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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연구/학술자료

근대 민주주의 정치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by 이윤기 2023.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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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민주주의 정치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이윤기(정치외교학과 2022230029)

 

Ⅰ.서론
Ⅱ. 사회계약론
  1. 사회계약론
  2. 홉스, 로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차이점
  3. 소결: 사회계약론의 의의
Ⅲ. 프랑스 혁명과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 비판
  1. 프랑스 대혁명
  2.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 비판
  3. 소결: 에드먼드 버크에 대한 비판적 견해
Ⅳ.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1.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2. 막스 베버에 대한 비판적 견해 
Ⅴ. 맺음말
Ⅵ. 참고문헌


Ⅰ.서론

근대는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철학적으로는 합리주의의 시대이다. 근대를 낳은 대표적 사건은 근대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한 영국의 산업혁명, 정치적으로는 프랑스대혁명, 철학적으로는 독일 관념론과 영국 경험론의 등장이다. 관념론은 ‘이성’을, 경험론은 ‘경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다른 철학이지만 신학적, 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서 인간의 지성(이성)을 진리의 중심으로 보고 이에 대해 탐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역사학적으로 근대의 시기 구분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특히 근대의 시작을 언제부터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異論)이 있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연구>(1946)에서 근대를 1)early modern(르네상스 14~15c), 2)modern(르네상스의 전성기 및 이후 15c~16c), 3)late modern(17c~19c초), 4)post modern(19c말 이후)로 구분하였다. 
헤겔은 '근대'를 종교개혁, 시민사회, 계몽 등에 의해 특정되는 시대라고 보았다. 헤겔의 생각을 정리하면, ①종교 개혁에 의한 사상적 자유, ②시민사회의 성립에 의한 사회적 자유, ③ 개인들이 각자의 목적을 마땅히 자유롭게 추구하는 자유 등을 이야기 하였다.
민주주의, 인권, 자유, 종교의 다양성 등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가치들은 모두 근대와 함께 탄생했다. 근대의 이 혁명적 기획은 왕정과 종교가 주장하는 전 시대의 진리에 대한 이성적 도전과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근대의 기획은 사회를 개혁하는 창조적인 작업이었으며 자유, 그중에서도 지적 자유에 대한 약속과 요구를 전제로 했다. 특히 자연과 사회가 합리적인 질서를 갖고 있으며, 경험적인 관찰과 이성적 사고를 통해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근대 사상이 불러온 새로운 생각이었다. 오늘날 세계는 근대의 산물이다. 

Ⅱ. 사회계약론

1. 사회계약론
사회계약론은 왕과 신이 지배하던 세상을 벗어나는 계몽 시대의 산물이다. 아리스토텔레서의 목적론적 세계관이 해체되기 시작할 때 사회계약론이 등장한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Leviathan:통치자)을 출간한 1651년부터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출간된 1762년에 이르는 한 세기는 사회계약론의 시대였다. 홉스와 로크가 사회계약론을 주장한 역사적 배경에는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에서 왕당파와 의회파, 토니당과 휘그당의 싸움이 있었다. 홉스가 1651년에 발표한 리바이어던은 정치철학에 있어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 저서로서,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계약이론에 의거해서 국가권력을 정당화하였다. 
로크는 통치론을 1690년에 출판한다. 명예혁명은 1688년에, 권리장전은 1689년에 만들어졌다. 권리장전은 의회의 동의없는 법률집행 및 과세, 그리고 상비군 징집을 금했다. 통치론 출판은 명예혁명 이후였지만, 실제집필은 존 로크가 네덜란드로 피신해있던 시기였다. 토마스 홉스와 존 로크의 사회계약론은 17세기 영국 스튜어트 왕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17~18세기 부르봉 왕조와 관련이 있다. 이 시기 프랑스는 루이 13세, 루이 14세의 절대주의 왕권시절이다.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왕권신수설에 기초한 절대군주의 시대였다. 이 시기 절대 왕정은 18세기의 루이 15세, 루이 16세 시대를 거쳐 1792년 프랑스 혁명으로 붕괴된다. 프랑스 혁명 이념은 여러 계몽사상가의 영향을 받았는데, 루소의 인민주권론도 혁명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사회계약론자인 홉스, 로크, 루소의 이론은 자연상태론, 사회계약론, 국가론 등에서 서로 다르며, 자연상태의 내용에 대한 차이는 사회계약의 내용 차이로 나타나고, 이는 사회계약으로 설립된 국가와 정치권력에 대한 설명도 달라진다. 

