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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고르기

느릿느릿한 사색의 길, 바람재길

by 이윤기 2010.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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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에 사회학자인 정수복박사 쓴 인문학적 파리산책기 <파리를 생각한다>를 읽었습니다.  정수복 박사는 파리를 산책하며 역사와 철학, 건축과 문화, 예술과 과학, 폭동과 혁명의 흔적이 남은 파리를 걸으며 쌓인 정보와 지식, 느낌과 생각을 모아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에는 철학자들의 산책에 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철학자 칸트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코스를 산책하여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합니다.

또 독일에는 ‘철학자의 길’이 있는데, 막스 베버와 하이데거를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이 걸었던 길이라고 합니다.
일본에도 교토에 철학자의 길이 있는데, 철학자뿐만 아니라 많은 문인들과 음악, 미술을 하는 예술가들이 산책을 통해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몇 구절을 소개해봅니다.

“니체는 생각은 걷는 발의 뒤꿈치에서 나온다며 걸으며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반면, 폴르베르는 걸으면 생각이 달아나버린다며 자기 방의 책상 앞에서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의 말이 다 맞다. 책상 앞에서는 하나의 생각에 깊이 빠질 수 있고 길을 걷다 보면 묻혀 있던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책상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야말로 걷기가 필요하다.”

“철학자들에게 걷기는 자연을 만나고 역사와 삶의 의미를 생각하며 작고 좁은 마음의 자아를 더 큰 세상에 연결시켜 스스로를 확장시키는 하나의 예식이다. 그래서 산책로가 없는 도시에서는 철학과 사상이 만들어지기 힘들다.”

생각하기와 걷기는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책상 앞에서는 하나의 생각에 깊이 빠질 수 있고 길을 걷다보면 묻혀 있던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는 대목에 특히 공감이 갑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자꾸만 떠 오르는 생각과 고민을 떨쳐버리는데도 걷기가 제격입니다. 

지난 주말에 걷기에 좋은 길, 생각하며 걷기에 좋은 길, 그리고 때로는 생각을 내려놓고 그냥 걷기에 좋은 길이라고 생각되는 바람재길을 다녀왔습니다.

머리와 마음이 복잡할 때는 갈피를 잡기 어렵지요. 깊은 생각에 몰두하다가도, 이내 답답한 마음에 생각을 내려놓고 싶기도 하고......아무튼 바람재를 다녀와 좀 시원해졌습니다.




바람재길이야 원래부터 그 곳에 늘 있었겠지만, 저에게 바람재길을 새로 발견하게 해 주신 분은 '임마'님입니다. 지난 봄, 진달래가 한창인 바람재길을 포스팅하신 것을 보고 마음에 담아두었습니다. 지난 봄에 답사 삼아 윗바람재까지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사무실에 출근하였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마음도 답답하여 윗바람재까지 다녀오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장마가 시작되면서 잔뜩 흐린 날씨 탓인지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정말 호젓한 산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바람재', 누가 붙였는지 이름이 너무 예쁘지 않습니까?
실제로 바람재에 올라가보면 이름 많큼 탁트인 경관과 시원한 바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람재에 있는 비석을 보면 매년 3월 말에 바람재에서 진달래 축제를 하는 모양입니다. 윗바람재로 올라가는 산 길에는 사람 키보다 큰 진달래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더군요.



바람재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넓은 임도가 있어 '터털터털' 생각없이 걷기에 좋은 길입니다. 본격적인 등산길은 조심조심 걸어야 하는 길이 있지만 만날재에서 바람재까지 가는 길은 아무 생각없이 걸어도, 혹은 깊은 생각에 빠져서 걸어도 위험할 것이 별로 없는 길입니다.




바람재로 가는길 입구에 있는 임마농장입니다. 멀리서보니 임마님이 농사일을 하고 계시더군요. 점심시간쯤 맞춰 내려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내려오는 길에 들렀다가 갈 요량으로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마음이 변해 내서쪽 광산사로 내려오는 바람에 임마님께 인사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바람재에 빈의자 하나가 놓여있었습니다. 바람재에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식탁의자입니다.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데도 자구 마음에 닿아 사진으로 찍어두었습니다.

바람재에는 아래 사진으로 보시는 우람한 정자가 세워져있습니다만 저는 정자 보다는 외롭게 보이는 빈의자가 더 마음에 듭니다. 커다란 정자는 위압적으로 보여 정이 가지 않습니다.




평소 날씨가 맑으면 바람재 전망대에서는 탁트인 경관과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습니다만, 그날은 날씨가 잔뜩 흐려있어서 멀리까지 볼 수는 없었습니다.




