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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영화 암살, 그는 왜 "밀양 사람 김원봉"이라고 했을까?

by 이윤기 2015.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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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밀양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영화 암살과 약산 김원봉'을 주제로 지난 9월 15일 개최된 마산YMCA 제 67회 아침논단의 후속 행사였습니다. 지난 9월 아침논단에 강사로 오신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최필숙 사무국장의 강연을 들었던 YMCA 회원들이 강의를 듣다보니 밀양 현장을 한 번 가서 직접 보고 이야기를 더 들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면서 준비되었습니다. 


영화 암살이 흥행에 성공한 이후 더욱 바쁜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최필숙 선생님이 답사 일정을 준비해 주셔서 11월 7일(토) 아침 일찍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서 답사 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전날부터 추적추적 내린 가을비 때문에 답사를 하기엔 여간 번거롭지 않았습니다만, 워낙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라 비를 탓할 수도 없는 날이었습니다. 


오전에 밀양독립운동기념관과 밀양 출신 친일파의 상징물이 남아 있는 영남루, 최수봉 열사가 폭탄을 던졌던 옛 밀양경찰서 터와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 생가와 역시 의열단 주역 이었던 석정 윤세주 생가가 있는 밀양 내이동 일대 그리고 김상윤 열사와 최수봉 열사의 기념비를 둘러보았습니다.



독립운동의 메카, 밀양 내이동

똑똑한 동네 형들 따라...마을 청년들 모두 독립운동의 길로 


당초 일정에는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약산 김원봉의 아내였던 박차정 여사 묘소 참배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만,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내린 비 때문에 답사를 포기하였습니다. 열정이 넘치고 정이 넘치는 최필숙 사무국장님 흥미진진한 현장 강의를 들으면서 답사를 하였기 때문에 아침논단에서 강의로만 들을 때보다 훨씬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는 바로 약산 김원봉과 석정 윤세주의 생가 터가 있는 밀양시 내이동 답사였습니다. 약산 김원봉은 영화 암살이 흥행하면서 세간에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입니다. 일제가 가장 많은 현상금을 내 걸었던 가장 체포하고 싶어하였던 독립 운동가였습니다.  


밀양시 내이동은 바로 그 약산 선생이 태어난 동네이고, 밀양 출신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이 동네 출신들이라고 합니다. 체 게바라에 버금가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선생 생가 터인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 그곳에는 최근 완공된 콘크리트건물이 세워져 있었고, 바로 오른쪽 뒷편(내이동 880번지) 작은 골목길 너머로는 석정 윤세주 선생의 생가인 나지막한 기와집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윤세주 선생이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화북지대로 옮겨가 태항산 전투에서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가장 가까운 동지로 지낸 약산 김원봉과 석정 윤세주는 동네 형-동생 사이였다고 합니다. 1910년 대의 마을 모습을 떠올릴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불과 10여미터 거리에 있는 이웃집 형이 김원봉이었고, 이웃집 동생이 바로 윤세주였더군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의열단의 핵심이었던 김원봉과 윤세주 선생 말고도 밀양 내이동 출신 독립운동가가 10여 명이나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최필숙 선생님이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알려주었는데, 고인덕, 김대지, 김병환, 황상규, 윤치형, 전홍표 선생 등이 모두 밀양 내이동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예컨대 똑똑한 동네 형(?)들 따라 모두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던 셈입니다. 



영화 암살, 왜 하필 "밀양 사람 김원봉"이라고 소개 했을까?


이날 밀양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하면서 지금은 작은 지방 도시인 밀양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도시가 바로 밀양이더군요. 밀양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된 까닭을 물었더니,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밀양에 부산, 경남 일대에 가장 먼저 신식학교가 세워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튼 답사를 함께 하던 일행들은 왜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이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하고 자신을 소개했는지 알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냥 "나는 김원봉이요"하고 소개하지 않고, 자신의 고향과 함께 자신을 소개한 것은 어쩌면 '밀양 사람'이라고 하는 어떤 특별한 자부심 같은 것이 담긴 표현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분을 당시에는 자신의 고향이나 출신지를 앞세워서 소개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을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지금처럼 직장이나 직책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도 제가 일하는 단체에서 전국에서 활동가들이 모이면 어느 지역에서 지역명을 앞세워 자신을 소개하는 일이 흔하기는 합니다. 




어쩌면 실제로 김원봉 선생이 자신을 소개할 때 열혈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담아 밀양사람이라고 소개했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가 담겼을 수도 있습니다 밀양이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김원봉이 자신을 소개하는 대사에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하는 대사를 넣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충분이 설득력 있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은 고향을 앞세워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데, 유독 김원봉만 고향을 앞세웠습니다. 다른 이들은 어느 부대출신이다, 어느 단체 소속이다 하는 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는데, 유독 김원봉만 자신을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하고 소개하지요.


최필숙 선생님처럼 오랫 동안 밀양독립운동사 알리기 위해 애쓴 분들은 영화를 보다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하는 대사를 들었을 땐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감동과 전율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서 최필숙 선생님의 현장 강의를 듣다보니 밀양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이라는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밀양시 내이동은 그야말로 독립운동 메카 중의 메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을 낳은 동네를 지금처럼 허접한 기념 사업으로 방치하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성의한 독립운동 기념사업과 독립운동가 생가 복원 및 기념 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