2. 홉스, 로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차이점
1) 홉스의 자연상태론
홉스의 자연상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이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모두가 평등 하지만 재화의 한정성 때문에 경쟁이 불가피하고 공통의 권력이 없기 때문에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에 빠진다는 것이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공동체 감정이 없으며, 따라서 법이 없는 전쟁상태이며 ‘자기보전’을 추구하게 된다. 홉스의 자연권은 제1의 자연법 평화를 추구하라, 제2의 자연법 자연권을 포기하라, 제3의 자연법 신의계약을 맺었으면 지켜야한다로 요약된다. 
2) 로크의 재판관 부재
존 로크의 자연상태는 사람들이 타인의 허락을 구하거나 그의 의지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법의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규율하고 자신의 소유물과 인신을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상태이다. 아울러 자연상태의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독립된 존재이므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또는 소유물에 위해를 가해서는 안된다는 자연법이 지배한다. 그러나 이러한 로크의 자연상태에는 큰 결함이 있는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침해 당했을 때 적용할 수 있는 실정법이 없고, 호소할 수 있는 재판관이 없으며, 이를 집행할 수 있는 권력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연법의 위반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 그 법의 위반자를 처벌할 권리를 가진다. 자연상태는 언제나 전쟁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와 다르지 않다. 
홉스의 자연상태가 가지는 문제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지만, 로크의 자연상태가 가지는 문제는 권리들의 충돌가능성과 그것을 조정할 권위의 부재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로크가 홉스와 다른점은 재산권을 자연권으로 주장한다는 것인데, 소유권의 정당화를 자연상태에서 시도한다는 것이다. 로크는 모든 사물에 다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노동이라는 ‘노동가치설’을 주장하였다. 
3) 루소의 이상적인 자연상태
인간은 태어나면서 선하고 사회는 그를 타락시킨다는 것이 루소의 기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자연상태는 인간의 사회성에 의해 곧 사회상태로 전환한다. 루소에 따르면 사회계약을 통해 자연상태가 아니라 힘의 논리에 지배되는 사회상태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루소는 사회상태를 통해 인간이 타락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홉스와 로크의 사회계약론이 사회계약을 통해 자연상태를 극복하려고 시도했다는 것과 크게 다르다. 루소는 소유권 출현을 인간 불평등의 기원으로 보았고, 이는 로크가 소유권을 자연권으로 규정했던 것과도 상반된다.
4) 홉스와 신의계약
홉스에 따르면 인류 평화를 위해 자연상태의 모든 인간은 자기보존의 자연권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방식으로 포기해야 한다. 정의의 본질은 유효한 계약을 지키는데 있으며, 계약의 유효성은 이행을 충분히 강제할 수 있는 사회적 권력의 수립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상태를 통제할 수 있는 주권자를 세우고, 그에게 모든 권력과 힘을 양도하여 그로 하여금 주권적 권력을 행사하게 하는 주권 설립의 계약이다. 이때 양도를 통해 권리를 포기한 자는 권리를 양도받은 자의 권리행사를 방해하지 않을 의무가 있다. 주권의 설립을 통해, 모든 백성은 주권자의 모든 행위와 모든 판단의 ‘본인’이 된다. 홉스는 신의계약에 의해 세워지는 주권자의 권리를 막강하다고 묘사한다. 주권자는 사법권을 가지며, 전쟁 또는 강화할 권리가 있고, 고문관, 장관, 행정관, 관리를 선임할 권리를 가지며 법을 제정하여 재산이나 영작으로 상을 수여하거나, 신체형, 재산형, 작위 박탈 등으로 처벌할 권리가 있다. 이때 주권자에 대한 백성의 의무는, 백성을 보호할 수 있는 권력이 주권자의 손에서 지속되는 한, 그리고 오직 지속되는 동안에만 계속되는 것이다. 
5) 로크의 신탁계약 
로크는 통치론에서 정부의 목적을 각 개인이 정치사회를 수립하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자연권을 더욱 안전하게 보장하는 데서 찾았다. 자연상태의 인간이 사회계약을 체결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생명, 자유, 재산을 보존하기 위함인데, 시민사회에 가입하여 어떤 국가의 구성원이 된 사람은 모두 자신의 사적인 판단에 따라 자연법의 위반행위를 처벌할 권리를 포기한다. 국가는 입법권, 집행권, 연합권을 가지며, 주권은 여전히 국민에게 있다. 어느 누구도 사회 자체의 동의나 사회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은 자의 동의 없이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입법권은 단지 신탁된 권력이므로 입법부가 신탁에 반해서 행동하는 경우 입법부를 폐지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최고권력은 인민에게 있다. 모든 권력은 신탁으로 부여되기 때문이다. 로크가 주장하는 인민의 저항권은 폭정에 대한 예방권과 폭력적 저항까지 포괄하기 때문에 급진적이다. 하지만 로크는 정부의 해체를 사회의 해체와 구분하였고 따라서 인민의 저항권이 자연상태로의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6) 루소의 결합계약
루소는 사회계약이 자연적 평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체력 또는 재능에 있어서 불평등할 수 있기때문에 계약에 의해 법으로서 평등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이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야 한다면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방식과 조건에 따라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 모든 사람의 동의는 곧 주권이다. 홉스와 루소는 사회계약과 정부계약(통치계약)으로 구분되는데, 루소는 정부의 설립은 계약으로 보지 않았으며 국민주권을 주창하였다. 국민주권을 위해서는 국민이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사회는 이익의 공동성에 기초한 일반의지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소결: 사회계약론의 의의 
홉스, 로크, 루소에 의해 사회계약론은 전성기를 누렸다. 사회계약을 통해서 사회의 기본구조를 만들려고 한 시도는 대단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사회계약론은 주어진 자연법 질서나 신의 질서에 따라 인간 사회질서를 확립하려는 시도에 반대하고, 사회계약을 통해 새롭게 사회질서를 만들어보려고 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을 통해 홉스와 로크와 루소는 개인이나 인간사회가 더 이상 자연이나 신에 의해 운명지워진 존재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예컨대 사회계약을 통해 개인의 안전을 도모하고, 생명, 자유, 사유재산권을 보호받게 되었으며, 국가권력 남용에 대한 저항권의 개념이 확립되었다. 

