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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

살아 40년 죽어 80년, 잎갈나무 전봇대

by 이윤기 2010.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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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무전봇대 보신적 있나요? 확실치는 않지만 지난 겨울 순천에 있는 영화셑트장에서 나무 전봇대를 보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전봇대는 대부분 아래 사진에서 보시는 것 같은 나무 전봇대였습니다.

전기와 전화가 보급된 것이 구한말이니까,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봇대가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일겁니다.


제가 사는 도시의 경우 개항 혹은 1920년대 경부선 철도가 연결되면서 전기와 전화가 보급되고 전봇대가 세워지기 시작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세운 전봇대들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졌겠지요. 비를 맡아도 썩지 않고 견딜 수 있도록 시커멓게 기름 같은 것을 칠해놓았던 것 같습니다.


며칠전 팔용산으로 산책을 갔는데, 늘 그 곳에 있는 나무전봇대가 유난히 눈에 띄어 사진을 찍어두었습니다. 저 전봇대 마저도 어쩌면 얼마남지 않은 근대의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에 세운 나무전봇대들은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재료를 구하기 쉬운 콘크리트 전봇대로 모두 바뀌었습니다. 아울러 요즘 도심 한 복판의 경우에는 콘크리트 전봇대도 쉽게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최근, 도심의 경우 '지중화' 사업을 통해 전선을 땅속으로 연결하기 때문에 아예 전신주가 없는 곳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사는 도시에도 간선 도로변에는 콘크리트 전봇대 마저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도심지에서는 모두 사라진 나무전봇대가 아직 남아있는 곳은 봉암수원지로 연결된 팔용산 숲길입니다. 이곳은 오래전 수원지가 있었기 때문에 산속 깊은 곳까지 전기가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사진으로 보시는 오래된 나무전봇대가 수원지를 관리하는 건물이 있던 곳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관리 건물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지만, 약 15~20년 전만 하여도 숲길에 수원지를 관리하는 건물이 남아있었습니다.

수원지 아래에서 행사를 할 때 관리 건물에서부터 앰프를 사용하기 위한 전기를 빌어 쓴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언제 세워진 나무전봇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겉 모양만 봐도 세월의 흔적이 역력히 느껴집니다. 봉암 수원지가 1930년에 조성되었으니 그 무렵에 수원지를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기가 보급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사진으로 보는 나무전봇대들의 나이는 80살쯤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보다 늦었다고 하더라도 1954년에 수원지 확장공사가 마무리되었으니 60살쯤 되었을 수도 있겠구요.

이 전봇대들을 보고 있으니 살아서 100년 죽어서 100년을 지낸다고 하는 구상나무나 주목이 떠오르더군요.이 나무전봇대들도 구상나무나 주목과 비슷한 삶을 사는 것 같았습니다.

나무전봇대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굻고 곧게 자라는데 꽤 긴 시간이 필요하였을 것이고, 전봇대가 된 후에 또 긴시간을 지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무전봇대는 보통 잎갈나무로 만드는데, 수령이 40여년 정도라고 합니다. 그다지 오래사는 나무는 아닌데 나무전봇대가 되면 원래 타고난 수명보다 더 긴시간을 지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미 전기 공급은 새로 설치한 콘크리트 전봇대를 따라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시커먼 나무전봇대가 옛 자리를 그냥 지키고 있습니다.

이미 임무는 끝났지만, 아마 저 전봇대를 철거하는데 노력과 비용이 들어야하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둔듯 합니다. 아직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전선 혹은 전화선 같은 것이 연결되어 있고, 중간 중간에는 보안등이 설치되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하지 않고 있는 셈이지요.

팔용산 수원지 둘레길을 가시면 봉암동 입구에서부터 수원지를 향해 올라가는 길에 나무전봇대가 촘촘히 서 있습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디고 꿋꿋하게 버티고 서 있는 나무전봇대들을 한 번 찬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리산 고사목처럼 세월을 거슬러 되돌아보는 '단초' 역할을 해주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