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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매년 버리는 책 700만권...헌책을 사회적 자산으로...

by 이윤기 2024.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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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KBS1 라디오 <라이브 경남>에서 매주 월요일 이윤기의 세상읽기 코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방송 내용과 조금 다른 초고이기는 하지만 기록을 남기기 위해 포스팅 합니다.(2023. 8. 28 방송분)

 

지난주부터 뜨겁게 달구던 폭염이 조금씩 누그러지면서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가을 공기가 느껴지고 있습니다. 흔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그 중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은 독서문화진흥법으로 정한 독서의 달입니다. 여러분은 올해 책을 몇 권이나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늘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책읽기와 헌책에 관하여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아주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온 이야기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선진국 국민들에 비하여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실제로도 2017년 OECD 자료를 봐도 우리나라 성인 독서량은 평균 0.8권으로 세계 166위로 조사되었습니다. 미국 6.6권, 일본 6.1권, 프랑스 5.9권을 비롯하여 독일, 영국 등 이른바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크게 뒤처지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2018년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분석 결과에 따르면 국민 1인당 월평균 도서구매비는 4,960원으로 연간 6만원에도 못미치는 수준입니다. 높은 교육열에 비하여 독서량은 세계 최저 수준이 된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입시교육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매년 폐기되는 책 700만 권...사회적 자산으로


한편,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매년 6만 5000종 이상의 새 책이 출판되고 있고, 그에 못지않게 많은 책들이 폐지로 버려지고 있습니다. 2022년을 기준으로 전국 1238개 공공도서관에 비치된 책은 약 1억 2356만권이며, 매년 새로 구입하는 책은 약 450만권, 한 해 폐기되는 책은 약 540만권입니다. 


2021년을 기준으로 전국 대학 도서관이 소장한 도서는 1억 7500만여 권이며, 한 해 동안 폐기된 책은 164만권입니다. 전국의 대학도서관은 2021년 한 해 430만권의 책을 구입하였고 구입비용은 2380여억원이었습니다. 추산해보면 전국의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에서 매년 지출하는 도서 구입 비용만 해도 4000억원 이상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교육부 통계를 보면 매년 1000여명(2020년)의 대학 교수들이 퇴임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앞으로 10년 안에 정년퇴직을 앞둔 교수만 해도 약 4만 5000명이나 됩니다. 전국의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 그리고 대학교수를 비롯한 전문 연구자들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포함하면 매년 1000만권 이상의 책들이 폐기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매년 폐기되는 1000만권 이상의 책 대부분은 헌책방이나 폐기물 수집상 혹은 재활용폐지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민간에서 운영하는 헌책방으로 일부 유통되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진열되어도 찾는 사람이 없으면 결국엔 폐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헌책방에 새로운 독자(주인)를 만나는 책들도 대부분은 대중서들입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시민운동가와 퇴직 교수 몇 분들이 <좋은 책을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소모임으로 모여서 지난 21일(월) 경남교육청에서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대학교수나 연구자들 그리고 독서 혹은 도서 애호가들이 소장은 많은 책들이 폐지로 재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공공헌책방 설립을 제안하였습니다. 

좋은 책을 지키고 싶은 사람들

기자회견에 참여한 퇴임 교수님들은 30~40년 넘게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모은 귀중한 책과 자료들을 막상 학교를 그만두고 연구실을 비워주려고 보니 책을 보관할 곳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버리기 너무 아까워 학교 도서관에 책을 기증하고 싶지만, 이미 수년 전부터 대학도서관도 포화상태가 되어 퇴직 교원들의 책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퇴직 후에도 연구활동을 지속하는 분들 중에는 시골에 집을 구하거나 시내에 있는 아파트를 임대하여 책과 자료를 보관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동료나 선배들을 보면 나이가 더 들거나 혹은 언제가 본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결국 자식들 손을 거쳐 폐지로 재활용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실제 사례도 있습니다. 1년 전 세상을 떠난 이름만 대면 많은 분들이 기억하는 역사학자가 계셨는데요. 국내에서는 드물게 중국 근대사를 연구하셨던 분인데 창원에 오래 살면서 말년에 지역사 연구에도 많은 성과를 남기신 분입니다. 이분은 소장하고 있던 희귀한 자료와 책들을 소속 되었던 대학에 남기고 싶었지만 거절당하였고, 같은 전공자가 있는 호남 소재 대학에서 겨우 1/10 정도의 책과 자료를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고인이 마지막까지 가까이 두고 보던 책과 자료들은 결국 적절하게 보관할 곳을 찾지 못해 재활용 수거장으로 가게 되었지요. 

저의 경우도 책이 좋아서 경제적 능력에 비해 다 읽지도 못하는 책을 자꾸 사 모으는 도서 애호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전셋집을 옮길 때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에게 수 많은 핀잔을 듣ㄷ고 추가 비용을 부담하였습니다. 결국 이사 때마다 며칠에 걸쳐서 책을 같이 정리했던 아이들마저 “아빠 나중에 책은 저희들한테 상속 안 하셔도 된다”고 하더군요. 아이들과 웃으면서 나눈 이야기이지만 진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퇴직 교수들...평생 모은 책 보관할 곳 없어...재활용 수거장으로

<좋은 책을 지키고 싶은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소중한 지적 자산이 허무하게 폐기되는 이  문제를 사회적으로 함께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다가 마침 상당한 여건을 갖추고 있는 경남교육청이 뭔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학생수 급감으로 폐교 혹은 여유 공간이 늘어나고 있으니 전국적으로 매년 1000만권 이상 버려지는 헌책과 자료를 인류의 지적자산으로 보존하면서 동시에 좋은 헌책들이 새로운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공공헌책방>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입니다. 

헌책으로 꽉 채워진 낡은 종이 냄새 가득한 서가와 공정무역 커피가 있는 쉼터, 죽기 전에 손때 묻은 자신만의 베스트셀러를 채워 넣은 아무개의 책장, 아마추어 작가와 은퇴한 연구자들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이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집필 공간, 저자 서명이 된 책과 희귀 서적을 따로 모은 경남도민 모두의 서재가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헌책을 모으고, 헌책을 분류하고, 헌책을 팔고, 헌책을 보존하고 헌책을 전시하는 공공헌책방을 학생과 시민들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기자회견 후에는 적극적인 시민들의 반응도 있었습니다. 공식적인 단체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자회견에 나섰던 여섯 분들에게 각각 전화를 걸어와 “나도 참여하고 싶다”,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냐” 하고 묻는 분들이 여럿 계셨습니다. 

서울시에서 만든 공공헌책방 <책보고>라던지, 영국 런던에 있는 헌책 마을 <헤이 온 와이>같은 유사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공공헌책방>이라는 낯선 제안이 하루아침에 가시화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기자회견 후 교육청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행히 언론보도를 보면 “경남교육청이 검토에 들어갔다”는 기사들이 있어 기대를 가지고 있구요. 구체적인 밑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하면 취지에 공감하는 폭넓은 시민참여 플랫폼을 열어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나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