Ⅲ. 프랑스 혁명과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 비판

1. 프랑스 대혁명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게 된 배경에는 앙시엥 레짐(Ancien Regime)이라 불리는 특권적 지배질서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주의적 권력을 행사하는 왕정과 소수의 성직자 그리고 귀족이 거대한 특권을 매개로 결탁한 체제였다. 절대왕정은 한 때 유럽에서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를 최강자의 위치에 올려놓기도 했지만 끊임없는 전쟁의 수행과 궁중 사치 그리고 특권적 경제정책으로 인해 민생고와 재정 위기, 사회 불평등 심화라는 현상을 점차 고착화시켰다.
프랑스혁명은 루이 14세 이래 각종 전쟁의 수행으로 깊어지기 시작한 재정난을 타개하고 새로운 조세 수입원을 찾기 위해 1789년 5월 국왕이 소집한 삼부회가 발단이 되었다. 삼부회의 소집은 당시 불만이 팽배해 있던 부르주아지계급으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도록 물꼬를 터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삼부회 의원들은 의회에서 신분적 특권을 없앤 개인별 투표 방식 채택을 요구하고 그 외에도 성직자와 귀족의 면세특권 철폐, 명문헌법의 제정에 의dd한 자의적 체포 금지,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거부하는 국왕과 귀족들에 맞서 따로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에 국왕은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 때 하층계급의 봉기가 없었다면 혁명은 아마 여기에서 중단되었을 것이다.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이 봉기하여 전제정치의 상징인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의회를 중심으로 부르주아지들이 주도하던 혁명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저항이 폭력적 양상을 띠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문제와 같은 민중들의 사회적요구가 개진되기 시작하였다. 부르주아지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워 했지만 왕정 음모에 맞서기 위해서는 민중들의 동원을 불가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혁명은 여기서그치지 않고 농민혁명으로 확산되었다. 흉작과 무거운 세 부담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영주의저택을 습격하여 봉건문서를 불태우고 고리대 상인들과 관리들을 습격하기도 했다.
국민의회는 1789년 8월 봉건적 특권의 폐지를 선언했고 이어‘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인권 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에 입각하여 국민의회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국민의회는 교회재산 몰수, 길드 폐지, 행정과 사법제도 정비 등을 단행했고 1791년 9월에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1791년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국민의회 내부에는 귀족의 특권적 지위를 강조하는 파에서부터 국왕을 지지하는 왕당파, 급진적 공화정을 주장하는 미라보, 라파예트, 로베스피에르 등의 다양한 정치적 색조가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791년헌법은 권력분립에 입각한 입헌군주제를 규정했다. 여기에서는 일정한 재산을 가진 시민들에게만 참정권을 부여했고 새롭게 구성 할 입법의회를 간접선거로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혁명을 급진적으로 밀고 나간 계기는 반혁명의 위협이었다. 혁명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한 귀족들이 국경지대에서 계속 반혁명의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국왕 또한 입헌군주제를 내심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외국의 왕정들과 비밀서신을 주고받았다. 이런 중에 국왕은 1791년 7월 20일 외국으로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되어 파리로 끌려오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자국으로 혁명이 전파될 것을 두려워 한 오스트리아 황제와 프로이센 군주는 1791년 말 혁명을 분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초기에는 프랑스가 패전을 거듭했다. 파리는 반 혁명군의 일촉즉발 위협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들의 혁명적 열정이 폭발했다. 7월 11일에는‘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발표를 듣고 전국 각지에서 의용군이 몰려들었다.
마침내 민중들의 헌신적인 투쟁에 힘입어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혁명적 열정의 폭발은 급진파의 득세를 가져왔다.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과 같은 자코뱅파 인사들이 부상했다. 8월 10일 파리 민중들은 왕궁을 습격했고 의회는 왕권의 행사를 정지시키고 보통선거에 의한 새로운 의회의 소집을 결의했다. 입법의회를 대신하여 국민공회가 출범하였다. 민중들의 정치적 동원이 시작되면서 왕정이 폐지되고 제1공화정이 시작되었다.
1793년 12월 새로운 혁명정부가 조직되었다. 혁명정부를 주도한 것은 공안위원회라는 기구였다. 공안위원회는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12명이 구성되었다. 공안위원회는 비상독재체를 선포하고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혁명정부는 도시 민중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물가상승을 막기 위해 최고 가격제와 징발제 등 혁명적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에 힘입어1793년 말부터 전세가 호전되었고 경제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갔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국이 안정되면서 공포정치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국내외 정세의 안정은 공포정치의 정당성을 약화시켰고 공포정치의 지속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 형성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로베스피에르 등 혁명정부 주도자들과 민중운동의 유대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안위원회 내부에서 갈등과 대립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틈을 타서 1794년 7월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료들을 체포하여 처형시켰다.
로베스피에르의 처형과 함께 혁명의 열기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1795년에는 헌법이 제정되었는데 여기서는 보통선거를 폐지하고 재산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선거권을 줄 것을 규정하였다. 또 영국을 본떠 양원제를 도입하고 1인 독주를 막기 위해 5인 총재단의 집단지도체제를 규정하였으며 삼권분립의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총재정부는 혁명파와 반혁명파 양쪽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도전을 받았다. 식량위기와 인플레이션으로 민중의 저항운동이 재개되고 이와 결합한 산악파 잔여세력이 국민공회 의사당에 침입하여 국민공회가 이들을 진압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지속적인 대외전쟁으로 인해 경제난과 재정난이 가중되고 민중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등 사회불안은 계속되었다.
1797년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기 위해 전쟁에 나섰다. 전쟁의 지속은 프랑스 사회에서 군대의 지위를 크게 강화시켰다. 전쟁이 체제를 먹여 살렸고 그와 함께 군대는 공민정신에 투철한 혁명군에서 장군을 추종하는 정복군으로 성격이 바뀌어 갔다. 전쟁 속에서 군대의 지위 강화와 함께 야심가가 출현했는데 바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 보나파르트는 1797년 이탈리아 원정에서 크게 활약하여 민중들의 환호를 받게 되었다. 급기야는 1799년 11월 18일 보나파르트가 의회 내부의 보수파 세력과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에는 유산계급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 세력의 사회적 우위가 확립되고 혁명의 시기가 종언을 고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보나파르트는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집정정부를 수립했다. 보나파르트는 비록 보수파 세력과 협력한 인물이었지만 권력을 장악한 후 프랑스혁명의 성과들을 제도화하는 여러조치들을 단행했다. 먼저 대내적으로는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제도를 확립하고 경제적으로도 프랑스은행을 설립, 관세제도를 개혁하였다. 또 나폴레옹법전을 편찬하여 사유재산권 보장, 신앙의 자유, 노동과 계약의 자유 등을 명시한 새로운 시민사회의 원리를 법적으로 성문화함으로써 혁명의 성과를 제도화하고자 노력했다. 대외적으로는 정복전쟁을 통해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전 유럽에 전파하였으며 당시 싹트고 있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더욱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여 1802년 종신집정으로 취임하고 1804년에는 국민투표로 제정을 수립하여 황제로 등극했다. 황제 즉위 후에도 그는 자신의 명성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외 ·전쟁을 계속하였으며 한때는 7왕국, 30공국을 지배하는 유럽의 제왕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유럽 여러 ·나라들에 대한 대륙봉쇄령의 무리한 강요와 프랑스 압제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이 각 나라에서 일어나면서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프랑스는 10년이라는 짧은 혁명기간 동안에 무수한 체제변화를 겪었다. 절대왕정이 입헌군주제로 바뀌고 다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공화정 안에서도 처음에는 비교적 온건한 자유주의의 특징을 보이다가 급진적인 인민민주주의로 탈바꿈하고 다시 부르주아지 주도의 공화정이 들어섰는가 하면, 그 속에서 공산주의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다가 끝내는 쿠데타로 제정이 등장하는 엄청난 격변의 과정을 거쳤다. 프랑스혁명은 자유주의 혁명의 가장 철저한 수준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정하게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어서 발전해 나갔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의 3대 이념이라고 불리는‘자유, 평등, 우애’라는 슬로건에서도 나타나듯이 프랑스 혁명은 경제적 개인주의에 주로 편중되어 있던 종래의 자유 이념을 평등, 우애의 이념과 결합시켜 훨씬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념을 만들어 내었다.
루소(1712~1778)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혁명에 중요한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그는『사회계약론』에서 ‘국가는 그 전체 구성원과 계약을 통해 성립되며 그 사회 안의 모든 개인은 사회구성원 전체 의사로 통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구성원 전체 의사를 일반의지라 불렀고 그것의 표현이 바로 법이며 정부는 이를 집행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루소의 사상은 인민주권론에 입각한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고, 프랑스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2.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 비판
“프랑스 혁명은 이제까지 세상에서 벌어진 일 가운데 가장 경악스런 것이며, 온갖 종류의 죄악과 어리석은 짓이 뒤범벅이 된 쓰레기 잡탕들의 광기다.”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기존 제도들은 사람들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효능을 지니기 때문에 유지하는 것이 타당하다.”

