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는 아주 오래전부터 제목은 잘 아는 책 이었으나 내용은 모르는 책이었다. 암기식 교육의 세례를 온 몸으로 받아 부지런히 저자와 책제목만 외운 탓이다.
인류역사를 대표하는 열명의 사상가가 쓴 책 중 한 권으로 <유토피아>를 소개해준 이는 바로 황광우이다. 그가 쓴 <철학콘스트>를 읽음으로써 유토피아를 소개 받았다. 황광우가 꼽은 열 명의 사상가 중에서 토마스 모어와 그가 쓴 책 <유토피아>를 고른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황광우가 <철학콘스트>에서 짤막하게 소개한 내용을 보며, 진보주의자들이 바라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꿈이 <유토피아>로부터 시작 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다른 아홉 명의 사상가들이 쓴 책에 비하여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가 가장 쉬울 것 같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가 라파엘 히드로다에우스라고 하는 학자를 만나 산업혁명초기의 영국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다. 라파엘은 당시 사회제도에 반대되는 여러 가지 주장을 내놓게 되는데, 그것은 주로 그가 5년 동안 살다온 '유토피아'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대부분 잘 알고 있는 "양이 사람을 잡아먹고 있다"는 비유는 절도죄에 대한 가혹한 형벌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법은 절도 등에 대하여 교수형으로 처벌하고 있었다. 라파엘은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서도 절도범죄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처벌로서는 너무 가혹하고 억제책으로서는 매우 비효과적입니다. 가벼운 절도죄는 사형을 받을 만큼 나쁜 것이 아니며, 또 그들이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은 훔치는 길 밖에 없다고 한다면, 아무리 엄벌을 가해도 절도를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본문 중에서)
그는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양'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아주 조금밖에 먹지 않는 양이 사나운 식욕을 갖게 되어 사람은 물론, 들과 집과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양식을 훔치는 도둑은 엄벌로 막을 수 없다.
독자들도 잘 아는 것처럼, 값비싼 양모를 산출하기 위하여 귀족과 지주 그리고 수도원들이 앞 다투어 그들의 경작지에서 농사를 짓지 않고 양을 키우기 위한 목초지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집과 마을을 철거하게 되고 결국 수백 명의 농민들이 축출 당하였다는 것이다.
농지에서 쫓겨난 이들은 부랑자로 떠돌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가거나 혹은 남의 것을 훔치다가 교수형을 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곡식 값은 비싸지고 양모 값이 오름에 따라 모직물을 짜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일에서 쫓겨나게 되어 농민들과 같은 신세가 된다고 한다.
말하자면 귀족과 지주들의 탐욕이 결국 많은 농민들과 수공업자들을 교수대로 보내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귀족과 지주들이 도둑을 만들어내고, 그들이 도둑질을 하고 있다고 처벌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오백년이 지난 오늘날 토마스 모어가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견한 이런 모순은 어떤 면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훨씬 더 복잡한 사회구조를 통해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귀족과 지주 대신에 자본가들이 수많은 노동자들을 일터에서 쫓아내 도둑을 만들고, 그들이 만든 법률이 그 도둑을 처벌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라파엘은 절도에 대한 극형을 반대하는 이유와 어떤 처벌이 공익을 위해 더 바람직한가를 묻는 추기경의 질문에 대하여 형벌의 오히려 경감이 범죄를 줄일 수 있다고 답한다.
"각하, 약간의 돈을 훔쳤다고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무리 많은 재산이라도 인간의 생명과 맞먹을 수는 없습니다. 만일 돈을 훔쳐서가 아니라 법을 깨트리고 정의를 어겼기 때문에 처벌된다고 말씀하신다면, 이 절대적인 정의라는 개념은 절대적으로 공정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본문 중에서)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인용하여, 약간의 돈을 훔쳤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으며, 자살하는 것조차 금지한 것을 고려하면 인간 상호간의 살육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절도죄에 대한 극형 처벌은 절도범으로 하여금 범죄 과정에서 쉽게 살인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사형제 폐지와 관련한 분명하고 타당한 근거 중 한 가지를 오백년 전에 씌어진 <유토피아>에서 발견하게 된다. 사형제 폐지나 대체 복무제 도입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십계명을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까? 토마스 모어는 신약성서가 구약성서보다 인간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잔인한 행위를 더 많이 허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왕과 양치기의 사명은 다르지 않다
왜 인민들이 왕을 세웠는가, 왕의 사명은 무엇인가에 대한 <유토피아>의 견해는 대의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에도 상당부분 유효해 보인다.
"(인민들이 왕으로 삼은 것은)폐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폐하가 전심전력을 다하여 그들의 생활을 안락하게 만들어주고, 그들을 부정으로부터 보호해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폐하의 사명은 폐하 자신이 아니라 인민의 안녕을 돌보는 것입니다. 마치 양치는 사람의 사명은 엄밀히 말해서 그 자신이 아니라 양을 먹이는 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본문 중에서)
그는 인민들 가난하게 만들어서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부유하게 만들어야 평화를 유지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왕은 건전한 통치로 범죄를 예방해야 하며, 범죄를 방치하고 처벌을 일삼아서는 곤란하며, 폭력과 착취 없이 인민을 복종시킬 수 없다면 왕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주장한다.
