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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생명, 평화

독재와 분단의 상처를 뛰어넘은 평화의 노래

by 이윤기 2009.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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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박선욱 글 김태환, 그림<윤이상, 끝없는 음악의 길>


윤이상, 남한 땅에서는 오랫동안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금기시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1996년, 아직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쉽게 말할 수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소설가 윤정모는 그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제목으로 소설 <나비의 꿈>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98년에는 윤이상 선생의 아내 이수자가 쓴 <내 남편 윤이상>이 한국에서 출판되었습니다. 근년에 들어서는 윤이상 선생의 삶과 음악을 소개하는 책들이 다투어 출간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업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출판사들도 마침내 그의 삶을 조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한국사회의 변화, 남북관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이미 윤이상 선생이 고인이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고인이 된 윤이상 선생의 음악과 세계적인 브랜드로서 ‘상품가치’가 높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불온(?)한 생각도 떨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의 삶과 예술에 관심을 갖고 그의 전기를 읽는 것처럼, 윤이상 선생의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또 그의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는 어린이들에게도 윤이상 선생의 삶을 전하는 일은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인 것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런 비슷한 생각으로 도서출판 산하가 박선욱의 글과 김태환의 그림으로 어린이를 위해 만든 윤이상 선생의 전기 <윤이상, 끝없는 음악의 길>이 출간되었지 싶습니다. 이 책은 산하 어린이 문고 중에서 147권 째로 기획 출판된 인물이야기 책입니다.

이 책을 어린이들에게 소개하면서 황병기 교수는 윤이상 선생을 ‘진주조개’에 빗대어 소개하였습니다.

“아픔을 피하지 않는 인내와 고통마저도 보듬어 안는 큰사랑이 눈부신 진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윤이상 선생은 바로 진주조개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일제의 지배와 분단, 가난과 편견이라는 모진 시련 속에서도 선생님은 고통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책 소개 중에서)

동베를린사건과 이후 이어진 해외민주화운동으로 고국의 권력자들에게 핍박받고 외면당하였을 때에도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상처를 너끈하게 끌어안았고, 오히려 이를 빼어난 음악으로 탈바꿈 시켰습니다.

독재권력도 막지 못한 음악에 대한 열정

1917년 산청에서 태어난 윤이상 선생은 보통학교 3학년 때 눈으로 악보만 보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음악적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열세 살 무렵에는 이웃 청년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자신의 곡을 연주하고 싶은 욕심으로 작곡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선생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아버지의 반대로 여러 번 벽에 부딪쳤으나 끝내 아버지도 그의 열정을 꺾지는 못하였습니다. 서울의 상업학교를 그만 둔 윤이상 선생은 에케르트의 제자인 최호영 선생을 만나 음악 공부를 이어 같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음악공부를 하기 위하여 일본 유학을 떠난 윤이상 선생은 상업학교와 음악학교를 동시에 다니면서 음악공부를 하였으며, 이 시절 동베를린 사건의 단초가 된 최상한과 함께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하였다고 합니다.

한편 일제 치하에서는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였고, 일본 헌병의 추적을 피해 해방이 될 때까지 숨어살았습니다. 한국전쟁을 거치는 혼란의 시기에는 결핵과 맞서 싸우는 투병생활 중에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습니다.

음악에 대한 불같은 열정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유럽 유학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게 하였고, 프랑스를 거쳐서 독일 베를린 음악대학에서 현대음악을 공부하게 됩니다. 독일 베를린 음악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독일과 네덜란드의 유명한 음악제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음악가로서 자리매김을 시작합니다.

윤이상 선생은 1958년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후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작으로 초연된 오페라 <심청>으로 빛을 발하게 됩니다. 1988년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으로부터 수여 받고, 1992년 함부르크자유예술원의 ‘공로’상을 수상한 데 이어 1995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괴테상을 수상하는 등 유럽 사회에서 세계 음악가로서 최고의 명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민주화와 통일을 향한 여정

음악에 대한 40여 년의 열정이 마침내 독일 땅에서 꽃피기 시작할 무렵인 1967년 윤이상 선생은 한국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하여 서울로 납치되어 이른바 동베를린 사건으로 간첩으로 몰려 1심에서 종신형, 2심에서 15년, 2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감옥생활의 고통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고문과 회유와 협박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하면서 감옥에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완성하게 됩니다.

독일 정부와 해외 예술가들의 도움으로 풀려난 윤이상 선생은 독일로 돌아가서 음악적 열정을 불태움과 동시에 중앙정보부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에 짓밟히는 분단된 조국과 민중들을 위한 활동에 나서게 됩니다.

‘궐기와 학살’, ‘진혼’, ‘재행진’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광주여 영원히>는 광주학살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이라고 합니다.

“윤이상은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납치와 감금, 고문을 당하고 죽음의 벼랑 끝에 서게 된 일도 따지고 보면 남북 분단이 빚은 비극이라고 생각했습니다.”(본문 중에서)

1987년 남북음악회 개최 제의, 1990년 평양에서 열린 통일음악회 등은 모두가 통일을 앞당기는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음악가의 열정으로 이루어낸 일들입니다. 1995년 윤이상 선생은 끝내 살아생전 꿈에 그리던 고향 땅을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윤이상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아 그의 고향 통영에서는 매년 윤이상 국제음악제가 열리고, 서거 10주기에 즈음하여서는 남한에서 윤이상 평화재단이 설립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2006년 1월 국정원의 과거사진상위원회는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이 터무니없는 조작이었음을 밝혔습니다.

지난 7월 20일에는 윤이상 평화재단 주최로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었던 현대 한국예술계의 거장,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노 그리고 시인 천상병을 기념하는 행사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개최되었다고 합니다.

60년이 지나도록 아직 분단의 질곡과 아픔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아이들에게 독재와 분단을 뛰어넘어 평화를 노래하는 음악가 윤이상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1년 전에 세상을 떠난 통영 출신의 한 탁월한 음악가가 전 세계의 음악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예술인으로 기억된다는 것을 가감 없이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윤이상, 끝없는 음악의 길>박선욱 글, 김태환 그림/ 도서출판 산하 - 204쪽,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