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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시사, 사회

"집 없는 서른이면 아파트 불매운동 벌이겠다"

by 이윤기 2010.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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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김선주 세상이야기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올 해가 아직 넉 달 이나 남았지만, 감히 2010년에 읽은 ‘최고의 책’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멋진 책을 소개합니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읽어보라고 권하는 책, 여러 독서 모임에 이달의 도서로 추천하였고, "좋은 책 소개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받은 책, 바로 한겨레신문 칼럼으로 만났던 김선주의 글 모음집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입니다.

글쟁이 김선주 선생의 팬이 된 것은 2001년 3월 한겨레신문이 실렸던 칼럼 ‘예수 없는 한국교회’에 꽂힌 이후부터입니다. 이 칼럼에는 첨단 법의학과 컴퓨터 기술을 동원해 복원한 예수 얼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원해본 예수 얼굴이라는 제목이 없었다면 서울 근교에서 흔히 보는 외국인 노동자의 얼굴인지 영화에서 보아온 네로 황제의 얼굴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평범했다. 놀라 듯 동그랗게 뜨고 있는 눈은 불안해 보였고 뭉뚝하고 넓적한 코는 금방이라도 벌렁거릴 것 같았다. 이마가 좁고 머리털이 뽀글거리는 것도 깊은 고뇌로 사색하는 얼굴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본문 중에서)

늘 닮고 싶은 선배에게 그날 신문에 실린 김선주 칼럼 이야기를 듣고, 신문을 찾아 읽고 인터넷을 검색하여 ‘복원해본 예수 얼굴’을 찾아내었습니다. 한동안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두고 아침마다 ‘복원해낸 예수 얼굴’을 보며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을 되돌아보았던 적이 있었지요.

“창백한 얼굴에 긴 머리카락, 마른 체구에 지성미와 신비감이 엿보이는 갸름하게 깊은 눈, 넓은 이마의 백인 얼굴 대신에, 중동 지역 인종의 특성을 지녔다하여 예수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엷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로마 시대에 식민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고단한 삶을 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의 아들’ 예수에게서 더 많은 사람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평범한 얼굴의 젊은이가 바로 두 번의 밀레니엄의 세월동안 인류에게 사랑과 경외의 대상이 되었던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인 것이다.”(본문 중에서)


첨단 기술로 복원해낸 예수 얼굴, 외국인 노동자를 닮았더라 !

막상 복원해낸 예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김선주 선생의 생각과는 달리 짧은 순간이지만, 예수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엷어지더군요. ‘복원해낸 예수 얼굴’에서 친근감을 느끼는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김선주 선생은 이 칼럼을 통해 자녀에게 담임 목사직을 세습하는 한국교회와 예수없는 한국교회를 향해 쓴소리를 하였습니다. 영국 BBC를 통해 방송된 다큐멘터리는 보지 못하였지만, 인터넷에서 찾아낸 ‘복원해낸 예수 얼굴’ 사진 한 장과 그녀의 칼럼만으로도 놀라운 ‘충격’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예수가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여러 영화에 나오는 예수의 얼굴이나 유럽의 성당이나 미술관에 있는 예수의 모습을 마치 당시 기록을 남긴 그림인 것처럼 모두 사실로 믿었던 것입니다.

“눈은 고통과 연민으로 가득해 보이고 코는 울먹울먹하여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기독교 신자만이 아니라 인류가 사랑했던 ‘사람의 아들’ 예수가 한국의 대형교회 앞에서 지금 출입금지당한 채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것만 같다.” (본문 중에서)

한동안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둔 ‘복원해낸 예수 얼굴’을 보았지요. 예수의 삶을 쫓는다는 것과 이 나라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고민은 뒤이어 이현주 목사가 쓴 <신학강의>공부로 이어지게 됩니다.

빈 라덴의 신과 부시의 신은 그들을 용서할까?

이 칼럼 한 편은 이후 한겨레 칼럼과 김선주 선생의 글을 눈여겨 읽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침 <이별에도 연습이 필요하다>에는 티베트 가난한 마을 사람들의 기도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도의 올바른 뜻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닌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면 개인의 이해가 상충하기 때문에 조물주도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준의 응답을 해줄 수 없지만, 자신을 빼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것이라는 대답이다.” (본문 중에서)

가난한데도 행복하게 사는 어느 티베트 마을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를 물었더니 항상 기도하면 살 뿐만 아니라 늘 남을 위해 기도하며 살더라는 것이다. ‘쪼글쪼글한 주름살마다 환하고 선한 표정이 가득한 중년의 노동자’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과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을 위해서 늘 기도하며 산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늘 편할 때는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삶과 힘에 겨워 기도할 때면 오직 나만을 생각하며 기도하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글이었지요. 종교 이야기를 쓴 칼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빈 라덴과 미국에 관한 글입니다. 김선주 선생은 정말 신이 있다면 결코 어느 쪽도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단언합니다.

