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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외로운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룬다

by 이윤기 2011.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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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김훈의 장편 소설 <내 젊은 날의 숲>

김훈의 장편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은 제가 일하는 단체에서 이달의 도서로 선정된 책입니다. 군더더기없는 글솜씨로 유명한 김훈의 신작 소설이라 망설임없이 고른 책입니다. 

몇 달 전 경남도민일보가 주최한 내러티브 기사쓰기 강의를 들었을 때, 강사로 왔던 한겨레 21 안수찬 기자가 내러티브 기사 쓰기를 공부할 수 있는 교재로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쏟아 올린 작은 공>과 김훈의 여러 작품을 추천하더군요.

그의 글은 남길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짧고 간결한 문장이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아울러 건조하고 명료하며 정확합니다.
<내 젊은 날의 숲>도 그랬습니다.

20대 여자인 주인공 연주는 민통선 안에 있는 수목원에 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되어 비무장지대의 꽃과 나무들을 세밀화로 그리는 화가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방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뇌물죄로 3년 6월의 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다가 가석방된 후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비리공직자로 수감생활을 하는 남편을 외면하고, 그녀의 아버지가 석방된 후에도 별거를 하며 간병인을 보내 남편을 간호하게 합니다. 하나 뿐인 딸에게 한 밤중에도 전화를 걸어 자신의 삶을 하소연하며 교회에 의지하여 힘겨운 삶을 이어갑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 비로소 몸속에 감추어진 '모진 울음'을 토해냅니다.


"어머니의 울음은 한 번도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고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발효되고 숙성된 울음이었다. 울음의 리듬 위에 넋두리가 저절로 실려서 나왔다."


<내 젊은 날의 숲>은 주인공 연주와 그 가족사를 들려주는 소설이면서, 동시에 비무장지대 안의 자리한 수목원에서 자라는 풀, 꽃, 나무와 숲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수목원에 근무하는 연주는 연구실장인 안요한과 나무와 나무사이 같은 거리를 유지합니다.

나무와 나무사이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삶


아울러 비무장지대에서 한국전쟁의 상처를 보듬는 전사자 유해발굴 과정을 이야기로 들려줍니다. 여기에도 '젊은 죽음들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젊은 죽음들을 세밀화로 그려주는 일을 맡았고, 민통선 인근 부대의 장교인 김민수 중위와도 꽃과 나무사이 같은 관계를 이어갑니다. 

안요한 실장과의 만남이나 김민수 중위와의 만남은 시종 뭔가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혹은 특별한 인연이 맺어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이야기가 맺어집니다. 


김민수 중위는 민통선 부근에 있는 부대의 장교로 주인공 연주와 여러 차례 공적인, 혹은 사적인 만남을 이어갑니다. 제대를 앞두고 김민수 중위는 자신이 직장 생활을 하게 될 곳을 알려주고 명함도 건넵니다만, 연주는 선뜻 마음을 내보이지는 못합니다.

안요한 실장은 혼자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 돌보는 이혼남입니다. 그는 업무능력은 뛰어나지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늘 외톨이처럼 지냅니다. 매일 있는 점심시간이지만 함께 밥 먹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거나 그 힘든 삶의 주변에서 가끔 위로를 건네는 사람들 뿐입니다. 전체적으로 우울하고 가라앉는 숲의 밤공기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입니다.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엄마, 엄마의 아픔을 알지만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한 주인공 연주, 안요한과 안신우의 안타까운 삶에 손내밀지 못하는 건조함, 좋은 것이 있어도 좋다고 말하지 못하고, 싫은 일도 싫다고 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삶으로 가득합니다. 한 밤중에 걸려온 엄마의 전화는 끊지도 받지도 않은 채, 이야기를 듣지 않는 대목도 마찬가지입니다.

석방은 수감보다 더 무거운 형벌

<내 젊은 날의 숲>은 서늘한 서글픔으로 가득합니다. 감옥에서 가석방된 아버지를 맞이하면서도 기쁨도 슬픔도 없습니다. 그냥 석방되어 나오기 때문에 맞이 할 뿐입니다.

"여러 방면의 버스가 지나갔으나, 출소자 몇 명은 버스에 타지 않고 정류장 벤치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석방은 수감보다 더 무거운 형벌처럼 보였다."

"가석방은 석방이 아니라 교도소 밖에서 형을 집행하는 것이라고 형사가 말했는데, 난초가 형을 집행하고 있었다."

주인공 연주의 아버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에게도 석방은 수감보다 더 무거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는 석방과 함께 아내에게 버림받고 딸은 아버지를 애써 외면합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났을 때 조차 따뜻한 마음을 주고 받지는 못합니다.

"미안허다, 괜찮다. 그 두 마디를 주고받기 위해서, 나는 수목원에서 서울까지 아버지를 보러 온 것이었다. 잎 진 겨울의 자등령 숲을 스치는 바람소리와도 같이, 스산하고 공허하고, 그래서 아무런 의미도 실려 있지 않은 그 두 마디에.......

그 아버지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서야 형벌에서 벗어납니다. 죽음을 통해 형벌에서 벗어난 아버지는 비로소 깊이 곰삭인 울음을 토해내는 아내와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갈무리하는 딸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뼛가루를 수목원 숲이 자등령과 연결되는 6부 능선쯤에 산골하기로 했다. 나무를 관찰하러 들어갔을 때 보아둔 자리였다. 사방이 트여서 숲의 그림자가 맑았고 계곡을 내려오는 골바람이 와 닿는 바람목이었다. 거기서 산골되는 뼈가루들은 땅에 내려앉지 않고, 바람에 실려서 시화평고원 위를 날아갈 것이었다."

결국 슬픔이나 고통은 모두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김훈은 주인공 연주를 통해서 슬픔과 고통 회환은 모두 살아 남은자들의 몫이라고 담담하게 들려줍니다.

슬픔이나 고통은 모두 살아남은 자의 몫

자등령 유해발굴단이 박창수라는 병사의 신원을 확인하여 가족을 찾아 냈을 때, 유해 주인공의 일흔이 넘은 누이 동생이 찾아옵니다.

"죽은 자는 자신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할 것이고 죽은 자가 남긴 한 토막의 백골조차도 살아남은 사람의 마음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므로 죽은 자의 슬픔이나 고통보다는 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더 클 것이고, 살아남은 자가 더 가엾을 것이었다."

주인공 연주는 감옥을 나와서도 형벌을 이어가던 아버지의 삶이 백골이 되어 자등령 자락에 뿌려질 때, "몸과 마음이 모두 텅 빈 것이라는 말은 수긍하기 어려웠다"고 털어 놓습니다. "몸과 마음이 시시각각 밀어닥치는 색과 형상에 가득차서 끄달리고, 인연의 슬픔이 한이" 없더라는 것이지요.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 더 크고 살아 남은 자가 더 가엾을 것이라고 말 합니다. 그러나 살아 남은 자는 또 삶을 이어갑니다. 김민수 중위의 첫 직장인 시화강 하구 마을이 마음에 떠 오르고, 남쪽으로 간 신우가 너무 커서 낯설어 하기 전에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더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겠지요.

기쁨도 슬픔도 노여움도 그리고 이렇다할 희망도, 뜨거운 감동이나 열정도 발견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만그만한 삶을 살아내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숲'을 명징하게 그려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가까이 다가 갈 수 없는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나무들이 모여서 숲을 이루는 것이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젊은 날의 숲 - 10점
김훈 지음/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