내친김에 윗바람재까지 올라갔습니다. 지금부터는 제법 경사가 심한 오르막길입니다. 다른 생각을 모두 내려놓고 몸에 집중하여 걷는 길입니다. 숨소리, 가쁜 호흡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습니다.


윗바람재는 아래쪽 바람재보다 고도가 높아 '안개'가 더 많았습니다. 땀과 안개 때문에 안경이 흐릿하여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더군요. 수건을 꺼내 안경을 닦았지만 역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개낀 숲길입니다.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 속  한 장면 같더군요. 이 길을 걷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밤에 내린 비 때문에 숲은 잔뜩 습기를 머금엇고 흐린 날씨 탓인지 아무도 산에 오르지 않았더군요.


풀잎에 맺힌 물방울들 때문에 바짓가랑이는 마치 비를 맞은 것 처럼 축축하게 젓었습니다. 11시가 넘어서자 조금씩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지리산이라도 온 것 처럼 변화무쌍한 날씨였습니다.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원래는 윗바람재까지만 가려고 하였는데, 날씨가 좋아져서 '대산'까지 다녀오려고 조금 더 걸었습니다. 안개가 걷히면서 주변이 경관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조금 더 멀리로는 내서의 아파트 단지들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대산에 도착하였는데, 제 마음을 바꿔놓은 이정표가 나타났습니다. 원래는 바람재를 거쳐서 처음 출발한 만날재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광산사'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잠시 고민을 하였습니다.

차를 세워둔 만날재로 돌아갈까, 그냥 광산사로 내려갈까 하고 말입니다. 광산사도 천년고찰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었습니다. 짧은 망설임 후에 광산사로 길을 잡았습니다. 김밥 두 줄도 있고, 물도 충분하고 차비도 있으니 광산사로 내려가도 별로 후회할 일이 없을 듯 하였습니다.

대산 정상에서 광산사까지는 2km입니다. 숲이 깊어서 햇빛을 직접 받지 않고 걸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침에 잔뜩 흐리고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였는데, 낮에는 햇빛이 쨍쨍하여 더웠습니다.

한 참을 내려가니 바람재에서 광산사로 이어진 임도와 만나는 곳에 정자가 나타났습니다. 임도를 따라서 마라톤 연습을 하거나 산악자전거를 타는 분들이 쉬어가는 쉼터였습니다. 12시가 조금 넘었더군요. 대략 3시간을 조금 넘게 걸었습니다.

김밥 도시락과 참외 하나를 꺼내 먹고 광산사로 내려왔습니다. 흐린 날씨 탓인지 등산객은 없었지만 산악자전거를 타는 분들은 여럿 만났습니다. 가파른 산 길에서도 걷는 것 보다는 자전거가 빠르더군요. 저 만치 뒤쪽에 있던 분들이 금새 저를 앞질러 갔습니다. 제 옆을 스쳐가는 동안에는 거친 호흡소리까지 전해오더군요.




광산사 구경한 이야기는 따로 포스팅해야겠습니다. 광산사를 둘러보고 버스를 타려고 마을을 향해 내려오는데 꽤 거리가 멀더군요. 길을 걷다가 아래로 내려가는 차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았지만, 좀 처럼 차를 세워주지 않더군요.


아침에 날씨가 흐려 모자를 챙기지 않은 것을 많이 후회하며 걸었습니다. 땀 닦으려고 챙겨온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아스팔트 길을 걸었는데, 참 덥고 짜증스럽더군요. 버스 승강장을 여러 개를 지났지만 단 한 대 밖에 없는 버스는 좀 처럼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쉬엄쉬엄 약 한 시간쯤 걸었을 때 지나가는 트럭을 향해 손을 들었더니 급정거를 하여 태워주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승용차들에게 외면 당하였는데, 다행히 트럭을 운전하시는 아저씨 눈에는 제가 별로 위험(?)하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남자 혼자 걸으면서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얻어 타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줄 몰랐습니다. 여러번 외면 당하면서 혹시 젊은 여자였다면, 아니 내가 어린 아이와 함께 있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여러번해보았습니다.

바람재길은 만날재에서 출발하여 윗바람재까지 다녀오는 것이 딱 좋은 것 같습니다. 광산사로 내려오는 길도 좋지만 나중에 버스를 이용해서 처음 출발지로 돌아오는 것이 참 번거롭습니다.

바람재길은 가파른 무학산길에 비하여 걷고 생각하기에 참 좋은 길입니다.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저에게 딱 좋은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