“빈 라덴이 종교적 신념에 따라 그런 테러를 저질렀다 해도 그가 주모자라면 그의 신이 무고한 생명을 빼앗은 그를 용서할 리 없다. 또한 미국이 아무리 정의와 정당방위를 외친다 하더라도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킨다면 미국인들이 믿는 신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본문 중에서)

복수나 응징이 아니라 반성만이 테러와 전쟁이 빚어낸 무고한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이루어가지 못한다면, 단지 내 가족 내 나라만을 위해 산다면 인간이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김선주 선생의 칼럼은 ‘성찰’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쓴 대부분 글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데서 출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시작합니다.

10억 아파트, 1년 세금 120만원, 엄살떨지 말자

종부세 논란이 벌어졌을 무렵에 쓴 칼럼 ‘세금 엄살, 심하다 심해’에서는 자신이 기준시가 9억 3천만 원이나 하는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시작합니다.

9억 원이 넘는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데, 건물세, 토지세 그리고 종부세를 모두 합쳐도 세금은 12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10억 원이 넘는 집을 가지고 1년에 기껏 세금 30만 원 더 내는 것이 조세저항을 이야기 주장 할 일인지 되묻는 글입니다.

“종부세 무서워 집을 팔아야 한다는 아우성은 믿을 수 없다. 강남의 45평쯤 되는 아파트 관리비는 여름이면 매달 30만 원 정도, 난방을 하는 겨울철이면 50만 원을 넘는다. 고층의 주상복합은 갑절이라고 한다. 1년 평균 5백만 원에서 천만 원의 관리비를 내면서 종부세 부담이 힘겹다는 주장은 엄살이거나 거짓말, 아니면 여론 왜곡이다.”(본문 중에서)

9년 넘은 100만원도 안 하는 자동차의 세금, 보험료, 주차료를 합치면 차 값이 훌쩍 넘지만 공기 오염시키고 도로 혼잡하게 하고 외화 쓰는 것 생각하면 유감이 없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중고가 100만 원하는 자동차 유지비용이 연간 100만 원이면, 하니 10억 아파트 보유세 120만 원은 껌 값이지요.

30년 전 수유리 근처에서 보증금 20만 원에 월세 8천 원으로 신혼살림을 시작해서 집 장만하고 은행 이자 갚느라 뼛속까지 시렸다고 하는 기이는 다시 젊어지면 그리 살지 않겠다고 합니다.

“내가 서른 살이고 집이 없다면 지금은 집을 사지 않겠다. 자고 나면 천이니 억이니 오르는 아파트 시세를 보고 배 아파하거나 충격을 받지 않겠다. 내가 마흔이 넘고 아이들도 커서 넓은 평수로 이사 가야 할 형편이라도 아파트는 사지 않겠다. 미쳐 돌아가는 부동산 폭주열차에 절대로 올라타지 않겠다.” (본문 중에서)

서울에서 아파트 한 평을 살 돈으로 시골에 헌집이 딸린 땅을 사서 주말마다 다니면서 살겠다는 것, 서울에서 전세를 살면서 주말마다 넓은 시골집을 가꾸며 사람답게 폼 나게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집 없는 서른이라면 아파트 불매운동을 벌이겠다

너도나도 폭주하는 부동산 열차에서 내려버리면 차츰 인구가 줄어드니 전세 값도 집값도 내려갈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겁니다. 당장 집값이 떨어지진 않겠지만, 10년 안에는 잡히리라는 희망을 갖고 살자는 것입니다.

2006년에 쓴 ‘아직 집을 못 샀다고요?’라는 칼럼입니다.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한다는 2018년이 8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요즘 서울 집값이 내려간다고 ‘아우성’인 사람들이 생기는 모양입니다. 김선주 선생의 예언이 딱 맞아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남녀평등과 패미니즘을 강조하는 글들도 눈에 뜁니다. 결혼에 관한 이야기들 중에서 마음에 쏙 와 닿는 몇 구절을 뽑아 옮겨봅니다.

“결혼은 침대를 같이 쓸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침대와 냉장고와 화장실도 같이 쓸 사람을 구하는 거다. 그러니까 같이 잠자고 같이 먹고 같이 배설할 짝을 구하는 것이다. 침대만 같이 쓰려면 굳이 결혼할 필요도 없다.” (본문 중에서)

“(아홉 살 연상과 결혼하는) 아들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들으며 젊은 시절 누나 누나하고 쫓아다닌 아주 괜찮았던 녀석들 얼굴이 잠깐 떠올랐다. 인마, 점마 하며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이 조금 후회되면서 내 아들에게도 같은 일이 생기면 물론 기꺼이 축복해주자고 다짐했다.” (본문 중에서)

“아들딸 구별 않고 둘만 낳았던 내 친구들은 지금 아들딸 구별 말고 재산도 남기고 아들딸 구별 말고 제사도 똑같이 지내도록 하는 전통을 만들어 가고 싶어 한다. 제사의 형식도 바꾸어가야겠지만 우선 아들 가진 부모들이 앞장서서 며느리 집안의 제사와 내 집 제사를 공평하게 하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자고 하는 중이다.” (본문 중에서)

