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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보다 자전거를 즐겨 탔던 아버지

by 이윤기 2019.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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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부의 인생 기록④] 아버지가 남긴 유산 '낡은 자전거 3대'

'부전자전'이란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 번 블로그 포스팅 때 꼼꼼한 기록 습관을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와 자전거' 이야기를 쓸려고 생각해보니 자전거를 좋아하는 것도 아버지를 닮았거나 혹은 아버지의 습관을 물려 받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 앨범에서 찾아 낸 자전거 사진은 60여년 전에 찍은 이 사진이 유일하였습니다. 평생 자전거를 즐겨 타셨지만 스포츠나 레저용이 아니라 생활 자전거를 타셨기 때문에 자전거 타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말년에 탔던 자전거 3대가 지금도 집 앞 골목 길에 서 있기는 합니다. 

흑백 사진에 나와 있는 자전거는 친척 어른이 타시던 자전거라고 하더군요. 그 때는 정말 자전거가 비싸고 귀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십대 중반에 자전거를 배워 60년 넘게 자전거를 교통수단의 일부로 애용하였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 된 기억 속 아버지 직업은 마부였습니다. 벽돌 공장에서 일하면서 말 구르마에 벽돌과 블럭을 실어 배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저희가 살 던 집에는 말을 돌보는 마굿깐이 있었지요. 검은색 윤기가 흐르는 커다란 말이었습니다. 호주산 말이었다고 하는데, 워낙 힘이 좋아 당시 많이 보급되었던 삼륜 화물차보다 훨씬 많은 짐을 싣고 다녔다고 하더군요.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 할 무렵 슈퍼마켓을 시작하였으니 대략 4~5년 정도 그 일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아껴 타던 신사용 자전거는 아직도 종이가 붙어 있다. 

아버지의 짐 자전거로 처음 자전거를 배우다

슈퍼마켓을 시작할 때부터 자전거는 아버지의 교통수단이 되었습니다. 슈퍼마켓을 열기 위해 말은 팔아버렸고, 삼륜 용달차는 엄두를 낼 수 없었기 때문에 물건을 떼오고 배달하기 위해 커다란 짐자전거를 구입하였습니다. 그 때는 자전거를 자전차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짐 자전거는 '짐차'라고 불렀지요.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가고 자전거 삼각 프레임 사이로 다리를 넣어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도 바로 그 짐자전거였습니다. 삼각 프레임 사이로 다리를 넣고 자전거를 배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내릴 때는 발이 땅에 닿지 않아 자주 넘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슈퍼 사장님으로 2~3년쯤 지냈던 아버지는 동네 구멍가게들에 물건을 배달할 때면 짐자전거를 타고 나갔습니다. 일반 자전거보다 프레임도 튼튼하고 짐받이가 컸기 때문에 큰 상자들을 사람키보다 더 높게 싣고 다녔습니다. 위태로울 만큼 많은 짐을 싣고 다녔지만, 짐을 실을 때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묶으면 위험하지 않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6개월이 지났습니다만, 여전히 집에는 아버지가 타시던 자전거가 3대나 남아 있습니다. 그 중 한 대는 흑백 사진 속에 있는 것과 꼭 닮은 신사용 자전거입니다. 이 자전거는 프레임에는 여전히 종이 커버가 붙어 있을 정도로 아버지가 아껴 타던 자전거 입니다. 

또 한 대는 제 작년에 자전거 타고 장에 나가셨다가 택시와 부딪쳤을 때 현물로 사고 보상을 받은 장바구니 달린 자전거 입니다. 나머지 한 대는 비가 와도 골목에 그냥 세워두고 편하게 타던 자전거 입니다. 

마흔 살 무렵에 건축 일을 시작한 아버지는 예순 다섯 무렵까지 건축노동자로 정말 바쁘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주로 가끔 함안, 의령, 김해 같은 곳으로 일을 갈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마산과 창원 현장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창원에서 일을 할 때는 시내버스 첫 차를 타고 다니셨지만 마산 현장에서 일을 할 때는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녔습니다.

2012년 가을 날, 손자를 태우고 바닷가로 나간 아버지

"마산 시내는 차보다 자전거가 더 빠르다"

창원에 있는 현장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 않았던 것은 집으로 돌아오는 퇴근 길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고된 작업을 마치고 나면 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져서 자전거를 타고 올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세월이 흐르면서 먼 곳으로 일하러 갈 때는 일행들과 승합차를 타고 다니거나 육십이 다되어 딴 운전면허로 승용차를 타고 다녔지요. 

하지만 아버지의 가장 절친했던 교통수단은 역시 자전거였습니다. 오동동 집에서 신마산까지 20분, 오동동 집에서 합성동까지도 20분이면 갈 수 있다고 늘 강조하셨지요. "버스 타고 다니는 것 보다 훨씬 빠르다"고 강조하곤 하였습니다. 건축 일을 그만두고도 10년이 넘게 매일 자산동 약수터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말통으로 물을 길어 오셨지요. 

아시다시피 자산동 약수터는 산복도로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기어가 달린 MTB나 로드 자전거라면 그리 대단한 오르막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아버지가 타시던 자전거는 기어가 없는 일반 자전거였습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천천히 올라가다보면 다리에 근육이 붙어 별로 힘들지 않다고 하시더군요.  

1980년, 마흔 무렵에 건축 노동자가 된 아버지는 예순 다섯 무렵부터 집내서 지내는 날이 조금씩 많아졌습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하나 둘 건설 현장을 떠났고, 젊은 날 아버지께 일을 맡기던 하도급 사장들도 아버지를 찾이 않게 되었지요. 건축 일을 그만 둔 아버지에게 약 15년 동안 자전거는 본격적인 교통수단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가장 즐겨타던 생활 자전거

할아버지의 자전거 타기는 손자들까지 이어져

마산시내를 다닐 때는 모두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10년 넘게 매일 팔용산으로 등산을 다녔는데 늘 자전거를 타고 가서 산 아래에 세워두고 정상까지 다녀왔습니다. 자산동 약수터도 하루 한 번씩 자전거 타고 물을 뜨러 다녔구요. 그 외에도 병원을 가거나 조카가 다녔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갈 때도 항상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제 조카는 제수씨가 출산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는 첫 돌 무렵 마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때부터 초등학교 입학 할 때까지 아버지가 손자를 키웠습니다. 두 돌 무렵부터 어린이집엘 갔고, 다섯 살부터는 유치원을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조카를 데리고 병원, 약국, 보건소, 마트에 갈 때 늘 자전거에 태우고 다녔습니다. 조카는 유치원 입학 무렵에 이미 자전거 타고 자주 다니던 마산시내 지리에 훤했습니다.

가끔 제 차를 타고 함께 어딜 갈 때면, "여긴 할아버지와 자전거 타고 갔던 길"이라고 아는 채를 하더군요. 일곱 살 무렵에는 할아버지를 따라 어시장이나 근처 초등학교까지 어린이용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한 조카는 5학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 추석에 마산에 내려와서 할아버지가 타던 자전거를 곧 잘 타고 다녔습니다. 

사람은 몸으로 익힌 것은 쉽게 까먹지 않는다고 하더니, 할아버지에게 배운 자전거 타는 법은 조카 몸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막내 손자 뿐만 아니라 제 두 아들도 모두 자전거를 잘 탑니다. 두 아들 모두 임진각까지 가는 자전거 국토순례를 다녀왔고 저 역시 자전거 타기를 좋아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저 까지 셋이서 삼대가 함께 가는 '자전거 국토순례'를 꿈꿔 보기도 했었는데 이젠 이루지 못하는 꿈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