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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술에 취해 서양사람 때린 죄, 사형 !

by 이윤기 2009.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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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역사,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역사는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다. 불과 100년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도 잘 알지 못한다. 수업을 통해 배운 100여 년 전 역사는 연도별로 일어난 굵직굵직한 사건을 외우는 것이 전부였다.

▲1871:신미양요 ▲1884:갑신정변 ▲1894:갑오농민전쟁 ▲1905:을사조약 하는 식으로 연도를 외우고 각각의 사건별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해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당연히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놀이를 하고, 어떻게 친교를 나누고, 어떤 문화 활동을 하며 살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기회는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100여 년 전 이 땅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서양인들의 삶이나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삶을 소개하는 <서양인의 조선살이>는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정성화와 로버트 네프가 쓴 <서양인의 조선살이>는 바로 구한말 한국에 체류했던 서양인들의 일상 기록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시기부터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주로 서울에서 거주했던 서양인들이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이 책은 구한말 한반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서양인들의 조선살이와 이 서양인들이 숨기고 싶었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 그리고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과 한국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간행된 대부분의 관련 서적들은 서양인이 한국을 방문해서 느낀 점이나 여행 중에 보고 들은 내용들 즉, 주로 관찰자의 입장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그에 비해 이 책은 서양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이 한국에서 실제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머리말 중에서)

서양인 눈에 비친 한국과 한국인, 어땠을까

기근과 불황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다양한 방식으로 여가를 보내고, 질병에 걸려 어렵게 치료를 받거나 혹은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희로애락을 상세히 추적하고 있는 책이다.

마치 일기를 보듯이, 혹은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을 보듯이, 친근한 이웃의 삶을 들여다보듯이 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수두룩하다. "이 책을 위해 필자들은 서양인들의 일상을 가급적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해외자료에만 의존했다"고 한다.

서양인들이 쓴 자서전이나 여행기는 물론이고, 해외에서 발행된 일간지 그리고 알렌 및 포크문서 등 다양한 필사본을 이용했다고 한다.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허드문서와 그레이 문서'를 비롯한 방대한 문서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라고 한다.

이 책 끄트머리에는 미국 도서관에서 찾아낸 귀한 원 사료와 20여종이 넘는 신문자료 그리고 6쪽 분량의 방대한 2차 자료목록 그리고 20쪽이 훌쩍 넘는 상세한 각주 600여 개가  달려 있다.

지은이들은 "구한말 외교문서를 수집하고 선교사들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문화를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사의 발굴이라는 공통의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거의 전적으로 서양인들이 남긴 자료에 의지하였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책보다 방대한 1차 자료에 근거하여 쓰여진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2천 명이 넘게 몰려든 스케이트 구경꾼

정동은 구한말 대표적인 서양인 거주 지역이었는데, 이는 초대 미국 공사인 루셔스 푸트가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서양인촌이 형성되었기 때문. 한국정부의 허가를 얻어 민씨일가의 집을 사비로 구입해서 미국공사관으로 이용했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 공사관이 부근에 신축되어 서양인촌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1895년 한국에서 출판된 첫 영어잡지인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에는 경북궁에서 열린 스케이트 파티를 소개하고 있다.

"1월 17일과 21일에는 왕비가 정동에 사는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경북궁에서 두 차례에 걸쳐 스케이팅 파티를 개최했다. 향원정에서 열린 이 스케이팅 파티는 사람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안겼다."(본문 중에서)

이 스케이팅 파티는 서양식 스케이트가 한국에 소개된 후 10여년이 지난 뒤에 궁궐에서 열린 파티라고 한다. 그보다 앞서 처음 국내에 스케이트를 소개한 사람은 미국 해군 필립 랜스데일과 윌슨 대위였다고 한다.

서양인이 스케이트 타는 것을 처음 본 한국인들에게 이 새로운 스포츠는 엄청난 구경거리였던 모양이다. 1886년 1월 미국 공사관 대리공사였던 포크는 자신이 스케이트를 타던 날 벌어진 일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다.

"십분도 안 되어 나를 보기 위해 수백 명이 사람들이 얼음 위로 몰려들어 실제로 길이 막혀 버렸다. … 다음날 나는 다시 연못으로 갔는데 내가 스케이트 타는 것을 보기 위해 거의 2천여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본문 중에서)

심지어 구경꾼들은 목수가 사용하는 대패와 손도끼를 가지고 울퉁불퉁한 빙판을 평평하게 다듬어주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돈을 내기도 했고, 간식을 팔기 위해 행상들이 몰려들었다는 것.

어떤 학자들은 "얼음 위의 예술" 또는 "발의 예술"로 불렀고, 일반인들은 "서양인 발 쇼"라고 불렀다고 한다. 100년 전 이땅에서 처음 스케이트를 탔던 서양인들의 인기는 요즘 피겨 스타 김연아 못지않았던 것 같다.

