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17세기 장편소설 <창선감의록>

by 이윤기 2008. 12. 13.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고전’을 기획한 이들은 우리 고전을 읽는 이유를 “시대가 바뀌고 독자가 달라져도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작품 속에는 인간 삶의 본질을 꿰뚫는 근본적인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현암사에서 만든 ‘우리 고전’ 기획시리즈 중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창선감의록>은 20여권이 넘는 기획시리즈의 제목 중에서 가장 낯선 제목이었다.

구운몽,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흥부전, 장화홍련전과 같은 제목들은 교과서를 통해 보고 들었거나 혹은 현대언어로 재출판되어 널리 읽혔던 책들이다.


그러나 <창선감의록>이라는 제목을 마주 대하고는 이런 책도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 보았더니, 같은 제목으로 나온 책이 어른을 위한 책과 어린이를 위한 책, 그리고 절판된 책까지 모두 4~5종이나 되었다.

인터넷 책방을 검색해보고서야 내가 잘 모르고 있었을 뿐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우리 고전 중의 한 권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 책을 만나보면 표지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우리 고전’이라는 것을 느낌을 쉽게 받기 어렵다.

그도 당연한 것이 <창선감의록>은 조선시대 17세기 장편소설이지만, 화가, 윤가, 남가, 진가, 성가, 임가, 백가, 엄가 등의 집안이 등장하는 중국 명나라 시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문학에 대한 얕은 이해력을 가진 나 같은 이는 책을 읽으면서도 도무지 ‘우리 고전’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시대적, 지역적 배경은 17세기 조선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다양한 소재가 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바탕이 되기도 하였을 법 하다.

이를테면, 자유연애가 허용되지 않던 시기에 “가문의 몰락으로 서로 헤어지지만, 정혼자의 행복을 위해 다른 여자와의 혼인을 주선해 주는가 하면, 죽은 줄 알았던 부인과 천신만고 끝에 다시 만나고, 누이 대신 옷을 바꾸어 입고 잡혀간 쌍둥이 남동생이 그 집의 어여쁜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화진’은 서출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급제하기도 하고, 천자의 은혜를 입어 신분을 회복하기도 하며, 마침내 해적 서산해와 서촉의 적 채백관를 물리친 공로를 인정받아 높은 벼슬에 오르기도 한다.

사람살이의 아름다운 관계에 대한 사색

소설의 끝머리에 글쓴이 최기숙의 작품 해설이 덧 붙여 있는데, <창선감의록>은 여러 인물들이 혈연과 혼인, 의기와 우정의 관계로 맺어져 이야기를 펼치는 ‘가문소설’이기도 하고, 지체 높은 가문의 남녀가 서로 만나 연애감정을 키우고 사랑을 확인하는 이야기를 담은 ‘애정소설’이기도 하다.
 
또한 정치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덕을 배반하는 사람에게 몰려 패배했다가 다시 의로운 지위를 되찾는 ‘정치소설’ 의 면모도 있고, 삼국지의 제갈공명과 같은 신출귀몰한 병법과 지략으로 적과 싸워 이기고 나라를 구하는 영웅소설의 요소도 있고, 효와 우애가 인생에서 왜 중요하며 어떻게 삶의 의미가 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윤리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여러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어디에도 속하기 어렵고 이야기의 전개 또한 느슨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고전을 일컬어 “시대에 따라 퇴색하거나 민족이 다르다고 하여 외면될 수 있는 일시적이고 지역적인 것이 아닌” 책이라고 하지만, 대신에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나 독자를 몰입시키는 재미는 덜 한 것도 사실이다. 멀티미디어 영상 세대들에게 ‘시시한 이야기’로 비쳐질 가능성 또한 없어 보이지 않는다.

<창선감의록> 역시 고전을 오늘날의 언어로 고쳐 쓴 것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온통 혈연, 지연, 학연, 우정, 가문, 혼인으로 엮여있으며, 정치적 위기를 맞은 가문들이 하나로 맺어져 규합하고 과거를 치르거나 나라에 공을 세워 새로운 집권 세력으로 부활하는 것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부모 세대의 이러한 관계는 자녀세대로 고스란히 세습되어 이어진다. 마치 오늘날 가끔씩 월간지 기사거리가 되는 유력 정치인 가문과 재벌 가문 가계도를 보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고전 읽기의 재미도 없지는 않다. “우리 고전에는 민족이 살아온 삶의 궤적이 담겨있고, 우리의 지난 역사가 있고 생활이 있고 문화와 가치관이 있다. 타인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공동체 의식, 선비문화 속에 녹아있던 자연친화 의식, 강자에게 비굴하지 않고 고난에 굴복하지 않는 당당하고 끈질긴 생명력, 고달픈 삶을 해학으로 풀어내며 서러운 약자에게는 아름다운 결말을 만들어 주는 넉넉함”이 바로 고전읽기에서 만나는 즐거움이다.

고전은 우리 것이되 우리에게 낯설다. 오늘날의 삶과 다른 옛이야기이기에 우리에게 낯설지만, 반대로 마치 유전인자처럼 내재된 우리의 문화 , 언어, 생활이 담겨 있기에 주는 편안함도 함께 담고 있다.

“처음 가는 장소에서 언젠가 본 듯한 느낌을 받을 때의 그 어리둥절한 생소함, 바로 그 신선한 충동을 우리 고전 작품은 우리에게 안겨준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세계 여러 나라의 고전들 역시 처음 씌어진 채로 늘 읽히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이 시대마다 그 시대의 언어로 새롭게 고쳐 쓰는 작업을 통하여, 그 시대의 세대들에게 읽힐 수 있는 책이 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