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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을 고스란히 담은 작은 집 한 채

 

아버지 인생 이야기 첫 번째 기사는" 입원을 거부하고 '집에서 죽고 싶다'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임종을 맡이하는 대신 내가 살던 집에서 아내와 자식들의 배웅을 받으며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싶다던 마지막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살았던 여러 집들 중에 아버지가 태어났던 고향 집과 임종을 맡은 집은 모두 당신 손으로 지은 집이었습니다.  

 

<관련 포스팅>
2019/08/21 - [숨 고르기] - 집에서 죽고 싶다던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


아버지는 경북 구미시 원평동 3**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박정희 집권시기에 구미가 도시로 개발되면서 원평동 315번지가 시내 중심가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구미 옛집과 땅만 지키고 살았으면 훨씬 잘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구미 옛 집은 마당에 큰 감나무와 살구나무가 다섯 그루나 있었던 터가 넓은 집이었다고 합니다.
 
이 곳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10살이 되던 해에 한국 전쟁이 일어납니다. 인민군을 피해 가족들과 피난을 떠났다가 3개월의 피난살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여동생 한 명을 잃었고 살던 집은 폭격으로 홀랑 타서 잿더미가 되었다고 합니다.  피난에서 돌아와 2년 동안 남의 집 문칸방을 빌려 살면서 금오산에서 나무를 해오고 흙을 져다 날라 직접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염색 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20대 초반의 아버지

10살 때, 한국 전쟁 때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집...  새로 짓다 
 
제 할아버지가 계시긴 하였지만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육체노동에 젬병있었던 탓에 10살(아버지), 12살(큰아버지) 먹은 두 아들이 어른 몫의 일을 해냈다고 합니다. 마흔 살 이후 30년을 건축 노동자로 살았던 아버지지의 운명은 이미 10살무렵 고사리 손으로 고향집을 지을 때 부터 예견 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건축 노동자로 살았던 30년 동안 무수히 많은 집을 손수 지었지만 아버지가 지은 그 많은 집 중에 당신 소유였던 집은 임종을 맡은 작은 집 한 채가 유일합니다. 아버지의 주민등록 초본을 떼어보면 남의 집 살이를 하면서 정말 이사를 많이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1970년 이후의 이사만 해도 10번은 족히 됩니다.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대구에서 마산으로 이사오기 전에 크지 않은 집이지만 우리집이 있었습니다. 부동산 투자 사업을 위해 대구 시내 복판에 있던 큰 기와 공장을 인수했던 때를 제외하면 아버지 인생에서 자신이 소유했던 집은 마산으로 이사오기 전에 살았던 방3칸 부엌 두 개의 대구 태평로 집과 임종을 맞은 마산 오동동 집 두 채 뿐입니다. 
 
젊은 시절도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던 아버지는 대구에서도 당시 변두리였던 평리동에 큰 집을 장만하였습니다. 안채를 제외하고도 세를 받을 수 있는 방이 6칸이나 되었던 이 집은 아버지가 섬유공장 염색 노동자로 일하면서 벌었던 돈과 구미 고향집을 판돈을 합쳐서 장만한 집입니다만, 할아버지 소유로 등기를 하였고 훗날 할머니가 여생을 마칠 때까지 남동생과 두 여동생이 살았습니다. 
 
대구 평리동 집은 아버지, 어머니가 신혼 생활을 했던 집이기도 하고 제가 태어난 집이기도 합니다. 제가 세살 무렵 아버지가 직장을 옮기면서 부모님은 살림을 났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할머니와 삼촌, 고모들이 이 집에 살았기 때문에 40년도 더 된 기억이지만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타향살이...15년 동안 수 많은 남의 집을 짓다... 지은 작은 집
 
마산 오동동 집이 아버지에게 특별한 것은 생애 두 번째로 장만한 집이었을 뿐만 아니라 1994년에 낡은 집을 허물고 당신 손으로 직접 새로 지은 집이기 때문입니다. 건축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당신이 직접 할 수 없는 목수, 전기, 도배 등 몇 가지 공정만 빼고는 모두 직접 시공을 하였습니다.  마침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기다리던 제 동생과 낡은 집을 허물고 작은 2층 집을 지은 것입니다. 
 
