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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시사, 사회

식민지에서 제국주의 촌놈(?)으로 진화하는 '대한민국'

by 이윤기 2008.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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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우석훈이 쓴 <촌놈들의 제국주의>



시청 광장과 광화문에서 50일이 넘게 진해되는 촛불집회를 보면서 수 없이 여러 번 참 많이 변하고 바뀌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오늘 흐르는 강물이 20년 전 그 강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은 강가에 나가 서서 20년 그 강물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곤 하는가 보다. 20년 전 그 시절에는 지금과 집회와 시위문화만 달랐던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도 분명히 달랐다. 

그 때 그 시절 진보적 지식인과 변혁을 지향하는 운동가들은 한국사회가 식민지인지, 혹은 반식민지인지, 혹은 신식민지인지 하는 논쟁으로 수많은 밤을 새웠다. 한국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생각이 같고 다름으로 친구와 동지도 나뉘곤 하는 ‘파란만장’한 경험을 하였었다.  

그런데 어느새 20년이 흘렀는데, 한국 사회가가 ‘제국주의’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에는 한국사회가 식민지를 만들어내지도 못하였고, 식민지를 만들 가능성과 능력도 없으면서, 식민지가 없이는 지탱하기 어려운 제국주의에서 생존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깊은 우려 함께 담고 있다. 

올림픽 성화 봉송 중에 일어난 중국인들의 폭력시위는 앞으로 계속 반복되면서 커져나갈 이런저런 충돌의 서곡에 불과하다. 일본은 ‘평화국가’에서 보통국가로 군사력을 키워가는 전환을 꾀하고 있으며, 독도문제 하나 만으로도 한일 관계는 언제든지 대결구도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이틈에서 한국은 북한과도 충돌하고 일본, 중국과도 틈틈이 충돌하며 왜곡된 경제의 길을 걸어갈 가능성이 높다. 만약 한, 중, 일 삼국이 끝없는 팽창과 경쟁관계로 치닫는다면, 향후 30년 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바로 우석훈의 주장이다. 한, 중, 일을 위한 평화경제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우석훈이 쓴 한국경제 대안시리즈 3권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이처럼 전쟁의 위험에 대한 심각하고 무거운 경고를 담고 있다. 

촌놈들의 제국주의 

한국경제 대안시리즈 1권에서 ‘88만원 세대’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우석훈은, 이번 책에서 한국자본주의를 ‘촌놈’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한국 젊은이들이 사망각서까지 쓰면서 아프가니스탄 선교에 나서는 현상을 어설픈 제국주의, 한국자본주의를 ‘촌놈’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무런 준비도, 아무런 계획도 없이, 17~18세기에 유럽이 했던 제국주의의 길을 조절장치 하나 없이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슬픈 죽음들은 한국자본주의 발전과정의 합리적 전개에 관한 논리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본문 중에서) 

서구열강들과 달리 한국은 한 번도 제국주의 경영을 경험해 본적이 없으면서, 종교적 이유든 외교적 이유든 외국에서 아프가니스탄 납치사건과 같은 피해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 제국주의 비슷한 걸 하고 싶은데, 능력이 안 따라주다 보니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역사가 기계적으로 순환된다고는 보기 어렵지만, 한 중 일 세 나라 모습이 19세기 중반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가 서로 경쟁하며 독자적 ‘민족국가’를 키워나가던 시기와 닮았다는 것이다.  

“제어되지 않은 팽창, 무한한 외부 자원 및 시장을 요구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어느 순간 전쟁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 규모가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그 안에 전쟁을 부르는 힘도 커진다는 것을 지난 2세기 동안의 세계사가 보여준다.”(본문 중에서) 

실제로 일본과 중국은 남중국해 석유수송로를 둘러싸고 언제든지 충돌할 위험을 안고 있고, 독도와 관련된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한일관계역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세 나라가 아프리카에서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 들어섰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도 아니라고 한다. 이런 과격한 민족주의는 이십대나 십대로 내려가도 줄어들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일본과 중국 역시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지은이의 판단이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보여주는 지표 

