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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라면, 과자, 아이스크림값 이제 엿장수 맘대로

by 이윤기 2010.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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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부터 오픈프라이스제 시행... 가격담합 우려 등 '약자'에겐 득보다 실

7월 1일부터 라면, 과자, 아이스크림, 의류에 권장소비자가격을 표시하지 않는 개방형 가격제도, '판매가격표시제(오픈프라이스)'가 적용됩니다.


이번 조치는 지난해 7월 지식경제부가 의류 243개와 가공식품 4개 등을 권장소비자가격 표시금지 품목으로 추가 지정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초 지난해 10월부터 적용할 계획이었으나 1년 동안의 유예기간을 두어 7월부터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소비자들에게 익숙한 '권장소비자가격'은 상품 제조업체가 적정 값이라고 관례적으로 제시해 오던 제품 포장지에 인쇄된 가격(권장소비자가격, 희망소비자가격 등)을 말합니다.

이에 비해 판매가격표시제는 판매자가 원가와 유통마진을 고려하여 적정한 가격(마음대로)으로 판매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하는데, 앞으로 소매점마다 라면, 과자, 아이스크림, 옷 가격이 다 달라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지난 1999년 가전제품 등 32개 품목에 처음 '판매가격표시제'가 도입된 이후에 꽤 오랫동안 이 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점포보다 가격이 비싸다고 소비자단체에 고발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엿장수가 똑같은 돈을 받고도 가느다란 것을 길게 잘라 주기도 하고 굵은 것을 짧게 잘라 주기도 하는데 엿장수가 엿을 자기 마음대로 자르는 것을 '엿장수 마음'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라면, 과자, 아이스크림, 의류 가격도 파는 사람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딴집보다 라면 값이 비싸다고, 과자 값이 비싸다고, 아이스크림 값이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주인에게 화를 내거나 한 발 더 나가 고발하겠다고 나서면 '난센스'라는 이야기입니다.

요약하면, 7월 1일부터 라면, 과자, 아이스크림, 의류 등에 판매가격표시제(오픈프라이스)가 확대 시행되기 때문에 앞으로 판매점에서는 원가와 유통마진, 매장 임대료 등을 고려하여 값을 얼마든지 다르게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오픈프라이스 시행으로 동네마다 점포마다 라면, 과자, 아이스크림 가격이 달라진다.  



대형마트 가격 경쟁, 제조업체 압박, 품질 저하로 이어질 수도

예를 들어보면, 과거에는 영화관 등 특정한 장소에서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가격을 일반 슈퍼나 대형마트보다 비싸게 받는 것이 법 위반은 아니지만, 불공정한 거래 행위로 지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판매자가 얼마를 받든지 나무랄 수 없습니다. 상품을 적게 팔더라도 가격을 높게 정하는 것이 판매전략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소비자가 비싼 곳에서는 구입하지 않고, 값이 더 싼 곳을 이용함으로써 스스로 가격을 낮추도록 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 소비자들은 라면값, 아이스크림 값을 비교해 보고 조금이라도 더 저렴한 곳을 찾아서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소비자들은 왜 똑같은 상품인데 다른 가게보다 비싸게 받느냐고 따질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판매가격표시제 도입으로 상품가격에 대한 대형유통업체의 힘이 더 세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과거에는 제품 생산업체가 가격을 정해주면 대형유통업체는 사정에 맞춰서 할인 판매를 했지만, 이제부터는 유통에서 우위를 점한 판매자가 가격을 정하여 제품생산을 요구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특정 품목을 두고 대형유통업체간의 가격 경쟁이 벌어지면 납품 단가 인하 요구가 거세질 수 있고, 납품단가가 계속 낮아지면 제품의 품질이 떨어지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하청구조처럼 납품단가 인하 요구는 제조원가 절감으로 이어져 값싼 원재료 제품의 품질 저하 그리고 제조업체의 근무조건을 열악하게 만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소비자 유혹하는 '미끼상품' 더욱 기승부릴 것

소비자들에게도 이론처럼 좋은 일만 생기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론적으로는 판매가격표시제도를 시행하면 경쟁을 통해 가격인하가 이루어짐으로써 똑같은 상품을 더 싼값에 구입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똑같은 것처럼 보이는 값싼 원료로 생산한 제품을 값싸게 구입하게 되는 악순환 구조의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상품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판매가격표시제도 하에서는 소비자가 가진 정보의 양에 따라 똑같은 제품도 다른 가격에 구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대형마트와 같은 곳에서 판매되는 수백, 수천 가지의 제품 가격을 모두 비교할 수는 없기 때문에 특정 제품의 가격을 아주 낮게 책정한 후에 소비자를 유인하는 '미끼상품'이 늘어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이번에 판매가격표시제에 포함된 라면, 과자, 아이스크림 가격을 경쟁업체들보다 낮게 책정 한 후에 다른 제품의 가격을 높게 책정하여 전체 수익을 높이는 상술을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가격 담합의 우려도 불식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종전에는 제과업체나 빙과류 업체가 가격담합을 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시정명령을 받거나 과징금 처분을 당하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제조업체 대신에 대형유통점들의 가격 담합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대형유통점간의 경쟁구조에서는 가격 할인이 일어나겠지만, 시장구도가 어느 정도 굳어지게 되면 특정 제품을 중심으로 마진을 높이기 위한 가격담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합니다.

끝으로 규모가 작은 동네 슈퍼마켓의 경우에는 더욱 숨통을 죄는 재앙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동네 슈퍼마켓은 일정한 매출에 적정한 유통마진을 붙여서 판매하여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네 상권을 형성하고 있는 중소 슈퍼마켓의 경우 한정된 이웃 소비자를 대상으로 판매하기 때문에 매출을 늘리는 데 구조적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넓은 지역에서 많은 소비자를 끌어들여 '박리다매'로 이윤을 높이는 대형마트나 유통점과 경쟁하는 것이 더욱 불리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판매가격표시제도 역시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철학이 담긴 제도로 이해됩니다. 과거에는 적정이윤이라는 개념으로 정부가 가격에 대한 직·간접적인 가격 통제를 하였지만, 앞으로는 오로지 경쟁을 통해서 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되도록 하겠다는 것이 판매가격표시제도입니다.

언뜻 보기에 소비자들에게 유리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체급을 나누지 않는 권투 시합처럼결국 시장에서 무한 경쟁을 통해 강자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제도가 확대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