1789년 7월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영국 보수주의 정치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초창기엔 방관자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영국 지식층에서 프랑스 혁명을 자유의 새로운 여명으로 평가하고, 열렬하게 지지하는 대중 선동을 시작하자 비판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가 프랑스 혁명을 비판 논리를 자세하게 담아 출간한 책이 바로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이다. 이 책은 파리의 ‘젊은 신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졌다. 프랑스혁명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이 신사가 버크에게 혁명에 관한 견해를 물어온 데 대한 답장이다. 이 책은 아일랜드계 영국정치가 에드먼드 버크가 저술해 1790년 11월 출간한 정치 팜플렛이다. 지성사에서 가장 유명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비판 중 하나이며, 근대 보수주의 사상의 토대를 마련하고 국제정치 이론에도 기여한 소책자로 평가된다. 
버크는 철두철미한 경험론자다. 인간 행동의 원칙은 탁상이론보다 관습과 전통에 근거를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합리적 능력은 제한돼 있고, 사회는 이성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도덕·관습에 의해 재생산되며, 문명의 진보는 사회 안정을 통해 가능하다고 봤다. 그는 “기존 제도와 관념은 지혜의 보고(寶庫)”라며 “이런 것들이 바탕이 돼 형성된 국가는 신이 마련한 제도”라고 규정했다. 또 “옛날부터 내려오는 삶에 관한 견해와 규칙이라는 나침반을 없애면 우리는 어떤 항구로 항해하는지 뚜렷하게 알 수 없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폭력에 의해 ‘구체제’(루이 14~16세 시대의 절대 왕정체제)를 뒤엎은 프랑스혁명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을 굶주린 대중이 유산자들의 재산을 빼앗은 일종의 폭동으로 파악하고, 혁명 세력에 “목적이 수단을 거룩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버려라”고 경고했다. 혁명 등 급격한 방법을 통해 사회가 바뀔 것으로 보지 않고, 자연스러운 운영질서에 의한 보존과 개선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게 그의 일관된 견해였다.
또 “프랑스 혁명 세력은 옛날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과오를 범했고 범죄를 저질러 빈곤을 샀다”며 “이뿐만 아니라 왕권의 속박에서 풀려나자 예절을 난폭하게 파괴하고 불행한 타락을 모든 계층에 확산시켰다. 이는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전통적이고 공동체적인 기존 제도를 과격하게 파괴하면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고 군사적 독재자의 출현을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말대로 프랑스혁명은 과격으로 치달았고, 결국 나폴레옹 독재가 등장했다.
버크는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영국인이 헌정을 수호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그는 “우리는 국교회와 왕정, 귀족제도, 민주제도를 더도 덜도 아니고 현재대로 유지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영국 헌정은 명예혁명(1688)과 권리장전(1689) 이후 100여 년에 걸쳐 인간의 지혜와 관습, 전통이 농축된 제도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확립된 영국의 헌법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시대를 초월하는 세대계약이며, 이 계약은 파괴돼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아울러 “다음 세대를 걱정하지도 않고 선배 세대를 돌아보지도 않는 이기적이며 근시안적인 사람들이 과격한 변화를 지지한다”고 비판했다.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은 기존 체제의 급격한 변혁에 대항하려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논리를 제공해줬다. 이 때문에 이 책은 보수주의의 고전으로, 버크는 보수주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가 강조한 신조와 규범 존중, 보존, 절제, 균형은 보수주의의 주요 가치로 꼽힌다. 그의 신념은 영국 보수당의 이념적 바탕이 됐다.
버크는 기존 체제를 ‘만고불변’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약간의 변화할 수단을 갖지 않은 국가는 보존을 위한 수단도 없는 법”이라며 “국가가 그런 수단이 없다면 독실한 마음으로 보존하려 했던 헌정 부분마저 상실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변화는 필요하되, 어디까지나 헌정을 더 공고히 지키기 위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법 제정의 신중함도 강조했다. “법을 만들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점은 일시적인 소유자·세입자에 불과한 사람들이 조상에게서 물려받아 후손에게 물려줄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마치 자신들이 완전한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버크에게 민주주의란 무차별적 평등을 추구해 오히려 다양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무분별하고 전체주의적인 사조로 인식됐다.

  3. 소결: 에드먼드 버크에 대한 비판적 견해
에드먼드 버크를 비롯한 보수적인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계몽주의 특유의 전통에 대한 부정, 특히 전통이 도덕과 정치적 권위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한 부정이 프랑스 혁명에서 나타난 모든 악덕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정치권력이 전통 또는 신이 내린 왕권이 아니라 민중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견해를 반대하였다. 그들은 모든 일에는 민중의 동의가 필요하며 민중들은 박탈할 수 없는 천부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중에게는 박탈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는 견해는 사회계약론을 통해 확산되고 발전하였으며, 서구 자유민주주의와 국제주의의 원천이 되었으며 오늘날 전 세계가 받아들이게 되었다. 실제로 버크는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 국민이 통치자를 선택하는 것, 그들이 잘못하면 면직하는 것, 국민이 자신을 위한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권리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그런 권리를 갖고 있던 인간의 세대는 죽었고, 그들과 함께 권리도 죽었다고 주장하면서 왕조 시대의 논리와 법을 인용하였다.

