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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여행 연수

삶의 터전을 찾아 국경을 넘는 사람들

by 이윤기 2009.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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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나라는 무엇이고 국경은 무엇일까요?
일제 침략기에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연해주로 떠나가 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국경을 넘었을까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했을까요?

지금도 내가 태어난 땅에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국경을 넘어 불법으로 혹은 합법으로 이 나라로 오는 사람들이 있구요.
한반도 북녁 땅에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남한으로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옛날 그들은 왜 국경을 넘었을까요? 오늘날 이들은 왜 국경을 넘을까요?


삶을 터전을 찾아가는 이주 역사 그리고 공존의 의미

해외동포들의 이민 역사는 아픔과 생존의 위협을 딛고 더 나은 삶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일제 치하 한반도 곳곳에서 이루어졌던 중국과 러시아로의 이주역사로부터 최근 연변지역 재중동포들의 중국 내 경제성장 지역으로의 이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였다가 연해주 지역으로 돌아오는 고려인들의 재이주과정, 그리고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오는 남한으로의 취업을 위한 이주는 모두가 더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국경이라는 장벽으로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 한반도 북쪽의 조선에서 중국을 비롯한 제 3국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남한으로 이주 역시 더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는 민초들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경제적인 부를 쫒아가는 이러한 흐름은 더 나은 삶이라고 하는 희망과 함께 동전의 다른 한 면에는 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일제 치하의 이주 역사에서부터 오늘날의 한민족의 중국, 러시아, 북조선에서 이루어지는 그리고 남한을 향하는 이주는 모두 희망과 위험을 동시안고 있다. 이러한 희망과 위험을 뛰어넘는 실험을 바로 연변두레마을과 연해주 우정마을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짧은 방문 일정이었지만 말 하였던 대로, 들었던 대로라면 통일 조국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느껴졌던 첫 번째 삶의 현장이 바로 연변 두레 마을이었다. 건물만 덩그러니 세워져있어 실감할 수는 없었지만 녹색산업기지-교육기지-주거단지-휴양단지가 일체화된 에코폴리스를 꿈꾸는 두레마을에서 새로운 대안을 만드는 시도를 볼 수 있었다.

탈북자에 대한 지원사업과 조선족 자립지원사업 그리고 북한의 임업자원을 복구하기 위한 잣나무 묘목 보내기 운동에 대한 소개를 받으면서 ‘땅과 사람이 살아 숨쉬는 연변 두레마을’에서 평화와 공존의 싹을 엿볼 수 있었다.

연변두레마을에서 경제적인 부를 쫒아서 끝없이 이어지는 한민족의 이주 역사의 흐름을 끊어놓을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이들의 노력이 꼭 결실을 맺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겉보기에 풍요롭고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는 동포마을 정암촌은 청년들과 젊은 여성들이 모두 외지로 한국으로 돈 벌러 떠나버린 미래가 보이지 않는 늙어가는 마을이었지만, 이제 첫 걸음을 내딛는 어설픔이 느껴졌지만 연변두레마을에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느껴졌고 꼭 성공하였으면 하는 희망을 그 곳에 걸었다.

정암촌에서 열렬한 환영과 성대한 대접을 받았으며 동포사회의 현재 모습을 여러 측면에서 이해할 수 좋은 경험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수 일정 때문에 간단한 마을 소개만 받고 선물을 받아 떠나온 ‘두레마을’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아쉬이 컸다.

지금도 계속되는 강제이주의 역사

연해주에 이주한 재소련 동포인 고려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업이주로 시작된 이주는 망명이주로 급격히 늘어나서 1927년 연해주 지역으로의 이주는 25만 명을 넘어섰다. 이주민의 대부분은 삶의 터전을 찾아서 이주하였고, 정치적 망명을 시도한 독립운동가들은 연해주 지역을 근거지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을 2년 앞둔 1938년 구소련은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으로 국경지대의 안전에 위협을 느끼게 됨에 따라 소수민족에 대한 강제이주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1937년 9월부터 시작된 강제이주 정책으로 20여 만 명의 고려인이 강제이주를 당하였고 5,000여명의 지도자들이 처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역사는 조국을 등지고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간 동포들에게 죽음과도 같은 고난이었다. 강제이주 도중에 수많은 목숨이 죽음을 당하였으며, 1938년의 극히 제한적인 인구조사자료에 다르더라도 천 명당 42명이 사망했고, 아동사망률은 천 명당 2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죽음을 넘어서는 강제이주의 아픔을 딛고 살아가던 러시아의 고려인들은 1991년 소비에트공화국의 해체로 다시 한 번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고난을 격게 된다. 분리독립된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에서 살아가던 고려인 동포들은 새로운 민족주의와 정치경제적 불안과 차별에 내몰리며, 또 다시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서는 연해주 지역으로 재이주가 집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연해주 우수리스크 지역의 우정마을은 이러한 재이주 고려인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마을이었다. 강제이주와 경제적 부를 찾아 떠나는 이주 역사를 마무리 하고 현재 발 딛고 사는 땅에서 공존과 조화로운 삶을 가꿀 수 있는 희망은 연해주의 우정마을에서 싹트고 있었다.

동북아평화연대의 활동가들과 30여 호의 주민들이 유기농 생산, 유기농 시장, 유기농 농산물 가공단지를 조성하여 자립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하고 100여 호의 이주민 정착마을로 가꾸어나가기 위한 튼실한 계획이 실행되고 있었다.

약 4,000헥타르에 달하는 크레모바 농업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로 북한동포들을 지원하여 이북의 식량문제를 해결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찬 포부에서 고려인 동포사회의 미래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지역의 평화와 한반도 안정과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는 더 큰 희망도 함께 발견할 수 있었다.


국내외 연수의 과정에서 국내 활동가뿐만 아니라 현지의 활동가들과의 만남에서도 여러 번 한민족네트워크를 강조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마디로 하자면 우리민족끼리 단결해서 잘 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518아카데미의 국내외 연수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우리민족끼리만 잘 살수 있는 외길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남북한 간에도, 재중동포와 중국인들 사이에도, 러시아의 고려인들과 러시아인들 사이에도 남한의 주민들과 재외동포 사이에도, 북한주민과 남한주민 사이에도, 삶의 터전을 찾아 옮겨 다니는 재외동포들과 남한주민 사이에도 긴장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결국 다수와 소수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를 실현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다가왔다. 우리끼리만 잘사는 세상이 아니라 더불어 잘사는 평화와 공존을 꿈꾸는 공동체의 희망은 연변과 연해주에서도 시작되고 있었다.

518아카데미의 국내외 연수과정으로 말미암아 당장 발 딛고 살아가는 이 곳에서 혹은 당장 당면한 시민운동의 현장에서 재외동포들의 문제를 운동의 과제로 삼지 못할지라도 ‘평화와 공존’ 시각으로 한반도의 통일과 이를 둘러싼 재외동포문제를 고민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내내 ‘평화와 공존’의 관점에서 사물과 현상을 다시 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