열강에 굴복하고, 자국민에게만 가혹한 정부

지금도 세계 최고의 술 소비량을 자랑하는 나라인데, 100여 년 전 서양인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과도한 음주로 인하여 폭행이나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개항 초기 한반도를 찾은 서양인들은 술취한 한국인의 모습을 많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고, 때로 취객들은 서양인들과 시비를 벌이기도 하였다는 것. 영국 공사인 존 조단과 고종 시위대 군인 간에 일어난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술에 취한 이 군인은 호의적인 마음으로 외국인에게 인사를 하러 다가가 상대가 받아들이기엔 과도하게 목을 세게 치며 반가움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 서양인들은 선의를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람을 가까운 경찰서에 인계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일을 처리하는 당시 한국 정부의 태도는 서글프고 기가 막힌다.

"외부대신은 조단 공사에게 즉시 사과하고 군부 역시 이 불운한 군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지나친 판결에 조단 공사가 오히려 놀랐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후에 이 불쌍한 군인의 형량은 10년 유배로 감형되었다."(본문 중에서)

또 다른 사건은 궁궐에 전기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경북궁에 전기 설비를 하던 미국인 기술자 월리엄 매케이가 그의 총을 살펴보던 한국인 젊은 군인의 오발 사고로 치료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사자인 매케이는 우발적인 사고였기 때문에 그 군인을 처벌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으며, 많은 미국인 동료들도 권총이 사고로 격발되었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외국의 간섭과 공세를 두려워하던 한국 조정은 이 군인을 하나의 본보기로 간주하고 즉시 체포했다. 그는 감옥에 투옥되어 호되게 매를 맞고 사형을 언도 받았다."(본문 중에서)

다행히 이 젊은 군인도 매케이 부인의 요청으로 죽음을 면했지만, 두 사건은 모두 서양 열강의 개입에 두려움을 느낀 힘없는 당시 한국정부가 자국민을 대상으로 저지른 가혹한 형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한편, 지금도 미군 범죄에 대한 재판권이 없는 이 나라는 100여 년 전에도 서양인 범죄자에 대한 재판권이 없었다고 한다. 외국인이 한국인이나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경우 한국 정부는 재판권이 없었고, 해당 국가의 영사들만이 자국민을 재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경인철도 공사 기술자로 온 '필립'이라는 미국인 총잡이가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휘두르고 총으로 상투를 맞혀 떨어트리는 난동을 부리는 일도 발생하였다.

한성판윤의 고충을 들은 알렌 공사가 이런 일이 재발하면 미국으로 추방하겠다는 경고를 하자, 필립은 "오랫동안 사격 연습을 하지 못해 걱정이 되어 그렇게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다양한 최초 기록을 모아 놓은 책

이 땅에 많은 근대문물이 서양인들을 통해 이 땅에 소개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양인의 조선살이>를 쓴 정성화와 로버트 네프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최초의 서양 상점 ▲서울에서 죽은 최초의 서양인 ▲최초로 스케이트를 탄 사람 ▲최초의 미국인 죄수 ▲처음 한국에 온 서양 여인 ▲최초의 치과 진료 ▲최초의 영어학교 교사, 핼리팩스 ▲최초의 외과 수술 ▲최초의 예방접종 ▲최초의 자전거 ▲처음 열린 야구경기와 축구경기 ▲최초의 자동차 ▲최초의 비행 ▲최초의 영화상영

그동안 국내에 널리 회자된 이야기는 한국인 중에서 처음으로 서양 문물을 만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는 안창남, 최초의 민간인 여류비행사는 박경원, 최초의 자전거 선수는 엄복동, 맨 처음 야구경기를 치른 YMCA 야구단 같은 식이다.

반면에, <서양인의 조선살이>에는 국적을 불문하고 이 땅에서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 자동차를 탄 사람, 비행기를 운항한 사람을 찾아 소개하고 있다. 최초의 축구경기는 1896년 말에 한국학생들과 영국 선원들 간의 경기이며, 최초의 야구경기는 1896년 미국 해병대원들과 서울 거주 미국인들 간의 시합이었다는 것이다.

구한말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경인 철도 부설을 주도하고, 외국인 거주 거리에 처음으로 가로등을 설치하며, 고종의 요청에 따라 궁궐에 전기를 공급하는 등 새로운 문물을 전하는 진취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서, 혹은 동양의 새로운 땅에서 경제적 부를 얻기 위하여,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100여 년 전, 이 땅을 밟은 서양인들 중에는 이런 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한국 침략을 영국신문에 보도하다 해임된 베델과 같은 언론인도 있었고, 근대교육 발전에 이바지한 언더우드 가문도 있었으며, 이준 열사와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데 참여한 호머 헐버트와 같은 이도 있었다.

전적으로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문 자료에 근거한 <서양인의 조선살이>는 오늘을 사는 독자들의 짐작보다 훨씬 자세하게 구한말 한반도에서 살았던 서양 사람들의 일상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