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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고르기

집에서 죽고 싶다던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

by 이윤기 2019.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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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6월 8일에 태어나 지난 3월 28일 세상을 떠난 제 아버지의 삶을 기록해 두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셨고, 세상 사람들이 기억 할 만한 남다른 삶을 살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식이 아니면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소박한 삶 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마지막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필부의 삶이지만 자식이라도 기억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을 정리하면서 진행한 마지막 저와 아버지의 인터뷰 어머니와 가족들의 기억을 모아 필부로 살았다 간 아버지의 삶을 기록해 둡니다. 

 

지난 봄 팔십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은 '초라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었습니다. 오십 중반(지금 제 나이) 무렵만 하여도 당신이 죽으면 장례도 집에서 치르고, 죽음도 집에서 맞이하고 싶다고 하셨지만, 몇 년 후에 생각해보니 자식들이 너무 번거롭겠다며 장례 병원이나 전문 장례식장에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 만큼은 오랜 세월을 지냈 던 '내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바라는대로 30여년 넘게 살았던  집에서 공교롭게도 평생 늘 잠에서 깨던 그 새벽 시간에 어머니와 저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습니다. 설날(음녁) 연휴를 지내고나서 급격하게 기력이 떨어진 아버지는 죽음을 예감하였는지, 한사코 병원 입원을 '거부'하였습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병원에 입원하고 나면 의사 승낙없이 "마음대로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2015년 폐수술을 받고 나서 몇 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였는데, 그때마다 퇴원을 결정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의사'였습니다. 바로 그 경험 때문에 아내와 자식들의 거듭된 병원 입원 제안을 거부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입원 거부... 죽음을 준비하였던 아버지 

 

아울러 아버지는 집에서 임종을 준비하는 동안 여러 차례 "입원해 있을 때 간병하는 사람들이 환자, 특히 중환자 일수록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고 꼭 집에서 떠나야겠다"고 더 굳게 마음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말을 못하는 환자도 말은 다 알아 들을텐데...푸념하듯이 하는 말들이 너무 험하더라"는 이야기도 하시더군요. 

 

사실 제 아버지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2014년 국립암센터 조사에 따르면 국민 60.2%는 집에서 죽음을 맞길 희망하지만 실제 집에서 생을 마감하는 국민은 14.4%(2017년 통계청)에 그친다. 국민 76.2%는 의료기관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있다."고 합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아버지가 오랫 동안 병석에 계셨다면 병원이나 요양병원으로 모시지 않고 임종을 집에서 맞이할 수 있었을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설날 연휴를 보내고 병석에 누운 아버지는 이때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였던지 평생의 동반자였던 아내에게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곁에서 함께 있어 달라"고 하셨고, 여동생과 저에게도 당분간 자주 집에 들러달라고 하였습니다. 

 

설을 쇠고 건강히 악화되어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대략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장기 출장을 피하고 하루 한 번 이상은 아버지를 보러 집에 들렀습니다. 처음엔 쑥뜸을 뜨 달라고 하였지만 한 달 가까이 지나도 더 이상 차도가 없자 그 마저 그만 두었습니다. 떠나시기 보름 전 쯤엔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저를 불러 놓고 임종을 준비해 달라는 이야기도 하였고, 손자, 손녀도 불러 모두 만났습니다. 

 

관장으로 몸을 깨끗히 비우고 떠난 아버지

 

임종 전 보름 가까이는 거동을 못하였고 대소변을 보러 화장실로 갈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일주일 쯤은 환자용 기저귀를 사용하셨지요. 먹지 못하니 배출도 되지 않았고  속이 답답하다며 마지막 1주일 동안은 매일 관장을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물과 꿀물 이외의 다른 음식은 드시지 않으면서 관장을 매일 하였기 때문에 처음엔 변이 나왔지만 나중엔 관장을 해도 물만 나오더군요. 결과적으로 몸 속까지 깨끗히 비우고 떠나신 샘입니다. 

 

별로 아내와 자식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는데도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은 후에는 여러 차례 "내가 빨리 떠나야 하는데 왜 이리 숨이 안 멈추는지 모르겠다, 내가 너희를 너무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자주하였습니다. 가장 가까이서 24시간 아버지를 수발했던 어머니나 퇴근 후에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잠을 잤던 형제들 누구도 힘든 내색이 없었는데도 아버지는 그런 말씀 하시더군요. 

 

자신의 죽음 맞이가 자식들에게 '폐'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늘 하였던 것 같습니다. 평생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넉넉하지 않은 삶이었지만, 노후에도 자식들에게 경제적으로도 짐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도 늘 품고 계셨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다 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떠나 후에 생각해보니 평소 뜻대로 집에서 삶을 정리할 수 있도록 원하는 대로 해 드린 것이 다행스러웠습니다. 사실 병원으로 모시고 가려고 몇 차례나 권유했던 것은 병원 치료를 받으면 회복 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인데, 입원을 거절한 아버지는 병원 치료가 소용없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먼저 떠나고 나면 남은 너희 엄마가 걱정이다."

 

떠나실 때까지 가장 큰 걱정은 어머니를 혼자두고 떠나셔야 한다는 걱정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떠나고 나면 어머니의 남은 인생을 자식들에게 더 많이 의지해야 하는데, 그런 부담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너희 엄마가 혼자서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 아파트도 아니고 20년 넘은 주택이라서 손 가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닌데, 내가 떠나고 나면 너희들을 많이 귀찮게 할 거다." 하는 말을 여러 번 하셨지요. 

 

평생 건축 일을 해 온 아버지는 웬만한 집 수리를 직접하였고 어머니가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늘 신경써서 관리하였습니다. 봄에 떠날 것을 예감하셨는지, 작년 추석 연휴 기간에 비어 있는 2층에 있던 오래된 세간살이를 모두 정리하도록 하셨습니다. 1톤 트럭 한 대가 넘는 낡은 세간살이들을 그 때 정리하였답니다. 

 

마지막 집 수리도 그 무렵에 하였습니다. 당장 비가 새는 것 도 아니었는데, 당신이 살아 있을 때 방수 공사를 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는지 추석 연휴를 끼워 옥상 방수공사를 시켰습니다. 저와 건축자재 판매상을 하는 매제가 여러 날 작업을 하고, 은퇴 할 때까지 건축 일을 같이 하였던 후배를 불러 배수관 공사까지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올해 몇 차례 태풍을 지나보내면서 옥상을 살펴보러 올라 갈 때마다 그 때 아버지가 이렇게 방수공사를 해두고 떠나서 아무 피해도 없고 걱정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기력이 쇠하여 옥상까지 올라갈 수 없으면서도 고집스럽게 방수 공사를 하도록 한 것도 당신이 떠난 후에 아내와 자식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겠다고 마음 먹었기 때문일겁니다. 

 

아버지가 떠난 지 다섯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아직 아버지의 부재를 잘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아버지가 그 만큼 여러 가지 '단도리'를 다 해두고 떠나셨기 때문이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