“우리나라 출산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어 2028년에는 인구성장률이 제로가 되고 2050년이면 인구가 지금의 70%가 되리라는 뉴스를 접하며 실실 웃음이 나왔다........인구 성장률 마이너스 사회에선 출산 가산점을 주어야 할 국가적 필요가 생길 것이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본문 중에서)

짧은 글들이지만 긴 여운을 가지고 우리의 삶과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글들입니다. 제사에 관해 쓴 칼럼 ‘제사도 아들딸 구별하지 말고’라는 칼럼은 2010년 2월에 쓴 글입니다. 이 칼럼을 신문에서 읽을 때 크게 공감하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저자 김선주 선생/ 블로그 천개의 눈 천개의 길에서 빌려온 사진

제사도 아들딸 똑같이, 출산 가산점 줄날 곧 온다

저희 집에는 생일을 당겨 지내는 것처럼 제사도 당겨서 일요일에 지냅니다. 왜 할아버지 제삿날에 할머니제사를 함께 지내냐는 물음이 있었지만 두 분 제사를 한 날에 지냅니다. 맞벌이 하는 자식들의 부담을 들어주기 위하여 아버님이 형식을 고치셨지요. 아들딸 공평하게 지내는 것과 함께 시대에 맞은 새로운 형식을 만드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를 읽어보면, 김선주 선생의 시선은 차별 받는 자들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도 그이는 차별을 발견하고 차별 받는 이들의 편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대학생이나 유학생에게만 병역 연기를 해주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다. 고졸 남학생도 몇 년 정도 연기될 수 있어야 한다.” (본문 중에서)

'학생 할인'이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학교 다니는 청소년들에게만 버스비를 비롯한 다양한 할인 혜택을 주던 잘못된 관행을 고친 것 처럼, 병역 연기 기회도 똑같아지도록 제도를 고치는 것이 옳은 일 입니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난 후에 주전과 후보 선수들 간에 포상을 다르게 지급하겠다는 방침이 나왔을 때 쓴 칼럼 ‘잔치 끝에 마음이 상해서야’도 그런 글입니다.

“한 번도 출장하지 못한 선수들은 이중 삼중의 고통에 시달리느라 정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 힘든 훈련을 거뜬히 마치고 최종 엔트리에 낀 이들은 기량 면에서 한국 최고의 선수라는 자부심은 가득하지만 한 번도 출전을 못했다는 사실은 평생에 두고두고 상처가 될 수 있다.” (본문 중에서)

고졸도 대학생처럼 병역연기 혜택 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칼럼은 ‘고졸 생산직 고임금에 웬 딴지?’ 라는 칼럼입니다. 2003년에 쓴 칼럼인데, 맨 처음 소개한 ‘복원해낸 예수 얼굴’ 칼럼과 함께 여러 사람들에게 많이 우려먹었던 글입니다.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13년 차 고졸 생산직 노동자의 연봉이 6천만 원이나 된다고 ‘귀족노동자’ 논란이 있었던 무렵에 쓴 칼럼일겁니다. 노동조합에서는 실제 본봉은 135만 원이고 각종 수당을 챙겨서 최고로 받았을 때 그렇다는 해명을 내놓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김선주 선생은 학력을 차별하고 생산직 노동자를 차별하는 작자들에게 멋지게 한 방 날립니다.

“삼성전자의 이사 연봉은 52억 원이다.......전자 분야의 세계 초일류 기업인 삼성전자의 이사가 세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는 것에 입이 벌어지지만 배가 아프지는 않다. 세계 5대 자동차 회사를 목표로 하는 현대자동차가 생산직 노조원들에게 그에 걸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도 배 아프지 않다. 비록 나의 연봉이 그에 못 미친대도 말이다.” (본문 중에서)

사회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좌파들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을지 모르지만, 평범한 국민들을 설득하기에는 딱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현대 자동차가 세계 일류 자동차 회사라면 노조원들이 세계 일류 대우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 보다 훨씬 적게 받는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 문제를 연봉 6천만 원의 현대자동차 노조원들 책임으로 몰아가는 비겁한 자들을 향해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평생 동안 삶과 성찰이 드러나는 글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칼럼을 썼을까하는 궁금함을 해소 시켜주는 글이 후기에 있습니다.

“나의 일상에서 내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일이 아니면, 그것이 우리 모두의 삶을 억압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글은 일상에서 출발하지만 사회, 정치, 경제구조, 혹은 인류 보편의, 우리 시대의 전반전인 문제와 연결되었다.” (본문 중에서)

글을 쓰면서 지켜온 원칙이었다고 합니다.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를 읽어 보면 원칙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김선주 선생은 “글은 개인적으론 한 사람의 자화상이고, 어떤 시대의 이야기는 그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 녹녹하지도 그리 아름답다고 만 할 수 없었던 치열한 시대를 살았던 삶의 경험이 녹아 담긴 글인데도, 김선주 선생의 ‘자화상’은 이 책 속에 아름답게 그려졌습니다.
 
김선주 선생의 책을 소개한 서명숙과 정혜신이 쓴 추천 글도 참 맛깔스럽습니다. 글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한 세 여자의 글을 이 책에서 모두 만날 수 있는 것은 독자로서는 덤입니다.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 10점
김선주 지음/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