오동동 집을 짓는 동안은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처음에 동사무소 담당공무원이 법 해석을 잘못하여 건축허가가 안내줬습니다. 오랜 시간 건축노동자로 살았던 아버지는 무허가 건축을 시작했다가 집을 반쯤 지었을 때 뒤늦게 건축허가를 받았습니다. 무허가 단층집을 지으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2층집이 되었는데 다른 집들에  비하면 1층 천정이 유난히 높습니다.

처음 단층집으로 계획하였을 때, 2남 1녀 아이들을 위해 다락방이라도 만들려고 보통 집들보다 천정을 많이 높였는데, 건축 도중에 2층 집으로 허가가 나는 바람에 2층으로 지었습니다. 1층 천정이 높아 주위 집들보다 더 놓은 집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처음부터 2층으로 허가가 났으면 기초를 좀 더 튼튼히 하였을 텐데"하는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아버지가 지은 집과 꼭 닮은 집이 한 채 더 있는데, 저희 집이 건축 허가가 나는 것을 보고 옆집은 수월하게 2층 집을 지었는데, 워낙 딱 붙여 지은 집이라 바깥에서 보면 형제처럼 닮은 집입니다.  
 

아버지가 직접 지은 붉은 벽돌집

당신 손으로 직접 지은 작지만 쓸모있고 편리하게 지은 집
 
아버지가 지은 집은 법적으로는 건축 설계사의 도움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모두 아버지가 계획한 대로 집을 지었습니다. 제가 건축 도면을 직접 본 일은 없지만 아버지 말에 따르면 "다락방이나 지하실은 도면에도 없는 공간"이라고 하더군요. 평수가 작은 집이지만 작은방 아래는 지하실을 만들었고, 1층 화장실과 2층 화장실 천장에는 모두 다락이 있습니다.
 
지하실에는 오랫 동안 건축 노동자로 일했던 아버지가 평생동안 갖춰놓은 온갖 건축 도구들이 가득합니다. 주택가에 사는 이웃 사람들은 집을 손볼 일이 있으면 아버지의 도움을 받거나 아버지의 건축 도구를 빌려다 썼습니다. 주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지하실에 가득한 건축 도구들은 기름칠이 된 채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오동동 작은 집은 1층에 거실과 주방 그리고 남동생이 쓰던 작은 방과 화장실이 있습니다. 2층에는 여동생 방과 어머니, 아버지가 쓸려고 했던 안방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어머니, 아버지가 2층 안방에서 잠을 잔 날은 제 짐작으로는 채 100도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40여년 동안 새벽부터 일을 시작하는 건축 노동자와 노점상으로 살았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고달픈 몸은 2층 안방까지 길도 먼길이었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2층 안방까지 계단을 올라가는 대신 1층 거실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안방이었습니다. 큰 장농이 있는 안방은 설, 추석 같은 명절이나 되어야 부부의 안방이 되었습니다. 남동생이 대학에 복학하면서 집을 떠났는데 그 때부터는 1층 작은방과 거실이 두 분의 안방이었답니다. 
  
새 집 지었지만, 2층 안방 보다 가까운 1층 거실에서 지내
 
자식들이 결혼을 하고 나서부터는 명절이면 집에 오는 자식들에게 2층 안방을 내주셨지요.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전 1년 여 동안은 가파른 계단을 오를 수 없어 2층 안방에는 올라갈 수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떠난 후 혼자 계신 어머니도 이젠 무릅이 좋지 않아 2층에는 올라갈 엄두를 못내시지요. 
 
