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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생태, 환경

겨울 한라산에선 바람도 풍경이다

by 이윤기 2009.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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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오희삼이 쓴 <한라산 편지>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 한라산, 여름과 겨울에 각각 한 번씩 한라산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며 다녀온 산행이기에 “마음의 고향이자 지친 영혼의 안식처”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다녀왔습니다.

대신 오희삼이 찍은 사진과 그가 쓴 글을 통해 한라산을 새롭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마 다시 한라산을 찾아간다면 전혀 다른 마음으로 산과 산이 품고 있는 자연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쓴 <한라산 편지>는 한라산의 사계절을 고루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한라산자락 서귀포 토평에서 태어났고 대학 입학 후 산악부 활동을 시작하면서 암벽과 빙벽을 배우며 전국의 산을 쏘다녔다고 합니다.

산악전문월간지 <사람과 산> 편집부 기자로 전국의 산과 암벽을 주유하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으며,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가 여행안내 월간지 <투어 투데이>편집장을 지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사진과 마음을 적시는 글을 쓰는 연습을 충분히 하였던 셈이지요.

한라산국립공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난 15년 동안 한라산 구석구석을 누비며 아름다운 풍경과 생태를 글과 사진으로 담는 일을 하고 있으며, 이 책 <한라산 편지>는 그 결과물 중 일부인 것입니다.

제주도와 한라산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한라산은 백록담에서 뻗어내려 해안선에 이르면서 제주도라는 섬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라산은 제주도라는 나무의 뿌리이면서 줄기라는 것이지요. 결국 한라산이 곧 제주도이며, 제주도가 또한 한라산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한라산을 일컬어 국토의 파수꾼으로 비유 합니다.

“백두산이 북녘 땅 만주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내는 곳이라면, 한라산은 망망대해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태풍을 온몸으로 껴안는 우리 국토의 파수꾼인셈이지요.”

신들의 정원,  한라산에서 만난 자연

지난 15년 동안 신들의 정원과도 같은 한라산에 살면서 만난 자연은 신비로운 보석과 다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쓴 <한라산 편지>는 바로 한라산 너른 들판과 숲이 품고 있는 자연의 숨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작은 생명들의 이야기를 편지 형식으로 기록한 것 입니다.

세상 어떤 연애편지보다 아름다운 여리고 고운 문장으로 기록된 이 편지는 눈으로 읽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책을 절반쯤 읽고 나서부터는 시를 낭송하듯이 일부러 소리 내어 책을 읽었습니다. 책 읽는 소리를 듣는 가족들도 모두 애잔하고 슬픈 느낌이 든다고 하더군요.

그가 쓴 글을 읽노라면 마치 한 편의 파노라마 필름을 보고 있는듯 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눈앞에 아름다운 한라산 숲과 이슬이 머금은 아침햇살을, 유순한 노루의 눈망울을, 청초한 꽃을 피우는 돌매화를, 들판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노을을 마주 보는 것 같은 그런 착각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가 묘사한 봄을 맞는 한라산의 모습을 몇 구절 소개해 봅니다.

“콘트라베이스의 낮고 긴 음색으로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한라산 깊은 계곡에서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물소리, 바위를 적시며 솟아납니다. 현을 튕기는 듯 가늘고 청명한 소리는 메마른 대지를 적시며 깊디 깊은 겨울잠에 취한 숲속의 생명들을 깨워 댑니다.”

“트럼펫처럼 맑고 우렁찬 햇살이 나목의 덤불숲을 헤집고 얼어붙은 대지에 닿으면 파릇한 새싹들이 여기저기서 부스스 얼굴을 드러냅니다. 햇살보다 향기로운 빛깔로 샛노란 복수초가 선봉에 서면, 노루귀도 이에 뒤질세라 잎새마저 제쳐두고 순백의 자태를 드러내지요.”

분명 산문으로 쓴 <한라산 편지>를 읽어 면서 내내 고운 운율이 흐르는 시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제가 소리 내어 읽는 소리를 듣던 사람들도 모두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고 합니다.



시를 읽는 듯....... 자연이 담긴 편지

인간의 탐욕 때문에 수난을 당하는 자연의 아픔을 묘사한 대목은 더욱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연둣빛 두릅나무의 새순은 꽃을 피워내기도 전에 수난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막 피워낸 새순을 살짝 데쳐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라 피워내자마자 누군가의 손길에 꺽이기 때문이지요....... 새순이 잘려나간 자리엔 투명하고 하얀 점액질이 흘러나옵니다. 잘려나간 상처부위를 치료하기 위해 두릅나무는 또 다시 새순을 피워냅니다.”

한 때 한라산 명품으로 유명했던 오미자나무 열매도 지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다른 나무의 등걸을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 열매를 맺는 오미자의 특성 때문에 다른 나무도 오미자와 함께 무참히 잘려나가는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봄 날 한라산을 걸을 때는 어떻게 걸어야 할 까요? 정상의 백록담을 향해 걷는 등산객이었을 때 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쳐내며 성큼성큼 걸었습니다. 저자는 봄 날 한라산을 걷는 속도를 꽃의 속도에 맞추어 걸으라고 합니다. 가만히 땅에 뿌리박힌 꽃에게 무슨 속도가 있냐고 물으시는 분도 계시겠지요.