 "성직자, 세속 상원의원, 하원의원은 앞서 말한 인민의 이름으로 공경과 충심을 다해 그들, 그 후계자 및 후손에게 영원히 복종한다.“

 "우리, 우리 후계자 및 후손은 그들, 그 후계자 및 후손에게 마지막 날까지 의무를 다한다.“

 "만약 영국민이 혁명 전에 그런 권리를 가졌더라도 영국민은 혁명 때 가장 엄숙하게 자신들과 모든 후손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폐기했다.“

후손을 영원히 구속하고 제약할 수 있거나, 세계를 누가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가를 영원히 주관할 수 있는 권리와 권력을 갖는 의회나 인간이나 세대는 지금껏 어느 나라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또 없어야 한다. 모든 시대와 세대는 그보다 앞서 간 시대와 세대처럼 언제나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미국혁명과 프랑스 혁명에 참가하였던 토마스 폐인은 프랑스 혁명이 폭력적이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버크는 미국 혁명을 옹호하고 프랑스 혁명을 비판하였는데, 당시 프랑스 귀족들은 미국혁명과 같은 것이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루이 16세를 반대하는 혁명이 아니라 전제적 국가원리에 반대하는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영국 혁명이 찰스 1세와 그의 둘째 제임스 2세의 전제에 반대하는 반란이었다면, 프랑스 혁명은 기성 국가의 세습적 전제주의에 반대해 일어난 혁명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프랑스 혁명이 폭력적이었다는 버크의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혁명 최초의 공격대상은 바스티유였고, 베르사유 행진도 평화적이었으며, 다른 혁명들과 비교하여 피해자가 많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당시 유럽의 모든 나라에는 버크가 ‘야비하거나 무식한 폭도’라고 부르는 하나의 거대한 계급이 존재하였는데, 그들은 영국을 포함한 유럽 모든 국가의 병든 구조에서 나온 불가피한 결과물이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버크와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가 민중과 마찬가지로 두렵기 짝이 없는 급진적 단어였던것이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오로지 중우정치 즉 군중에 의한 지배를 의미할 뿐이었다. 버크는 프랑스 대혁명식의 급진적인 혁명이나 개혁을 반대하고, 대신 영국의 의회주의와 같은 점진적인 진보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급진적 개혁이 질서를 파괴해 혼란을 일으킬 수 있지만, 강한 지배 질서와 억압 역시 프랑스 혁명과 같은 민중의 폭발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프랑스 혁명이 근대의 여명기에 일어난 어느 시민혁명보다도 인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프랑스혁명이 근대의 길목에서 일어난 그 어떤 혁명보다도 자유, 평등이라는 민주적 가치를 가장 근본적으로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며, 오늘날의 근대 민주주의가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다수의 참여를 통한 다수의 판단이 소수 귀족이나 절대군주에 의한 판단보다도 뛰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구시대의 낡은 지배의 전통을 깨부수기 시작하였다. 혁명에 참가한 하층 계급들의 모습이 미화될만한 것은 아니었으며, 무분별하고 잔인한 폭력의 행사, 종교와 도덕을 차갑게 멸시하는 반인륜적 범죄 집단과도 같이 보이곤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지배 세력들에게 항상 극도의 경계대상이었고 가혹한 징벌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혁명과정에서 반동의 물결의 흐름을 결정한 것도 다름 아닌 민중의 무리였다. 그랬기 때문에 지배세력들도 이제는 민중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으며 지배 원리를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해야만 했다.
프랑스혁명의 이념은‘인권선언’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재산권을 신성한 권리로 선포했을 뿐 아니라 신체, 의견, 양심, 종교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인민주권의 원칙(선언 제3조), 모든 공직의 선거(선언 제6조), 권력분립에 입각한 대의제(선언 제16조)와 같은 폭넓은 정치적 권리를 천명하였다. 아울러 프랑스혁명은 평등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인권 선언은 제1조에서“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평등하게 태어나며 그렇게 존속한다.”라고 천명하였다. 인간의 자유는 개인적 자유와 함께 평등에 의해서 보완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1) 프랑스 헌법은 1년에 60수의 세금을 내는 모든 남자는 선거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2) 프랑스 헌법은 어느 곳의 대표이든 그 수는 납세 주민이나 선거인의 수에 비례한다고 규정하였다. 
3) 프랑스 헌법은 어떠한 작위도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결과 귀족에 속하는 모든 계급은 일소되었다. 원래 귀족계급은 정복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에서 생겨났다. 그것은 군사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였는데, 귀족제라는 괴물을 근절하기 위해 프랑스 헌법은 장자상속법을 파괴했다. 
4) 프랑스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고, 프랑스 헌법은 성직자의 지위를 개혁했다. 하급 및 중급 성직자의 수입을 높이고 상급 성직자의 수입을 깎았다. 수입이 50파운드 이하인 사람도 없고 3000천 파운드 이상인 사람도 없어졌다. 
5) 프랑스 헌법은 징수자와 교구민 사이에 끊이지 않는 분쟁의 원인이었던 10분의 1세를 폐지했다.
6) 프랑스 헌법은 종교적 관용과 불관용을 금지 또는 폐기하고, 보편적인 양심의 자유를 확립했다.
이상과 같은 프랑스의 변화는 버크의 주장과 달리 정복자의 권리에 의해 노르만계의 후손만이 왕이 되는 영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공화정을 반대하고 귀족 계급의 특권을 지속하려는 영국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버크의 주장으로 극명하게 확인된다. 

"우리는 신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경외심으로 왕을, 친밀감으로 의회를, 의무감으로 관리를, 숭배감으로 신부를, 존경심으로 귀족을 바라본다." 