2007년 여름 한국을 강타한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은 18~19세기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기독교를 앞세워 식민지를 개방하였던 것처럼 한국 기독교인들도 수년전부터 동남아와 중동에 진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일본, 독일과 마찬가지로 피납 당하는 국민이 된 것은 어설프지만 제국주의적 성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이고는 싶으나 미국 눈치를 살펴야 하고, 또 아무도 한국 같은 엉성한 나라에게 기꺼이 식민지가 될 턱이 없는 이 기묘한 현상을 우리는 ‘촌놈들의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본문 중에서) 

다음은 지은이가 주장하는 한국형 ‘촌놈 자본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첫째, 오랫동안 유엔기후협약분과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우석훈은 2007년 발리에서 작성된 UN기후변화 협약인 ‘발리 로드맵’에 의해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부과 받은 새로운 협상에서 한국은 개도국 지위를 벗어났다고 한다. 21세기로 넘어오는 그 언저리 어디쯤에서부터 한국은 선진국으로 질적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선진국으로 질적 변화가 ‘한국 제국주의’로 전환이라면, 그 전환점은 분명 노무현 정부의 어느 한 시점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국내 경제위기 극복 과정에서 파시즘으로 전환하면서 제국주의 체제를 강화한 독일, 이탈리아와 노무현 정권기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을 한국제국주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좌파정권이라기 보다는 민족주의 정권에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째, 이라크 파병은 민족패권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은 한국이 비용을 지불하는 경제적 군사 파병으로 한국자본주의 역사에서 처음 일어난 일이며, 본격적인 제국주의형 자원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국 용병에 가까웠던 월남전과는 달리 순전히 ‘국익’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 

라크 파병은 미국의 강요에 의한 마지못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해외 군사활동을 강력히 바라는 정부와 국익(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고 믿었던 국민들이 원해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는 주장이다.

셋째, 수출주도형 산업국가인 한국은 외연확대에 의해 움직여온 경제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대체로 외부 힘을 원동력으로 작동하는 경제가 패권주의로 바뀌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연변지구와 동남아로 확대되기 시작한 한국의 경제패권주의는 조금씩 제국주의 형상을 갖춰가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정치 및 이념은 아직 제국주의에 적합하지 않지만, 한국경제는 이미 제국주의 구조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넷째, ‘다이나믹 코리아’를 국정운용의 기조로 삼은 것은 김대중 정부시기에 한국자본주의의 기본성격이 패권주의적으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내세운 국정원칙으로서 ‘동북아 중심국가론’ 역시 건설 산업을 중심으로 국가의 제국주의적 재편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동북아 중심국가는 침략국가 

다섯째,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동남아시아나 베트남 같은 곳에서 한류는 전형적인 제국주의형 문화 속성을 나타내고 있고, 한류에 대한 국민적 열광은 정부 정책과 문화 예술계마저도 제국주의적 흐름에 급속하게 편성시키는 속성이 있다고 한다. 특히, 황우석 사건은 제국주의를 향한 사회문화적 전환을 보여주는 시금석과 같다는 것이다. 

국민 80%가 줄기세포 연구로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국익’ 때문에 과학계의 진실, 가임여성들의 인권, 불확실한 경제성 추정 등의 문제를 모두 덮고 진행되었던 황우석 사건은 수출중심주의에 대한 열광과 기본적인 궤를 같이한다는 주장이다. 당시 98% 국민이 유전공학을 이용한 줄기세포 수출산업화에 찬성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이는 그만큼 한국에서 국가주의와 패권적 팽창에 대해서 반대할 힘이 줄어들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미 인문학이나 철학도 인류 보편주의나 역사적 상식에 비추어 한국의 팽창주의를 저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셈이다.”(본문 중에서) 

여섯째, 이미 80%를 넘어선 한국의 대외의존도가 싫든 좋든 외부시장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에 주목하라고 한다. 노무현 정부 4년째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된 ‘경제 영토’라는 단어는 단순한 정책 마케팅을 넘어서 것으로, 이미 한국경제는 식민지 없이는 지탱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식은, 한국자본주의가 이미 식민지를 필요로 하는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들었으나 단독으로 제국주의를 구현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을 등에 업고 사실상 제국주의로서 기능하려고 한다는 가설에 있다.”(본문 중에서) 