“걸을 때는 꽃들이 북상하는 속도로만 걸으시기 바랍니다. 바람의 속도에 맞추어서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향기 허공에 스미듯 느릿느릿 걸으시기 바랍니다. 흐르는 구름으로 나그네 되어 오시기 바랍니다. 천상 화원에서 이 계절 들꽃만이 연주할 수 있는 봄날의 향연에 그대를 초대합니다. 어지러운 꽃바다에의 들판에서 꽃날의 몽환에 한줌 영혼을 잠식당해 보지 않고서는 뜨거운 여름을 맞이할 수 없음입니다.”

인용문을 읽어보시면 마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에 공감하실 수 있을 것 입니다. 소리 내어 한 번 읽어보시면 그 느낌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3억년을 이어온 잠자리의 윤회

여름 편지에서는 3억년을 이어온 잠자리의 윤회와 같은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 해 살이 잠자리가 물속에서 태어나 벌레로 봄을 보낸 후에 여름이 되어 날개를 펼치고 날아다닐 때까지의 과정을 섬세한 글을 통해 자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름 내내 저장한 에너지로 잠자리는 허공에서의 교접에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합니다. 수정이 끝나면 곧바로 산란을 하고 한 잠자리의 생애는 짧은 삶을 마감하지만, 산란을 통해 새로운 생을 잇는 것으로 잠자리의 삶이 완성되다는 것입니다.

개별적 삶의 생과 사가 이어지고 포개어지면서 잠자리의 생은 영위되어 왔고, 그렇게 3억년의 시간이 흘렀답니다. 인간과 같은 여생이 없는 삶이지만 생이 고달파서 자살을 굼꾸는 일도 없는 것이 야생의 삶이라고 합니다.

한라산의 자연에는 꽃과 곤충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라산 자체가 아름다운 자연이기도 합니다. 여름 편지 중에는 ‘영실’을 주제로 쓴 편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주심경의 하나인 영실은 제주도의 아름다운 경치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오랜 옛날부터 신들의 고향으로 그려졌다고 합니다.

제주 사람들에게 영실은 신성불멸의 터, 신들의 거처로 기억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경치만큼이나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고 합니다. 어미를 삶은 죽을 먹은 아들들이 대성통곡을 하며 울다 그 자리에서 바위로 굳었다는 것이지요.

가슴 아픈 사랑의 추억, 시린 가슴으로 글썽이는 눈물

저자는 늦은 가을 날 마른 조릿대의 갈색낙엽을 보며 치유하지 못하는 사람의 상처를 떠 올린다고 합니다.

“일생에 가슴 아픈 사랑의 추억하나 없다면 그것이 사람의 인생이겠습니까. 일생에 시린 가슴으로 눈물 한 번 글썽이지 못한 가슴이 어디 사람의 가슴이겠습니까. 등산로를 걷다가 무성한 조릿대를 보거든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바람에 댓잎 부딪치는 소리가 아름다운 선율로 가슴에 스며듭니다.”

한라산 야생화들을 집어 삼킬 듯이 번식하는 조릿대를 모두 뽑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릿대가 한라산 지표면을 든든하게 덮어주고 폭우에 흙을 지켜주고 새들이 둥지를 트는 보금자리가 되어준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고 합니다.

그가 조릿대를 보며 사랑의 상처를 이야기 한 연유는 땅속의 줄기로 번식하는 조릿대가 생애 단 한 번 꽃을 피우고 나면 고스란히 말라죽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생을 땅속으로만 뻗으며 살다가 꽃 한번 피워본 사랑의 대가가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겨울편지 한 대목을 더 소개해드립니다. 겨울편지는 어리목 코스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만나는 ‘만세동산’이야기 입니다. 만세동산은 어리목에서 윗세오름 대피소에 이르는 길목에 있는 오름입니다. 그는 만세동산의 겨울이 찾아오는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아득한 광야에 저녁 이내가 몽환처럼 흘러가고 어디선가 짝을 찾는 휘파람새들의 애달픈 세레나데가 바람에 묻어오는 소리를 그려볼 수 있겠는지요. 기척에 놀란 노루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컹컹 짖어대는 애틋한 야생의 소리를 그대 눈앞에 그려볼 수 있겠는지요.”

바람이 풍경이라는 상상을 해보신적이 있나요? 그는, 겨울 한라산에서는 바람도 풍경이라고 합니다. 바람은 형체를 볼 수 없는 추상이지만, 소리 속에서 바람의 생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리의 음역에서 바람의 삶은 파란을 헤치고 만장을 넘는데 바람이 죽으면서 결코 그 소리를 남기지 않습니다. 다만 바람은 죽음 끝에서 울음의 무늬를 새길 뿐이지요. 바람은 산에게 길을 묻지 않으며 제 스스로 길이 되어 길 없는 길속으로 사라져갑니다.”

바람의 동산 만세동산을 거슬러 한사람을 오를 때는 누구나 바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한라산 풍경 속으로 소리 없이 스미는 바람처럼 오라고 합니다.

한라산에선 바람도 풍경이다

지난 가을 제주도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한라산은 두 번이나 올랐으니 그동안 다녀오지 못한 우도를 다녀왔습니다. 아마 오희삼이 쓴 <한라산 편지>를 읽었더라면 우도행을 미루고 또 한라산으로 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라산 편지>는 한라산 이루고 있는 물과 바람과 꽃과 나무와 풀, 눈과 비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옛이야기와 바위와 돌과 숲에 이르기까지 한라산을 가만가만 자세히 들여다 본 기록입니다. 한라산을 담은 수십 여장의 사진은 아름답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빼어납니다.

시류에 굴하지 않는 삶을 사는 구상나무 이야기처럼 한라산을 묵묵히 지키는 저자의 삶이 이 책 곳곳에 녹아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꼭 소리 내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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