합니다. 마을 뒤 좁은 산길을 따라 암자를 찾아 가는 길이 낯설기는 하지만, 산속까지 이어진 전봇대만 따라가면 길 잃을 염려는 없습니다.


10여 년 전 원통암을 자주 드나들 때는 '서산대사' 수행처라는 표시가 없었는데, <지리산 암자기행>을 보니 지금은 서산대사의 영정과 행적을 담은 사진들을 전시해 놓은 곳도 있는 모양입니다.


"암자에는 3칸의 원통전과 2칸 반의 청허당 건물이 있다. 신기한 건 이 작은 암자에 비록 일각문일지라도 산문이 버젓이 있다는 것이다...... 산문 앞의 층계만 빼면 마을에서 암자로 오르는 길은 수백 년은 된 오래된 길이었다." (본문 중에서)


그 수백 년 된 길은 서산대사가 걸었던 바로 그 길이기도 합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암자에 올라서면 장쾌한 풍광의 지리산 능선을 바로보며 감탄하게 마련입니다. 원통암은 서산대사의 수행처이자 출가한 곳이라고 합니다. 서산대사의 제자인 경허스님이 남긴 <제월당집>에 그리 나온다고 하네요.


"서산대사는 지리산에서 도를 깨치고, 금강산에서 보림을 했고, 묘향산에서 제자를 길렀지요." (본문 중에서)


서산대사의 행적에 대해서는 청허당집에 실린 <완산 노부윤에게 올리는 글>에 자세히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지리산 깊은 골짜기 원통암에는 서산대사 때부터 사용했던 우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하네요. 저자가 원통암을 찾아간 글을 읽다보니 서산대사의 우물물을 떠서 끓여낸 차를 마시는 장면이 영상처럼 아른거렸습니다.


<지리산 암자기행>을 펼쳐 읽을 때 원통암 다음으로 마음을 끈 글은 지리산 오지 암자인 '우번대' 이야기였습니다. 해발 1500m 반야봉 아래 깊숙이 숨어 있는 묘향대와 더불어 지리산 10대 중 한 곳이 우번대라고 하더군요. 지리 10경 같은 말은 들어보았지만, 지리산 10대는 이 책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노고단 가는 길에 숨어 있는 우번대


우번대는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가늘 길, 코재에서 우번대로 가는 길을 찾아들어가야 하는 곳이랍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 가는 길은 스무 번쯤 걸었던 길입니다. 올해만 해도 두 번이나 다녀온 길인데 우번대 가는 길은 흔적조차 본 일이 없습니다.


우번대 가는 길에는 해발 1356미터 종석대가 있는데 "문자 그대로 거대한 바위 종을 엎어놓은 형상"으로 "노고단 못지 않은 경관을 자랑하는데 그 기세가 당당하다"고 합니다. 저자의 글을 읽고 추정해보면 노고단 가는 길에서 먼저 코재를 찾아 종석대를 지나면 우번대가는 길을 찾을 수 있겠더군요.



하지만 위치가 짐작된다고 해도 실제로 이곳을 찾아 나서지는 않을 겁니다. 이곳엔 40년 넘게 홀로 수도하고 있는 스님이 계신다고 하는데, 호기심만으로 찾아가는 등산객이나 여행객들을 반겨주시지는 않을 것 같아서입니다. 저자는 우번대에서 수행하는 법종스님에게서 종석대가 예전 지리산 빨치산들이 사방을 파수하던 장소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고 합니다.


"구례 들판과 섬진강, 노고단 방면, 주능선 쪽, 만복대 등의 북쪽 능선 등 동서남북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으니 지리산 서쪽 방면에서 토벌대의 이동을 파악하기에는 이곳만 한 곳이 없었을 것이다. 흔히 지리산 주능선의 서쪽 끝 봉우리를 노고단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종석대가 서쪽 끝이다." (본문 중에서)


이곳을 수행처로 삼고 있는 법종 스님은 40년 넘게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땅에도 기운이 있다는 말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이야 도통 그 기운을 느끼지 못하니 소용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신라의 젊은 스님 우번이 이 터에서 토굴을 파고 수도정진한 끝에 성불하여 신라의 이름난 도승이 되었고, 우번 스님이 도통하는 순간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석종소리가 울렸다고 하여 산봉우리를 '종석대'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는군요.


빨치산 거점 지리산... 원래는 불국토


도를 깨우칠 수 있는 수행처라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외딴 이 곳에서 40년 넘는 긴 세월동안 홀로 수행하며 지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우번대에서 기도를 하여 깨우침을 얻으면 종석대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40년 넘는 긴 세월 동안 기도하였지만 종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김종길이 쓴 <지리산 암자기행>에는 "선방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벽송사에서부터 암자의 흔적만 남은 천불암과 향적사에 이르기까지 스물세 곳의 암자와 사찰 답사기가 담겨 있습니다. 지리산에 자리잡은 화엄사, 쌍계사, 실상사 같은 큰 절을 빼고도 그 수를 다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었더군요.


무심코 지나쳤던 곳들이 '천하제일의 참선 암자'였고, '지리산 최고의 전망'이 숨겨진 암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리산은 구한말과 해방정국 빨치산의 터전이기에 훨씬 앞서 '불국토'였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자 김종길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리산 암자 50여 곳을 모두 순례하고, 그중 스물세 곳을 다시 순례하며 글로 썼다고 합니다. 저자는 "더 이상 오지가 없는 시대에 산속에 홀로 핀 꽃, 암자를 찾는 것은 종교를 넘어 오래된 향기를 찾아 마음과 정신에 고요와 평온을 찾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는 저자가 인용한 조선시대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남긴 지리산 유람 기록을 함께 읽는 것입니다. 저자는 스물세 곳의 암자 순례기를 쓸 때마다 옛 선비들이 남긴 문헌을 찾아 읽고 인상적인 구절들은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다시 들려줌으로써 지리산의 숨은 암자들을 신비롭고 빛나게 하였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는 옛 사람들이 남긴 지리산 유람록들을 모두 어디서 찾아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이륙의 <지리산기>, 김회석의 <지리산 유상록> 같은 책들에 남아 있는 옛사람들이 경험한 지리산 이야기를 함께 읽는 것은 매우 즐겁고 흥미로운 일입니다.


혹시 당신이 고도의 집중력과 체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할 수 있는 지리산 천왕봉 산행이나 능선을 따라 걷는 지리산 종주만을 꿈꿔왔다면, 걷기 대회처럼 빨리 걷는 산행 대신 이 책에서 소개한 고승들의 수행처를 찾아보는 상상도 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지리산 암자기행 - 10점
김종길 지음/미래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