따라서 한미 FTA에 대한 노무현 정부가 보여준 과도한 집착 역시 이러한 경제영토 확장이라는 논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일곱째,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반공형 극우파와 민족주의형 극우파들이 빠른 속도로 극우사회의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점이 있다. 좌파들마저 ‘부국강병’을 외치는 작금의 모습을 종합해보면, 노무현 정부 5년은 한국 제국주의가 첫발을 사회적으로 내디뎠다고 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내부 식민지 전략 강화와 남북통합 

이 외에도 <촌놈들의 제국주의>에는 한국사회와 경제가 ‘제국주의적’ 성향을 보여주는 크고 작은 징후들을 다양한 사례를 들어서 소개되고 있다. 식민지를 만들 능력도 가능성도 없으면서 제국주의적 흐름에 편승해버린 ‘촌놈 제국주의’ 한국사회와 경제의 미래는 무엇인가? 

우석훈은 필연적으로 “내부 식민지 전략의 강화와 건설자본형 제국주의”로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조건과 조짐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북한 당국자들이 이 대목을 읽는다면,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분노에 찬 성명서 발표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다음과 같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아 보인다.

“중국보다 가깝고 동남아보다 임금이 싸고 아프리카보다 훨씬 양질의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북한을 식민지로 전환시키지 않는다는 건 상식적인(?)눈으로 볼 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본문 중에서) 

‘햇볕정책’이던, ‘대북강경책’이던 이제는 상대정부를 인정하고 내부 식민지로 가느냐, 아니면 상대정권을 무너뜨리고 가느냐의 차이만 남았을 뿐이기 때문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주장이다. 통일 근본주의와 이윤중심의 민족패권주의는 결국 북한을 경제 식민지화 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고, 이윤 중심주의에 기반한 자본의 북한 진출 경향은 점차 강화될 것이라고 한다. 

우석훈은, 북한과의 경제통합에서 ①생태도시와 생태건축,②생태농업, ③자연생태 보전 이라는 원칙이 지켜져야 하지만 금강산 골프장 같은 일이 일어나거나 핵폐기장 같은 혐오시설이 들어설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떨치지 못한다. 아울러, 남북통합을 바탕으로 한민족 패권주의가 득세한다면 국방비는 늘어나고 동북아시에서 긴장은 더욱 심화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때문에 앞으로 30년 동안, 한, 중, 일 삼국을 둘러싼 극우파 블럭 확대와 생태적 위기, 성장의 한계, 석유자원 중심의 에너지 위기, 국가 단위의 빈부격차문제들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군산복합체와 제국주의적 산업구조는 이런 갈등과 위기를 높이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다분히 막연한 ‘평화 우위’를 말 하지만, 현실에서 평화가 전쟁을 누르는 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 한다. 

“전쟁이 벌어지거나 전쟁과 가까워질 때는 돈을 버는 특정한 사람들과 특정 직업이 존재하는 반면, 평화가 유지될 때 이 평화의 경제적 가치는 일종의 공공재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에게도 경제적 혜택을 직접적으로 주지 못한다.”(본문 중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준 평화를 누리는 것이야 좋아하지만, 정작 그 평화라는 공공재를 위해 애쓰려는 개인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중, 일 삼국이 앞으로 30년 평화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별 국가단위에서 “평화가 현실적으로 필요한 시민들로 국민경제의 절반을 유지해야”하며, 평화로 부터 이익을 얻는 산업이 육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전쟁 없는 유럽’에 대한 열망이 담긴 EU 통합과 비슷한, 중, 일 경제 통합을 통하여 평화체제 구축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중, 일에서 평화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현실에서 다양하게 시도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석훈은 닫는 글을 통해 특별히 학교를 통해 나타나는 우리사회의 파시즘적인 현상을 돌아보아보자고 호소한다. 수업은 더 적게 하고 대학등록금을 50만원 수준으로 낮추어, 억압은 줄이고 자유를 늘리며 다양성을 넓히지 않으면, 더 이상 십대들이 버틸 수 없는 사회가 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 68혁명처럼 결국 중, 고생들이 못 참겠다고 들고 일어나”기 전에 “스위스나 스웨덴처럼 어른들이 알아서 바꾸어”주지 않으면, 종국에는 아이들이든 ‘촛불’이 ‘횃불’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