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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밀양 독립운동 역사 그녀에게 물어봐

by 이윤기 2015.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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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숙 선생님과 함께 다녀 온 밀양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이야기 마지막 편입니다. 마산YMCA 아침논단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습니다만, 이번 답사를 함께 하고 보니 이 분은 천상 "밀양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알리기 위해" 태어난 분인 듯 하였습니다. 밀양 지역 독립운동에 대한 자부심과 밀양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다른 분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서 최필숙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에도 아침 일찍부터 저희 일행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지난번 아침논단에서 들려줬던 이야기와 겹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만,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약 1시간 넘게 밀양독립운동사와 김원봉의 의열단에 대한 특강을 다시 한 번 들었습니다.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밀양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강연하였을 뿐만 아니라 셀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밀양독립운동 유적을 안내하셨기 때문에 사소한 연도나 지명 사람이름을 설명하는데 전혀 막힘이 없었습니다. 이날도 김원봉 선생이 왜 북한으로 갈 수 밖에 없었을까? 하는 이야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여러 곳에 숙소를 정해놓고 중국에서 일본 헌병과 경찰에 쫓길 때처럼 숨어다니며 지내야 했던 이야기, 그의 어린 동생들이 서울에 갔다가 그를 잡으려는 경찰에 붙잡혀 고문 당한 이야기, 그리고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채포 되어 당한 치욕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최필숙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시절에 함께 활동하는 자신의 부하와 동지들이 있는 북한으로 가서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어쩔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굉장히 공감 되었습니다. 


1시간 넘게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서 특강을 듣고 장소를 옮겼습니다. 최필숙 선생님이 준비한 연양갱 세트를 1상자씩 선물로 받았는데, 밀양을 대표하는 선물 세트 중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제주에서 수확한 한천을 말리기에 가장 기후 조건이 가장 적합한 곳이 밀야이라고 자랑(?)하시더군요. 



최필숙 선생에게 밀양 지역 만세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밀양을 축소한 모형에 여러 지역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를 재현해 놓았더군요. 각 지역별 특징을 잘 알수 있도록 모형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의열단 깃발이라고 하는데, 약간 촌스럽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 제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뭐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만, 영국 국기도 좀 연상되고, 일본 일장기도 좀 연상되어서 왜 하필 저리 만들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1938년 10월의 조선의용대 창건 기념 사진입니다. 조선의용대 창건이 무한에서 이루어졌는데, 지료를 읽다보니 그 장소가 무한YMCA 회관이었더군요. 조선의용대 창건 기념행사가 무안YMC에서 이루어졌고, 당시 무안지역 행정책임자였던 주은래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YMCA에 속해 있는 한 사람으로 괜히 기분이 좋더군요



마지막 조선의용대원 기학철 선생이 밀양을 방문했을 때 사진이 기념관에 남아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에는 김학철 선생이 쓴 책 혹은 김학철 선생을 소개하는 책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독립운동기념관 마당에는 상징탑이 있었는데, 뭘 상징하는 지 잘 모르겠더군요. 총알, 전쟁무기 같은 이미지들이 떠 올랐으니 의열단의 폭열 투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도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방문지는 밀양 영남루였습니다. 영남루와 독립운동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었는데, 그곳에는 밀양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김원봉에 버금가는 밀양을 대표하는 친일파 박춘금이 세운 '밀성대군지단'이라는 일본식 무덤 같은 비석의 세워져 있었습니다. 


관련 포스팅 바로 가기 : http://dongri.tistory.com/361


이 친일파는 무일푼으로 일본에 건너가 조직폭력배를 거쳐 제국의회 의원까지 지낸 엄청난 부자였고, 지금도 그 후손들이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을 지을 때도 이 친일파들에게 땅을 사야했다고 하였습니다.(비가 내리는 바람에 메모를 안했더니 더 이상 기억이 안납니다.)




앞서 소개하였던 약산 김원봉 생가 표지석입니다.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은 가산을 탕진하고 살던 집에서 쫓겨다니면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36년을 보내는 동안 박춘금과 같은 친일파 기회주의자들은 막대한 재산을 모아 거부가 되었고, 약산 김원봉 가문은 집 한칸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앞서 포스팅 하였듯이 위 사진에 있는 김원봉 생가 터에는 상가 건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지금도 밀양 곳곳에는 친일파 박춘금의 땅이 수두룩하게 남아 있다고 하더군요. 밀양의 뜻 있는 분들이 밀양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사업을 하려다보면 박춘금의 땅을 돈주고 다시 사야하는 웃지 못할일이 벌이진다고 합니다. 




위 사진에 보이는 기와 지붕이 윤세주의 생가인데, 이 집도 개인 소유로 되어 있어 매입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윤세주 선생의 후손들이 적극 나서고 있지만 아직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하더군요. 



어제도 소개하였던 그 문제의 벽화입니다. 저 윗쪽에 있는 '조선의용대 창건 기념 사진'과 비교해보면 이 벽화에 있는 독립군들은 너무나 오하지졸처럼 보입니다. 밀양시가 하루 빨리 저 벽화를 다시 그리던지 차라리 없앴으면 좋겠습니다. 



이곳은 의열단 창단 멤버인 김상윤 선생 기념비석과 의열단 기념 비석이 세워져 있는 밀양시 상남면 기산리입니다. 김상윤 선생 기념비 뒷쪽에는 의열단을 창단한 애국지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절반 이상이 밀양 사람들이더군요. 



김상윤 선생을 통해 의열단 단원이되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최수봉 선생 생가터도 방문하였는데 깜박하고 사진을 찍어두지 않았네요. 최수봉 선생 생가는 밀양시 상남면 마산리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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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6 - [세상읽기] - 밀양, 독립운동 기념 사업은 허접하더라

2015/11/11 - [세상읽기] - 영화 암살, 그는 왜 "밀양 사람 김원봉"이라고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