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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칼럼

김장 2500포기 담은 신세대 아줌마들

by 이윤기 2009.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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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과 김치로 월동준비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김치냉장고도 없던 그 시절에  제 어머니는 식구가 다섯 밖에 안 되는데도 매년 100 포기도 넘는 김장을 담았습니다. 넉넉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겨울을 지내는 밑반찬은 김장김치와 동치미, 된장찌개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그 때는 김장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 살림이 윤택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자랑이기도 하였습니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이면 올 해 우리 집은 배추 몇 포기 담았다하고, 그러면 누구네 집은 배추를 몇 포기나 담았다더라고 서로 자랑처럼 이야기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굴이나 갈치 같은 특별한 김치 속이 들어간 경우는 훨씬 형편이 좋은 집들이었지요.

30여년 사이에 김장담는 모습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김치냉장고는 집집마다 있지만, 정작 요즘 젊은 주부들 중에는 김치를 담을 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젊은 주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직접 김장을 담았다고 하는 것은 별로 자랑거리가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시어머니가 김치 담아 택배로 보내주셨다. 결혼하고 나서 김치 한 번도 안 담아봤다. 김치, 된장, 고추장은 친정어머니가 다 해준다.” 뭐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때마다 꼬박꼬박 김치를 담아주시는 어머니들이 “나 죽고 나면 어쩔래?” 하는 말씀도 많이 하시지요.

김치 담글 줄 모르는 신세대 아줌마들, 어려운 이웃 위해 고무장갑 끼고 나서

그런데, 지난주 수요일 제가 일하는 단체에 속한 ‘등대’라고 부르는 생활공동체 소모임 운동을 하는 젊은 촛불(회원)들과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국제와이즈멘 클럽 주부회원들, SK에너지 자원봉사단 분들이 모여서 2500포기를 김장을 함께 담았습니다.

김치를 담그는 당일에는 1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하여 함께 수고를 하였습니다만, 재료와 양념을 준비하는 일을 비롯한 모든 김장 준비는 등대활동을 하는 젊은 촛불들이 도맡아 하였습니다.

함안에서 농사지은 배추를 찬바람을 맞으며 수확하여 소금에 절이고 씻어 물을 빼는 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친환경 농업으로 생산된 각종 양념은 모두 지역 농산물을 사용하였으며 화학첨가물을 사용하지 않은 마산에서 담은 젓갈로 김치를 담았다고 합니다.

지구온난화와 온실가스 문제가 세계적인 환경 이슈가 되면서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하는 ‘로컬푸드’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번 김장은 배추부터 양념과 젓갈까지 모두 지역 농산물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도 더욱 큰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튼 제일 놀라운 일은 김장 준비를 도맡아서 한 젊은 촛불들 대부분이 결혼 후에 자기 집 김장은 한 번도 제대로 담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찬바람을 맞으며 하루 종일 배추를 절이고 오신 등대 촛불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우리 친정 엄마가 아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친정에서 엄마가 김장 해준다고 오라고 할 때도 그냥 절여놓은 배추에 양념만 해 넣었어요. 배추 절이고 씻고 물 빼고 하는 김장 준비가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어요.”

김장을 안 해 본 것은 자랑도 부끄러운 일도 아닙니다만,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는 한 번도 김치를 담아보지 않은 젊은 주부들이 함께 살아가는 500여 명의 어려운 이웃과 나누기 위해 고무장갑을 끼고 나섰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 아닐까요.

지난 30년 동안 1인당 국민소득은 10배도 넘게 늘어났고, 사람들의 소비 수준도 훨씬 더 높아졌지만 여전히 난방 연료와 겨울 밑반찬을 걱정해야 하는 이웃들이 있다고 합니다. 소득이 늘어났는데도 세상인심은 점점 더 각박해져간다고 걱정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식구들이 먹는 김치 한 번 제대로 담아 본 적 없으면서도 500여명의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나누기 위한 2500포기 김장을 기꺼이 하겠다고, 선뜻 용기를 내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 젊은 주부들이 ‘협동과 자치의 공동체’를 내다볼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 2009년 12월 4일, 경남도민일보 '향기가 있는 글'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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