또한 국민의회를 구성한 프랑스 인민의 대표들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을 통해 인류에게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실현하는 민주주의를 선포하였다.
1)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나고
2)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소멸될 수 없는 자연권을 보전하는 것이며,
3)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고, 
4) 자유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 한 모든 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며,
5) 법은 사회에 해로운 행위에 한해서만 금지할 수 있으며,
6) 모든 시민은 직접 또는 대표자를 통해 법 제정에 참여 할 수 있으며,
7) 법에 의하지 않으면 누구도 기소되거나 체포, 구금되지 않으며,
8) 법은 범회에 대한 처벌을 엄격하게 하고 범죄 후에 만들어진 법에 따라 처벌되지 않으며
9) 모든 사람은 유죄를 선고 받을 때까지 무죄로 추정되며, 가혹행위는 금지하고
10) 누구나 법에 의한 공공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한 자신의 발언을 제한당하지 않으며, 
11) 사상과 의견은 자유로운 소통은 보장되어야 하고,
12) 공권력은 인권과 시민권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며, 
13) 공권력을 유지하고 행정력을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부과하며,
14) 모든 시민은 직접 또는 대표자를 통해 조세 징수를 결정할 권리가 있고,
15) 사회는 공직자에게 행정 업무에 대하여 보고 받을 권리가 있으며,
16) 법 준수가 보장되지 않거나 권력분립이 되지 않으면 헌법을 갖추지 못하고, 
17) 소유권은 신성불가침의 권리이며 법이 정한 공공성이 명백하지 않으면 누구도 박탈 할 수 없다. 
이상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을 통해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인민주권에 입각한 근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정치적으로 발전시켜 나갔고 전 유럽에 그 이상을 전파 시켰다. 그래서 바로 여기서부터 진정한 의미의 근대 유럽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Ⅳ.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1.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의 가장 유명한 저술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그는 종교 사회학의 관점에서 연구를 시도하였다. 이 책에서 베버는 서방과 동방 문화가 각자 발전하는 방식의 여러 원인 가운데 종교가 한 요소였다고 주장하며, 금욕적 칼뱅주의라는 특정한 성격이 서구의 합법적 권위, 관료제, 자본주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음을 강조한다. 또 여기서 그는 자본주의가 마르크스적 맥락처럼 순수하게 유물론적이지 않고 소유 관계, 기술, 지식의 발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종교적 이상과 개념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데 특히 소명과 예정 그리고 검약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개신교가 자본주의의 발흥에 끼친 영향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의 발생과 그것의 근본 정신은 16세기에 발흥한 개신교에 윤리에 있다고 주장했다. 개신교 윤리는 소위 '현세적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일'과 관련된 분야에서 그 영향이 두드러졌다. 그들은 이러한 개신교 윤리에 따라 자신의 기업 혹은 계약을 발달시킴과 함께, 재투자를 위한 부를 축적하였다. 베버는 이런 이유를 들어 개신교(특히, 직업소명설을 주장한 칼뱅주의) 윤리가 자본주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개신교 윤리가 근검절약과 성실한 노동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걸었고, 이것은 자본주의 논리와 일치한다고 보았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전적으로 종교신앙의 특정한 형태 속에서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근대자본주의가 그 주된 담당자인 '산업적 중산자층(産業的中産者層)'에 의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금욕적 직업윤리의 형성에 대한 이른바 주관적 자극제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의 교리가 공헌한 비율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베버의 궁극적 의도는 근대자본주의가 왜 서유럽 사회에서 우선적으로 생겨났는가 하는 의문 푸는 것이었고, 합리적 생활 태도의 형성을 방해하는 주체적 조건이 왜 가톨릭 또는 이슬람교, 힌두교, 유교 등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신도들 사이에서 준비되었는가에 규명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Capitalism)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좀바르트(Werner Sombart, 1863- 1941)는 “자본주의란 물적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그것을 소유하지 않는 노동자를 고용하여 영리주의와 경제적 합리주의에 따라 상품생산을 하는 시장경제 조직이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주의란 기업의 방법을 통해서, 즉 이익을 추구하는 사기업을 통해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경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에 대한 베버의 관점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베버는 근대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을 추구하는 가운데 프로테스탄트, 그중에서도 칼빈주의(Calvinism)가 자본주의 정신의 원천이라고 보고 이를 입증하려고 했다. 아울러 입증 과정에서는 역사적 방법을 택하였는데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중세 그리스도교의 수도원에서의 수도자들의 삶이란 기도, 금욕, 노동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음에 착안하여 자본주의 정신의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그들의 삶이란 속세를 떠난 수동적 삶으로 보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을 발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다른 가능성에 주목했는데 그것은 곧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 정신이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개척자로서 오직 믿음, 경건, 노동을 외쳤는데 그것은 합리성보다는 감정적 경향이 강했으며 노동 및 이익 창출에 있어서는 그 의지가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버는 루터에게서도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주목한 것이 칼빈주의, 그중에서도 영국의 청교주의(Puritanism)였다.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종교의식이나 주술 등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어디까지나 개인 영혼의 철저한 고독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금욕하고 노동하며 이윤을 창출하는데 집중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생활태도는 중세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생활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며 루터가 가르치는 가르침과도 판이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적 합리화를 수반한 자본주의 및 자본주의적 기업이라는 것은 지구상의 모든 문명화 된 국가들, 즉 중국, 인도, 바빌론, 이집트, 고대 지중해 지역, 중세 사회 등에 이미 존재했다고 보는 것이 베버의 관점이다. 자본주의적 사업 및 사업가가 오래전부터 존재해온 것은 사실이며 또 그것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유럽에서 발전한 자본주의는 양적인 측면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이 양적 발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유형, 방향 등에 있어서도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을 띠었었고 아울러 그것은 바로 자유로운 노동력의 합리적-자본주의적 조직에 기초한 것이었다고 보았다. 
