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쇠말뚝만 뽑으면 민족정기 살아나나?

by 이윤기 2009. 1. 1.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한국인의 반일의식을 가장 자극하는 사건은 무엇일까?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역사교과서 왜곡문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최근에는 한센병 환자 보상 문제 그리고 재일교포 문제에 관심 있는 이들은 우토로 문제를 떠올릴 수 있겠다.


그런데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의 저자인 박유하는 우리 국민의 일상적 반일의식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일제가 민족의 정기를 누르려고 전국 방방곡곡의 명산마다 박아놓은 '쇠말뚝'이라고 보았다.

신문 기사를 검색해보면 지리산과 남한산성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일제의 쇠말뚝을 뽑아내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성대한 행사가 개최 되었다.

쇠말뚝을 제거하는 사람들은 "일제가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명산마다 한민족의 정기를 끊으려고 아울러 명산으로부터 시작되는 민족 정기를 누르려고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쇠말뚝만 뽑읍면 민족정기가 살아나는가?

박유하는 '일제 쇠말뚝 사건'을 왜곡되고 맹목적인 반일 이미지 확대의 대표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의 반일 담론이 항상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고 논리적이기보다는 비약적이었으며 심지어는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허상을 둘러싼 비판"이었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일제의 쇠말뚝 뽑기'라는 것이다.

쇠말뚝 뽑기는 '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다'는 사실(事實)에 대하여 史實(사실)검증을 하지도 않고, 국민 모두가 사실(史實)로 믿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산에서 쇠말뚝을 뽑을 때마다 반일의식과 적대감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독립기념관에도 전시되었다가 지금은 수장고에 보관된 일제의 쇠말뚝에 대하여 박유하는 "문제는 쇠말뚝이 박혀 있었다는 점 자체보다도 누가 어떤 목적으로 박았는가?"를 규명하여야 하는데 이 일을 하는 사람들도,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역사적 검증을 시도하지 않고 기정사실로 받아드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

해방 60년이 훌쩍 넘은 올해도 정말로 일제가 박은 것인지, 무슨 목적으로 왜 박은 것인지에 대한 진실은 규명은 뒷전으로 밀어두고 '쇠말뚝 제거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최초의 증언인 백운산 산장 할머니의 증언(열여섯 살 때 일본인이 박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에만 근거하여 국가적 '운동'이 되고, 공무원들의 '실적'이 되었으며 유수한 신문과 방송매체를 타고 안방으로 전해져서 시청자들의 반일의식과 적대감을 키웠다는 것이다.


전국의 명산마다 발견되는 쇠말뚝 제거를 "한국은 '민족정기'라는 이름의 망령에 씌어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이름으로 전설과 소문을 사실(事實)화하여 사실(史實)이라는 '역사 새로 만들기'에 나서고 있었던 셈"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밝혀지지 않은 일본의 '의도성'을 조장함으로써 반일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박유하는 풍수설에 휘둘리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풍수설을 믿는다면, 수 센티미터 지름의 쇠말뚝보다도 산등성이 자체가 파헤쳐져 끊임없이 아파트로 변하는 상황부터 걱정해야"하며 "그 중에 '명산'은 없는지, 혹여 민족정기가 서린 '정수리'를 잘라내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하라"고 한다.

이이화와 같은 역사학자 역시 "민족정기 말살론에 대하여 근거가 없는 말이며 지도나 해도를 작성하기 위한 것"이었을 거라고 하였다는데, 근거 없는 풍수설에 현혹되어 더군다나 풍수설 자체를 믿지도 않으면서 아무런 의심 없이 반일 민족주의에 편승하여 분노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책을 읽는 도중에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심지어 "경부선 철길을 놓을 때도 평지 대신에 일부러 산허리를 끊어 철길을 놓았다"며 분노하던 풍수론자들이 전국의 산허리를 잘라서 만드는 고속도로와 고속전철을 왜 반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스님이 생명을 걸고 천성산 터널공사를 반대할 때에 '민족정기'를 걱정하는 풍수론자들은 왜 아무 말도 없었을까? 천성산의 민족정기와 관련이 없는 산이었을까? 고속전철을 타고 서울로 가다보면 수도 없이 많은 터널을 지나가게 되는데, 그 많은 터널은 '민족정기'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일까?


백두대간 산허리 끓는 일은 민족정기와 상관없나?

풍수설을 믿지 않은 많은 사람들과 나 같은 사람도 언제부터인가 일본이 우리나라의 '정기'를 끊으려 했다는 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일본을 부정적으로 보는 몇몇 지식인, 그들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왜곡을 확인하거나 의심하는 일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확대 재생산해온 언론매체, 그리고 그런류의 보도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 우리 자신이었다.
나 역시 이러한 과정에 편승하여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일본의 음모에 분노하며 내 안의 반일 민족주의를 키워왔던 것이다.
투철한 반공교육과 반일교육을 받아오면서 자라서 반공교육의 굴레는 힘겹게 벗어났지만, 반일교육의 틀을 벗어나보지는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일 민족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였던 것이다.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고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역사바로세우기를 받아들였고, <일본은 없다>를 보며 쾌감을 느꼈으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읽으며 민족의 자긍심을 느껴왔었다.


박유하의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를 읽고 나서야 '민족정기 말살'하는 쇠말뚝과 철심제거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고, 오래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읽으면서 느꼈던 쾌감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분풀이 소설'같은 끔찍한 일이 생기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박유하의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원래 <누가 일본을 왜곡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2000년에 출간되었던 책을 2004년에 제목을 바꾸어 다시 출간한 책이다. 평론가 김규항은 작가 박유하에 대하여 "이따금씩 괜찮은 학자를 만나면 그것처럼 반가울 수가 없다. 관점이나 의견에 차이가 나더라도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는 보는 눈만 있다면 충분히 기쁘다"고 평가하였다.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 보는 눈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를 읽다보면 일본에 대하여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볼 수 있는 눈을 키울 수 있다. 일제의 쇠말뚝 문제뿐만 아니라 총독부 건물 철거에 얽힌 '진실 혹은 거짓'(?)과 <노래하는 역사>의 허구성을 <일본은 없다>의 왜곡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황당무계함과 일본문화에 대한 편견과 오해와 무지를 깨닫게 되었다.

강제철거의 위기에 처한 재일동포 마을 우토로를 다녀오면서 만약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통쾌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70만 재일교포에게는 얼마나 '끔찍한'일이 일어날까를 상상하면서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박유하의 말처럼 미래를 위한 책이며, 타자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책이며 지금도 반일교육과 민족주의 교육을 받고 있는 젊은이들을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 지혜의 눈으로 타자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 2005년 11월에 오마이뉴스에 쓴 글을 조금 고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