아무튼 아버지가 "꼭 집에서 떠나고 싶다"고 했던 그 집은 온전히 아버지가 지은 집입니다. 30여년을 건축 노동자로 살면서 수 많은 남의 집을 지어주고 받은 일당을 모아 지은 집 입니다. 당시 건축 경기가 대한민국 단군이래 가장 좋은 시기였다고는 하지만, 자식 셋을 대학까지 보내면서 돈을 모아 집을 사고 새 집을 짓는 일은 누구보다 뼈빠지게 성실하게 일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제 아버지의 성실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버지가 "비가 와도 일하는 노가다"였다는 겁니다. 흔히 "노가다는 비가 오면 쉬는 날"이라고 했지만, 유난히 성실하고 부지런하여 이른바 도급 공사를 따낸 '오야지'들의 눈에 쏙 들었던 아버지는 비가 오는 날에도 혼자 아파트 공사 현장에 나가 이른바 '단도리'를 하였습니다. 비가 그치면 출근하는 동료 노동자들이 중단 없이 작업을 잘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그렇게 월급도 아닌 일당을 모은 돈으로 대구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마산으로 이사와서 건축 노동자로 일한지 7~8년 만에 낡은 오두막 집(방 2칸, 부엌 1칸)을 장만하였습니다. 건축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낡은 오두막 집을 직접 수리하고 처마 밑으로 쪽방 하나와 부엌을 달아낸 뒤에 원래 있던 제대로 된 방 한칸+부억 한칸을 묶어서 월세를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임종 6개월 전... 옥상 방수공사를 부탁하였다


  아버지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오동동 작은 집 한 채
 
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마산수출자유지역이 한 창 번창하고 창원공단이 개발 되던 그 시절에는 무늬만 방이어도 월세를 놓을 수 있었고 그 시절에는 다들 그렇게 살았지요. 그 작고 좁은 집에서 7~8년을 더 지내고 난 뒤 슬레트 지붕의 낡은 작은 집을 허물고 작지만(원래 집보다는 훨씬 큰) 당시로는 동네에서 제일 번듯한 2층 콘크리트 슬라브 벽돌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실하고 고단한 삶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 고단한 건축일을 하며 모은 돈에는 아버지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돈으로 지은 오동동 작은 집은 아버지의 인생이 담긴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남의 손을 빌어 지은 집도 아니고 넉달 동안 직접 지은 집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미장, 타일, 아시바(비계) 같은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외장 목수와 전기, 도배를 비롯한 몇 가지 작업을 빼고는 모두 당신 손으로 했습니다. 
 
아울러 그 집에 사는 동안 2남 1녀 자식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하였고, 결혼도 하였으며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는 손주들도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제가 기억하는 것으로는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그 집에서 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인생의 황혼기가 되면서부터 늘 "나는 내가 살던(지은) 내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사연이 있었기 때문일겁니다. 제 아버지 뿐만 아니라 자고나면 오르는 부동산 광풍의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 세대 노동자들은 대부분 어렵고 힘들게 집을 마련하였고, 그 집은 전재산과 다름 없었기 때문에 집 한채에 생을 담았던 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1940년 6월 8일에 태어나 지난 3월 28일 세상을 떠난 제 아버지의 삶을 기록해 두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셨고, 세상 사람들이 기억 할 만한 남다른 삶을 살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식이 아니면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소박한 삶 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마지막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필부의 삶이지만 자식이라도 기억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을 정리하면서 진행한 마지막 저와 아버지의 인터뷰 어머니와 가족들의 기억을 모아 필부로 살았다 간 아버지의 삶을 기록해 둡니다.

 







Trackback 0 Comment 1
  1. 양정임 2019.09.15 14:00 address edit & del reply

    어쩌면 저희 친정부모님과 비슷하신지요
    형편이 조금 다를 뿐 열심히 성실하게
    앞만 보고 달리신게 같습니다
    현재까지
    가지신거라곤 아파트도 아닌
    그 보다 훨씬 저렴하고 손님이 거의 없는
    무늬만 상가아파트입니다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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