서구 이외의 지역에서는 기껏해야 이에 대한 암시 비슷한 것만이 발견될 뿐 자유 노동력에 기초한 산업이라고는 가내 수공업조차도 극히 소수의 고립된 현상으로서만 발견될 따름이었으며 근대 서구 이외의 세계에서는 노동력의 합리적 조직화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합리적 사회주의라는 것도 없었고 또 비록 도시 시장, 상사(商社), 길드 등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민(citizen)의 개념이나 부르조와 개념은 서구 이외의 지역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베버의 견해이다.
고대 중국의 경우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들, 즉 예를 들면 사회적 지위가 출신 성분에 의하여 제한받지 않은 점,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의무교육이나 병역의무가 없던 점, 고리대금업이나 상업을 규제하지 않은 점 등이 있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도 많았던 바, 중국의 가산제 국가 제도는 경쟁과 갈등을 제거했으며 전통적 가족 제도는 자녀 하나만을 잘 교육해서 관리가 되게 하는데 힘썼으므로 관리는 결국 노획자본주의(booty capitalism) 실천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중국은 형식법보다는 도덕법을 중시했는데 그 이유는 통치자들이 그것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중국 유교의 특성, 즉 내세에 대한 무관심, 전통고수, 오륜(五倫)사상, 직업적 전문화를 거부하고 팔방미인을 우대하는 풍토 역시 자본주의 발전에 저해 요인이었다.
인도 역시 자본주의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가 많았다. 힌두교의 경우 전통주의 고수, 현세에 대한 무관심, 느슨한 내세 지향. 불교의 경우에는 힌두교보다 더 적극적으로 현세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 발생의 세 가지 요인으로 내세운 조건은 물질적 토대, 사회․정치적 조건들, 종교 사상이었는데 이 세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중국이나 인도는 자본주의 정신 발생에 적합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은 충분했으나 필요조건인 세 번째 종교사상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중세기에는 상업이란 빈축의 대상이었으며 대금업은 경멸을 받았다. 이런 태도에 있어서는 교회와 사회가 일반적으로 일치하였다. 교회는 항상 탐욕의 죄를 책망하였으며,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재산의 추구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패덕이라고 보았다. “장사꾼이 신을 기쁘게 해드리기는 어렵다.”라는 말이 교회법에 도입되었다. 돈을 빌려주고 비싼 이자를 붙이는 것만이 아니라 무릇 이자를 붙이는 것이라면 모조리 고리대금으로 취급되었는데, 종교회의에서는 몇 차례나 이것을 금지시켰고 고리대금업자에게는 성례전(聖禮典)의 특권이 거부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어쨌든 재부의 획득이 사회적으로는 타락된 것으로, 도덕 및 종교적으로는 위험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중세기의 상업관이 크게 변했다. 재부의 획득은 노골적으로 현대문명의 주된 목표가 되었다. 그것은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우리의 삶과 사고(思考)를 결정짓는 요인이 되었다. 막스 베버는 그의 연구에서 양자 간(중세와 종교개혁 이후 근대의 상업관)의 차이를 밝혀내고 그것을 더욱 면밀히 검토하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고 있는데, 그는 이 차이를 ‘근대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것에서 찾아내고 있다. 중요한 차이점은 윤리적이고 심리학적인 것인데 재화의 축적에 관한 새로운 풍조 및 윤리(ethos)에서 그것을 찾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급격한 변화를 베버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치열한 경쟁이 개시됨과 더불어 목가적인 풍경은 사라졌고 아무리 엄청난 재산이 모아져도 고리대에 이용되는 것보다는 사업에 투자되었다. 그리하여 여유 있는 안락한 생활 대신 엄격한 절제가 들어섰다. 소비 대신에 영리를 원하는 자는 남들과 더불어 번영했으나 낡은 양식을 유지하려 한 자는 생활을 간소하게 줄여야만 했다. 따라서 근대자본주의를 확장시킨 원동력은 자본주의적으로 이용될 만한 화폐가 어디에서 유래했느냐 하는 것 보다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에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새로운 정신의 침투가 늘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기업가가 냉정한 극기를 늘 유지하고 경제적 도덕적 파멸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극히 강고한 성격이 필요했다. 또한 명석한 관찰력이나 실력과 더불어 윤리적 자질을 구비하지 않고서는 이 혁신에 필요한 고객과 노동자의 신뢰를 얻을 수 없었으며, 무수한 저항을 무찌를 정신력을 갖추지 못하면 기업가에게 필요한 강도 높은 노동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자질이 과거 전통주의에 적합했던 윤리와는 판이한 독특한 윤리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편, 그의 또 다른 주요 저작인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베버는 국가를 합법적으로 폭력을 독점하는 독립체로 규정하였으며, 이는 현대 서구 정치 과학 연구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베버는 경제와 사회에서 했던 관료제 분석은 현대의 조직 연구에서 아직도 중심적이다. 그의 유명한 업적을 "베버 명제"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는 처음으로 사회에 관계되거나 사회성이 있는 권위의 다양한 측면을 인식하여, 카리스마적 권위, 전통적 권위, 법적 권위로 범주화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관료제를 분석하면서 근대 국가 조직이 합리적인 권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2. 막스 베버에 대한 비판적 견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경제 구조가 자본주의 형태로 이전하는 과정에 의해서 출현하였고, 새로운 계층인 부르조아 계급이 이끄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베버의 주장과는 달리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발전에 기여한 것이라고 주장 한다. 한마디로 프로테스탄트는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베버가 지나치게 프로테스탄트 편향적이었다. 왜냐하면 서부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교파만을 옹호한 듯한 편협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종교와 관련해서는 유신론, 무신론, 불가지론 혹은 회의론의 선택 앞에 노출되어 있으며 윤리·도덕과 관련해서는 금욕주의, 쾌락주의, 절충주의의 선택 앞에 노출되어 있다. 각자의 인생관, 세계관에 따라 선택할 일이로되 막스 베버는 당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바람직한 삶이란 금욕주의적 프로테스탄트, 즉 청교도(Puritans)의 길이라는 것을 강요하고 있는 듯 하다. 베버 자신은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므로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나 포괄주의 차원에서 이러한 견해가 나왔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다소 종교적으로 편향된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당시 베버의 눈에는 영국의 청교주의가 특별히 금욕적이고 바람직한 자본주의 정신을 지니고 있음으로 영속적인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르나 얼마가지 않아 영국이 세속적으로 공리주의화한 바람에 근대 이후 오늘의 서구 사회를 보면 자본주의 정신은 거의 실종된 상태이다. 영국은 국교인 성공회(Anglicanism), 독일은 루터교와 가톨릭, 프랑스 이탈리아는 가톨릭, 미국은 침례교 감리교 루터교 장로교(Calvinism),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전래 된 장로교와 감리교 등 다양한 교단과 교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금욕적 정신은 더 이상 영속적 가치로서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베버는 금욕주의의 세속화를 예견했지만 세속화 이후의 세계에 대한 뚜렷한 대비책은 제시하지 못한 채 오히려 무한질주의 자본의 성장(신자유주의)을 정당화해 주는 역할만 하였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서구문화에 속하지 않는 일본의 산업화와 자본주의 발전 그리고 아시아와 남미의 후발 신흥자본주의 국가의 발전은 종교보다는 서구 자본주의의 충격 혹은 이식으로 태동하기 시작하였고, 자본가 계급 보다는 국가 주도의 자본주의 발전 모델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종교 사상이 경제윤리 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할 수도 있지만, 산업화를 통한 경제 성장과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형식은 사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Ⅴ. 맺음말