아마, 이런 그의 철학이 훗날 헨리 8세로부터 반역죄로 사형을 언도 받아 “내 목은 대단히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맞게 하였으리라.
제 2권은 새로운 세계 유토피아에 대한 훨씬 구체적이고 상세한 서술들이 이어진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유토피아를 읽어 내려가면 오백 년 전에 꿈꾸었던 이상사회가 여전히 우리에게 아직도 미래라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토지 공개념과 노동시간 단축이 주민의 행복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유토피아에서 토지는 재산이 아니며 경작해야 할 땅이다."
"유토피아에서는 누구나 2년간 농사를 지어야 하며, 농업은 만인의 직업이다."
"노동자는 하루에 6시간 일하며 나머지 시간은 교육과 여가에 사용한다."
하루 6시간 동안만 일하고도 충분한 사회적 생산을 유지할 수 있는 유토피아인들이 노동력을 줄이는 비결은 바로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것으로 가능하다. 그들은 낡은 집을 헐고 새집을 짓는 일에 노동력을 낭비하는 대신에 선조들이 물려준 집을 오랫동안 고쳐서 사용하고, 많은 옷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치 간디나 소로우와 같은 자연주의자들의 모습과 비슷한 면이 있다. 아니 어쩌면 간디나 소로우가 <유토피아>를 읽고 깨달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6시간 노동, 과연 무엇이 행복인가?
하루 6시간만 일하고도 충분한 생산과 소비를 유지할 수 있는 또 다른 비결은 놀고먹는 사람을 줄이는 것이다. 공무원이 하는 중요한 일이 놀고먹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며, 유토피아에는 여자도 일을 하고 성직자, 지주, 귀족 그리고 거지와 같은 자들이 아주 소수이거나 없기 때문이다.
옷 한 벌을 2년 동안 입는 그들은 "옷이 많다고 해서 더 따뜻한 것도 아니고 더 잘나 보이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아무리 좋은 양털 옷을 입어도 그 옷을 처음부터 입고 있던 것은 양이기 때문에 결코 양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다.
집이나 옷과 같은 소비재뿐만 아니라 사치재에 대한 생각 또한 다르다. 그들은 금이나 은이 지닌 가치가 사실은 ‘철’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금이나 은이 가진 희소가치에 대한 바보스러운 관념만 없다면 그것이 없어도 편안히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모어는 ‘라파엘’의 입을 빌려 '독서와 교육'을 통해 유토피아인들이 이런 사상을 갖게 되었다고 말 한다. 또한 유럽인들과는 전혀 다른 사회제도 밑에서 내어나 자랐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오늘날 평생교육이라고 말하는 교육과정에 속해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노동과 학습은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균형잡힌 삶을 추구하였던, 미국의 자연주의자 스콧 니어링, 헬렌 니어링 부부의 생활방식도 <유토피아>로부터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유토피아에서는 오늘날 매우 발전된 지방자치제와 비슷한 모습도 볼 수 있다. 시민은 30세대가 한 그룹이 되도록 구분되어 ‘시포그란투스’라는 공무원을 선출하고, 300세대를 대표하는 ‘트라니보루스’라는 공무원을 선출한다. 한 도시에는 2백 명의 시포그란투스가 있으며 그들이 시장을 선출한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선거에 입후보자는 과대한 자기선전을 할 수 없고, 심지어 그것은 입후보자격을 영원히 잃게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출직 공직자는 국민의 도덕적 양심에 의한 엄격한 판단을 통해서 선출되고 선출된 다음에는 국민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주민의 대표를 선출하여 중요한 의사결정을 한다는 것이 지금은 당연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주민이 참여하는 본격적인 지방자치의 역사가 20년이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해본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오늘날 지방의회의 회의와 의사결정 수준이 오백 년 전에 꿈꾸던<유토피아>에 비하여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오백 년 전에 꾸던 꿈이라는 한계는 여러 곳에 존재한다. 유토피아는 여전히 노예제도에 의하여 사회적인 기피노동을 대신하는 사회이며, 혼전 성교에 대한 엄격한 처벌과 같은 가부장적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건강한 사회의 필수조건이 재산의 균등한 분배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는 것과 사유재산의 폐지가 공평한 재산 분배와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사는 기초가 될 것이라는 상상력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는 다수의 인민들이 더 많은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오백 년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여전히 의미 있는 저작임에 틀림이 없는 듯 하다. 하루 6시간만 일하고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유토피아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과연 무엇이 행복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새롭게 시작해보지 않을 수 없다.
유토피아 - 성 토마스 모어 지음, 황문수 옮김/종합출판범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