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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1주기를 보내며..

by 이윤기 2020.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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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28일) 아버지 1주기를 맞았습니다. 벚꽃이 활짝 핀 작년 봄 날 아버지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 곳에 모시고 왔는데, 올해도 벚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멀리 있는 가족들은 부르지도 못하였고, 가까이 있는 형제들만 모여 아버지를 기억하였습니다. 

아버지 첫 제사는 21일 토요일에 지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부터 저희 집안 제사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모셨습니다. 사람들의 세상살이가 바빠지면서 생일을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당겨 지내는 것처럼 벌써 20여 년 전부터 제사도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당겨 지냈습니다. 당연히 제사 지내는 시간은 저녁 식사 시간이었습니다. 

가족 중에는 첫 제사 만큼은 제 날짜에 지내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만, 저는 아버지가 바라는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수고롭게 하는 일을 결코 바라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음력으로 제사를 지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 역시 기억하기 좋은 양력으로 지내기로 하였고, 살아 계셨던 마지막 날을 기준으로 가장 빠른 주말이 바로 3월 21일(토)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하셨던 것 처럼, 아침 일찍 아들과 어머니 계시는 집으로 가서 청소부터 하였습니다. 1년 만에 집에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맞이하기 위한 대청소였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배운대로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 처럼 하라"고 늘 말씀 하셨습니다. 귀한 음식을 준비하는 것보다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조상'을 모시라고 가르쳐주셨지요. 

아버지 1주기 맞이 대청소...분주한 제사상 준비

첫 제사를 준비하느라 하루 전 날부터 조금 분주하게 보냈습니다. 가족들이 번갈아 한살림 매장을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가장 놀아웠던 것은 난생 처음 도라지를 직접 까 보았다는 겁니다. 세상을 오십년이 훌쩍 넘게 살면서 한 번도 까 본 일이 없었던 도라지를 까게 된 것은 한살림 매장에 깐 도라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인터넷이라고 하는 친절한 도구가 있어서 '검색' 했더니 도라지 까는 여러 비법(!)들이 소개 되어 있더군요. 칼이나 수세미 같은 도구를 이용해서 껍질을 벗겨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몸 통 한 쪽에 칼 집을 내어 둥글게 돌려서 까야 한다고 되어 있더군요. 수고인지 정성인지 알 수 없는 가사노동을 즐겁게 하였습니다. 

제사를 지내 전 날 아버지 묘소에 다녀왔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그렇게 하셨던 것 처럼 "내일 저녁에 아버지 제사를 모실테니...동생들과 조카들도 다 어머니 계신 집으로 모일테니...꼭 다녀가시라"고 말씀 드리고 왔습니다. 살아 계실 때 어느 날 제사를 지내겠다고 서로 약속 한 일이 없으니, "산 사람에게 하는 것 처럼" 아버지에게 날짜를 알려드리고 온 것이지요. 

20여 년 전, 기일에 맞춰 지내던 제사를 바쁘게 사는 자식들을 위해 주말로 바꿀 때 아버지는 산소에 가서 그날 저 처럼 당신 아버지, 어머니께 고하시더군요. "아부지, 어무이 올해부터 제사는 주말 저녁으로 당겨서 기내기로 했습니다. 그리 아시고...잊지 마시고 다녀가이소." 저도 아버지 묘 앞에 앉아 똑 같이 말씀 드리고 왔답니다.   