이 글에서는 홉스, 로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프랑스 대혁명과 버크의 프랑스혁명 비판, 그리고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첫째 사회계약론은 자연법 질서나 신의 질서에 따라서 인간 사회질서를 확립하려는 시도에 반대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회계약론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부정하였다. 홉스는 옛날 도덕 철학자들의 책에 나오는 ‘궁극목적’(finis ultimus) 이나 ‘최고선’(summum bonum) 따위는 없다고 보았다. 대신에 자신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등장시켜 욕구, 혐오, 기쁨, 고통, 공포. 희망과 같은 인간의 ‘정념(passion)에 주목하였다. 홉스는 선이나 악, 추함 등과 같은 개념은 객관적 도덕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관적 심리라고 주장하였다. 로크와 루소에 의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은 부정되었다. 로크와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인위적인 사회계약을 통해서 사회의 기본구조를 만드는 사상이고, 이는 주어진 목적에 맞추어 사회를 적응시키려는 목적론적 결정론과는 
따라서 사회계약을 통해서 사회의 기본구조를 만들려고 한 시도는 역사적으로 대단한 의의를 갖는다. 사회계약론은 주어진 자연볍 질서나 신의 질서에 따라 인간 사회질서를 확립하려는 시도에 반대하고, 사회계약을 통해 새롭게 사회질서를 만들어 보려고 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을 통해 홉스와 로크와 루소는 개인이나 인간사회가 더 이상 자연이나 선에 의해 운명 지워진 존재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사회계약론의 철학과 정신은 미국혁명과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다.
둘째,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 비판은 정당하였는가? 버크는 정치 권력은 전통 또는 신이 내린 왕권이 아니라 민중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견해를 반대하였다. 아울러 모든 일에는 민중의 동의가 필요하며 민중들은 박탈할 수 없는 천부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사회계약론을 거쳐 민중에게는 박탈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는 견해가 발전하였고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불가역적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버크는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 국민이 통치자를 선택하는 것, 그들이 잘못하면 면직하는 것, 국민이 자신을 위한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권리가 국민에게 있다는 - 것을 부정하였다.
버크는 미국 혁명은 옹호하고 프랑스 혁명은 비판하였느데, 당시 프랑스와 귀족들은 미국혁명과 같은 것이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루이 16세에 반대하는 혁명이 아니라 왕정과 전제적 국가원리에 반대하는 혁명이었다는 토마스 폐인의 주장은 설득력 있다. 프랑스 혁명은 기성 국가의 세습적 전제주의에 반대해 일어난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폭력적이었다는 주장을 반박하였는데, 최초의 공격대상은 바스티유였고, 베르사유 행진도 평화적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유럽에는 버크가 ‘야비하거나 무식한 폭도’라고 부르는 하나의 거대한 계급이 존재하였는데, 그들은 영국을 포함한 유럽 모든 국가의 병든 구조에서 나온 불가피한 결과물이었다는 주장이다. 예컨대 버크와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가 민중과 마찬가지로 두렵기 짝이 없는 급진적 단어였던 것이다. 강한 지배 질서와 억압이 프랑스 혁명과 같은 민중의 폭발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은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인민주권에 입각한 근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정치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고 생각된다.
셋째, 막스베버가 저작한 『프로테스탄트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경제윤리의 정곡을 찌르는 걸작품으로 크게 환영을 받았었다. 후일 학자들 간의 견해는 엇갈리지만, 우선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 이념들의 개념이 제대로 규정되지 않던 당시의 상황에서 마르크스를 염두에 두면서 특히 ‘자본주의 정신 및 그 기원’이 무엇인가를 골똘히 숙고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또한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이 종교에 있다고 믿었기에 그는 중세 가톨릭 수도원의 삶, 초기(16세기) 프로테스탄트들의 삶, 후기(17∼18세기) 프로테스탄트들의 삶을 깊이 통찰했고, 더 나아가 고대 그리스, 유대교, 인도, 중국인들의 경제생활까지 파고들어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를 탐구하였다. 무엇보다도 특히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파의 특성을 신학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신학적 종교사회학적 지식을 제공함과 동시에 종교개혁을 통하여 중세 후기에서 근세로 이행하는 과정에서의 유럽사회 경제발전의 패러다임 변화에 주목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세 수도원적 삶과 새로운 프로테스탄트들의 삶을 분석함으로써 성(聖)과 속(俗)의 단절이 아닌 새로운 변화의 연속성을 보여주었므여, 신의 영광 예정설 소명론 합리성 강조는 윤리적 효과를 어느 정도 발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버의 한계성도 뚜렷한데, 금욕적이고 바람직한 자본주의 정신을 지니고 있음으로 영속적이지 않았으며, 근대 이후 오늘의 서구 사회는 베버가 주장한 자본주의 정신은 거의 실종되었다. 세계 여러 자본주의 국가에 다양한 교단과 교파가 있으나 오늘날 금욕적 정신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베버는 금욕주의의 세속화를 예견했지만 세속화 이후의 세계에 대한 뚜렷한 대비책은 제시하지 못한 채 오히려 무한질주의 자본의 성장(신자유주의)을 정당화하고 말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처럼 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경제 구조가 자본주의 형태로 이전하는 과정에 의해서 출현하였고, 새로운 계층인 부르주아 계급이 이끄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하였다. 즉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발전에 기여한 것이고, 프로테스탄트는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Ⅵ.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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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1997) 홉스와 로크의 사회계약론 연구, 공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최한빈(2010) 막스 베버가 본 자본주의 발전과 노동윤리, 숭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토마스 페인 『상식, 인권』, 박홍규 역(서울: 필맥,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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