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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기타, 교양

독립군 홍범도장군, 극장 청소부로 초라한 죽음

by 이윤기 2009.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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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슬픈 유랑자들, 연해주 고려인 리포트'라는 부제가 붙은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는 고려인돕기운동의 자원봉사자로 2001년부터 연해주 크레모보 고려인 정착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재영·박정인 부부가 만난 연해주 고려인 동포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은 그들 부부가 만난 고려인 동포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물이다.


단지 먹지 못해 팔과 다리가 구부러진 '서 와짐'과 '제냐'가 살고 있는 곳, 러시아 사람들에게 모종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맞아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사는 '허 니나' 아주머니가 사는 곳.

병원한 번 못가보고 죽어가는 남편을 지켜보아야했던 '김 아나스탸샤' 아주머니가 사는 곳, 윤간을 당하고 정신을 놓아버린 스물세 살 꽃다운 처녀 '엘레나'가 살아가는 절망의 땅 연해주의 이야기.


마음의 눈이 닫히지 않은 독자라면 표지 사진은 물론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주하는, 깊은 주름이 팬 고려인 동포들의 삶의 질곡이 묻어나는 흑백 사진들 위로 "죽지못해 살아가는" 질기고 모진 목숨에 얽힌 사연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1부, '고려인 그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는 연해주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가난과 이방인이 겪는 비통한 사연들이다. 정말이지 우리가 같은 세기를 살고 있는 같은 민족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기막힌 일들이 벌이지고 있었다.

"연해주 고려인 정착촌 이주민들은 수도는 물론, 난방조차 되지 않은 오래된 군용막사에서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시베리아의 찬바람을 오로지 맨몸으로 이겨내고 있다."
"봄이 되어 밭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지을 때도 기계 하나 없이 맨손으로 얼어붙은 땅을 일군다."(본문 중에서)


지은이 김재영의 이야기다. 그는 운명처럼 연해주 고려인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 4년의 세월을 보냈고, 지금도 여전히 그 곳에 살고 있으며 이제는 그 땅을 떠날 수 없을 것 같다고 한다.

그렇게 연해주 크레모보 고려인 정착촌에서 살아가던 젊은 부부는 지마와 지나라는 이름의 고려인이 되고 만다. 마침내 고려인 동포들과 함께 고려인으로 살게 된 것이다. 지마는 '드미뜨리'의 애칭이고 지나는 '지나이다'의 애칭이라고 한다. 그들의 이름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이주해온 '리 나리사' 할머니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 1937년 강제이주의 출발역이었던 '자즈돌노예' 역 
 

고려인, 그들은 누구인가. 연해주에는 지금도 1만여 명 정도의 고려인이 무국적자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1863년부터 가난과 수탈을 피해 굶주림을 면하고자 농사를 지으러 간 이들이고, 징용과 정신대를 피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 걸고 피 흘리며 싸우던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이다.


1920년대 항일무장 투쟁의 지도자 홍범도 장군, 이등박문을 죽이고 사형당한 안중근,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친 이상설, 이동녕 등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싸우던 이름 없는 독립군 병사들이 그들의 부모들이다.

홍범도 장군, 카자흐스탄 극장 청소부로 살다 죽었다.

역사책에도 나오는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홍범도 장군이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어 그곳 극장의 청소부로 말년을 보내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독립훈장을 받은 애국지사 최재형의 딸이 최 류드밀라 할머니의 "돌아갈 곳이 없어 (여기)이러고 산다." 이야기는 그들에게 조국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1937년 스탈린의 소주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연해주에 살던 18만여 명의 한인을 하루아침에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로 몰아넣었다. 강제 이주를 시작하기 전에 2500여명의 한인지도자들이 처형되었고, 강제 이주 과정에서 수많은 고려인이 굶주림과 추위, 전염병 그리고 왜 가야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묻다가 흔적도 없이 죽어갔다고 한다.

연해주 고려인의 강제이주 역사는 이 책뿐만 아니라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도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화물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 일어나는 처참한 죽음의 기록과 중앙아시아 불모의 사막을 농토로 바꾸는 고단한 삶의 기록이 고스란히 씌어있다. 이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1988년 올림픽이 열릴 때 비로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조국에서 가난과 굶주림, 징용과 정신대를 피해 연해주로 '강제이주'했던, 고려인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고, 구소련이 해체된 후에는 55만여 명의 고려인들이 독립국가의 자국민 우월정책에 떠밀려 또 다시 6000km나 떨어진 연해주로 강제 이주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연해주로 돌아온 이들은 러시아 국적이 없어 의료와 연금의 혜택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취업도 할 수 없으며, 러시아인들의 부당한 폭력과 살인을 당하고도 누구에게 하소연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 라즈돌로예 역에서 바라 본 시베리아 철길 - 이 철길을 따라 18만 명의 고려인들이 화물열차에 실려 40일 동안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며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필자는 2005년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러시아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만약 연해주에 가기 전에 이 책을 읽고 갔었다면 그 때 만난 고려인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이 책에는 지난 140년간 가장 골 깊은 수난의 시대를 살고 있는 러시아 재외동포인 '고려인'들에 관한 삶의 기록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강제이주의 역사가 1937년 스탈린 시대에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국을 대신해서 연해주 고려인들을 끌어안기 위하여 책을 쓴 김재영 박정인 부부는 처제와 함께 고려인 정착촌에서 살아가고 있다.

참 다행인 것은 부족하기는 여전하지만 많은 분들이 러시아 연해주에서 힘겹게 삶을 지탱하는 고려인 동포들의 삶을 붙들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말미에는 조국을 대신하여 참회와 공존의 삶을 실천하는 자원봉사자들과 후원단체의 활동이 소개되어 있다. 조국에 살아가는 모두는 그들에게 진 빚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05년 러시아 여행 때 읽은 책입니다.
※ 2006년 2월 오마이뉴스에 쓴 글을 고쳐서 다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