코로나19로 더 쓸쓸해 보이는 공원 묘지

혼자...아버지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증조부부터 아버지 형제까지 모셔놓은 가족 묘지라 아버지를 보러가면 윗대 어른들 뿐만 아니라 일찍 세상을 떠난 큰아버지와 사촌형님까지 묘까지 다 둘러보고 오게 됩니다. 코로나19 때문에 갑작스레 닥친 어이없이 여유로운 시간 덕분에 평일 오후에 휴가를 내고 다녀왔지요. 묘소 입구에 큰 벚나무들이 여러 그루 있었는데, 2주 전 주말이라 그 때만 해도 아직 꽃망울이 활짝 터지지는 않았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갑니다. 어느 새 1년이 지났고 살아계실 때 아버지와 했던 약속을 끝내 다 못지켰던 것 처럼, 돌아가신 후에 스스로 했던 약속도 다 못지키고 1년이 지나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평범하지 않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냥 평범한 인생을 살았던 아버지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다짐했는데, 짧은 글 몇 편을 쓰고는 하루하루 미루다 한 달 두 달을 미루었고 벌써 1년이 지나버렸습니다. 

제목만 붙여놓고 써다만 글들을 열어보니 기억을 못할까봐 적어두었던 짧는 메모와 단어들이 있었지만, 왜 이 단어를 써 놓았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흐려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올 해는 기록하는 일에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하였습니다.  

부산을 떨며 아버지를 기억하는 첫 제사를 지냈는데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사상을 차리고 오실 때, 가실 때, 잔을 드릴 때 여러 번 절을 하였습니다만, 길지 않은 제사는 금새 끝이 났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떠나시기 전부터 상을 차려 놓고 절을 하는 제사는 안 지내겠다고 진작부터 마음 먹었는데, 아버지와 헤어짐을 서운해 하는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당분간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옛날엔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상을 지냈다고 하니, 3년 정도는 제사를 지내는 것도 좋겠다고 저도 마음을 바꿨습니다. 

아버지 제사를 마치고  '살아 계신 분을 배웅 하듯이' 골목 어귀까지 나갔다 왔습니다. 아버지가 늘 하시던대로 따라하게 되더군요. 제사를 지내도 허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간이 가면 아무 기록도 없이 아버지를 기억하는 일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억이 더 흐려지기 전에 사진과 글들을 잘 정리해 두어야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아버지를 잘 추억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떠난 1년 동안 가족들은 서서히 일상을 회복하였고, 지금은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삶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을 어머니도 체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남은 인생을 살고 계시고, 저 역시 아버지 삶을 기록하겠다는 다짐을 미루면서 제 삶을 바쁘게 살았습니다. 

가족들에게는 큰 사건이나 변화가 찾아오지는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군대에 입대하였다 돌아와서 다시 신체검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사건이라면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 아버지의 부재를 깊이 느끼게 하는 작은 사건들은 있었지요.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저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지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당신 손으로 직접 지은 집을 당신 몸처럼 관리하셨습니다. 언제쯤 수도 꼭지를 교체해야 할 지, 언제쯤 보일러 부품을 교환해야 하는 지 아버지는 늘 다 알고 계셨지요.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동안 보일러가 한 번 고장이 나고, 온수 배관이 한 번 터지고, 집으로 들어오는 수도 배관이 터지는 작은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그러고보니 저희는 아버지 안 계신 지난 1년 동안 별일 없이 모두 다 잘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부터 시작하여 팔십 평생 동안 일만 하시다 가셨으니, 아버지도 이젠 남은 이들 걱정 마시고  편안히 잘 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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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산소에서 혼자 기도를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들어 줄 수 없는 기도들이겠지만, 그냥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바라는 마음을 틀어놓았습니다. 큰 아들이 원 하는 일자리를 찾고 자립할 수 있도록, 작은 아들이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준비를 시작할 수 있도록, 여전히 환상을 쫓으며 살아가는 동생이 제 삶의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어머니가 남은 여생을 건강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이 모든 걸 아버지께 부탁하고 왔습니다. 

참 어리석은 일인데도 심지어 코로나19로 갑자기 운영이 어려워진 YMCA까지도 돌아봐달라고 아버지께 부탁하고 왔습니다. 한 평생을 저와 가족들을 돌보다 가신 분에게 너무 가혹한 부탁을 하고 온 것이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아무 것도 걱정하실 것 없으니 편히 쉬시라고 말씀 드리고 오지 못하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