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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밀양, 독립운동 기념 사업은 허접하더라

by 이윤기 2015.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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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블로그에 포스팅 하였듯이 지난 일요일(11월 8일) 밀양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관련 포스팅 : 2015/11/11 - [세상읽기] - 영화 암살, 그는 왜 "밀양 사람 김원봉"이라고 했을까? )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을 비롯한 여러 곳을 방문하였습니다만, 역시 가장 관심을 끌었던 장소는 김원봉과 윤세주 생가 방문이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를 두고서 누가 더 훌륭하다, 누가 덜 훌륭하다, 누가 더 공적이 많다, 누구는 공적이 적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제하 독립운동 과정에의 활약상을 보면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굉장히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면합니다. 


아울러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인물을 꼽으라면 김원봉과 윤세주라고 하여도 틀리지 않은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두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에 비하면 기념사업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처량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김원봉 생가터와 윤세주 생가터를 방문해보니 여간 실망스럽지 않았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의열단 단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원봉 생가 터에 상가 건물이 들어서 있고, 길 건너편 하천가에 초라한 표지판이 전부였다는 사실입니다. 역관을 지냈던 김원봉 가문은 아주 가난한 빈농이나 소작농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생가를 지키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살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원봉에게 신식 교육을 시킬 수 있을 정도의 살림은 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김원봉과 그의 동지들이 의열단을 만들어 폭열 투쟁을 전개하고, 의열단 대표가 김원봉이라고 하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헌병과 경찰들로부터 감시와 시달림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가세가 기울고 살림이 궁핍해지자 밀양 내이동을 떠나 더 시골 마을로 옮겨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독립운동하는 자식을 두었기 때문에 가난한 삶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고, 조상대대로 살던 집 한 칸 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친일파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동안 독립운동가를 둔 가문들은 점점 더 가난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넉넉하지 못한 살림도 쪼개서 독립운동에 나선 자식들에게 생활비라도 보태주어야 했으니 조금 있던 재산마저도 점점 줄어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친일파와 지주들의 재산이 늘어나는 만큼 독립 투쟁에 나선 애국지사들 가문은 점점 더 가난해진 것입니다. 


김원봉 선생 생가 터에 생뚱맞은 상가 건물이 들어서 ‘임대 현수막’이 나붙은 것도 결국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가문에 닥친 가난 탓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이 땅에 건물을 지은 사람이야 그곳이 김원봉 생가 터라는 사실 조차 모르고 땅을 사고 건물을 지었겠지만, 한 걸음 물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원봉 선생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평가가 확산되면서 밀양시와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등지에서 김원봉 생가터를 독립운동 유적지로 보존하고 싶어합니다만, 개인 소유의 땅과 건물이라 여러 가지로 여의치 않은 일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시가에 땅과 건물을 매입하여 독립운동가 김원봉 선생을 기리는 기념 시설을 만들고 싶어하지만, 땅주인이 선뜻 협력하는 분위기는 아닌 듯 하더군요. 땅과 건물을 소유한 주인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일제가 내건 현상금으로만 비교한다면 김구 보다 훨씬 거물 독립 운동가였지만, 그가 경찰의 감시와 테러 위협을 견디다 못해 북한으로 갔다 돌아오지 않은 것 때문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김원봉 선생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영화 암살 덕분에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밀양시도 미흡하지만 여러가지 추모와 기념 사업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김원봉 생가 터를 알리는 표지석도 바로 그런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내이동 김원봉, 윤세주 생가 주변을 둘러 보면서 현재까지 밀양시가 추진해 온 기념사업은 너무 무성의하고 유치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무성의하고 허접한 기념 사업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위 사진에 있는 벽화 입니다. 


도대체 이 그림은 무엇을 그린 것일까요? 이 그림의 주인공은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원일까요? 아니면 아니면 나중에 만들어진 조선의용대일까요? 그도 저도 아니라 독립군을 잡으러 다닌 일본군 토벌대 일까요? 태극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군 토벌대는 아니겠더군요. 


그런 이 그림 속에 나와 있는 군인들이 입고 있는 복장은 조선의용대 복장일까요? 아니면 광복군의 복장일까요? 도대체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에 대하여 최소한의 고증이라도 하고 그린 그림인지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작가가 이 벽화를 그렸는지 모르지만, 미술에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도 초등학생들이 그린 반공 포스터 수준에 불과한 그림이었습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이 그림만이라도 제대로 다시 그리던지 아니면 차라리 지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