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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책과 세상 - 생태, 환경

600년 서울? 30년 된 신도시로 보이는데?

by 이윤기 2009.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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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정수복이 쓴 <파리를 생각한다>

<파리를 생각한다>는 사회학자인 정수복이 쓴 인문학적 파리산책기입니다. 그는 파리에서 보낸 14년 가운데 많은 부분을 책 읽기와 파리 걷기로 보냈다고 합니다.

사회학자의 인문학적 파리 산책기를 쓴 정수복은 1980년대 유학 시절 7년을 파리에서 보냈고, 2002년부터 지금까지 7년 넘게 파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나에게는 파리를 걸으면서 파리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크지만, 책을 읽다가 파리를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뛰어난 문장을 만나는 기쁨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

그는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여 파리를 하나의 거대한 도서관이라고 하며, 상상의 도서관이며 거대한 ‘기호의 공화국’이라고 합니다. 그는 건물, 길, 공원, 팻말, 카페, 광장, 골목길, 성당, 학교, 신문가판대, 공연장, 극장과 영화관 박물관, 운동장과 체육관 사무실, 동상, 버스, 지하철 그리고 거리를 지나가는 남녀노소가 모두 해석을 기다리는 독서의 대상이라는 것 입니다.


파리는 거대한 도서관이다

그는 두 번째 파리 체류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파리라는 도서관을 산책하기 시작하였고,  역사와 철학, 건축과 문화, 예술과 과학, 폭동과 혁명의 흔적이 남은 파리를 걸으며 쌓인 정보와 지식, 느낌과 생각을 모아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은 파리를 발길가는 대로 산책하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적은 파리 걷기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파리를 주제로 한 역사와 문학, 철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책들을 읽고 찾아낸 파리 읽기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것 입니다.

“이 책에는 내가 파리를 걷게 된 내력과 걷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본 글에서 시작하여 파리의 형성과정을 역사적으로 기술하여 파리의 현재를 객관적으로 기술한 글과 파리가 아름다운 미학적 이유를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해 본 글이 실려 있다........이 책에는 파리를 남다르게 걸었던 사람들의 계보....... 파리 사람들이 도시 공간을 일상의 삶속에서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기도 했다.”

지은이는 이 책을 파리 전체를 하나로 놓고 쓴 총론 또는 개론에 해당하는 책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 책의 씨앗으로 1996년 펴낸 <녹색 대안을 찾는 생태학적 상상력>에 실린 ‘녹색 문화도시를 꿈꾼다 - 서울, 파리 그리고 경주에서의 산책’에서 찾을 수 있으며, 서울을 떠나기 전에 아내와 함께 쓴 책 <바다로 간 게으름뱅이>의 후속편에 해당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느림, 게으름, 소박함, 한가로움, 유연함, 자발적 소외와 같은 것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해준 <바다로 간 게으름뱅이>를 아주 감동적으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책이 절판된 후에 전국의 헌책방에서 이 책을 사서 가까운 지인들에게 선물을 하기도 하였지요. 개인적으로는 2002년 지은이 정수복과 파리에서 짧고 작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쓴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아 이런 책을 쓸 줄 알았다’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정수복선생과 함께 파리를 산책한 인연

작은 인연이란 지은이 정수복의 파리 걷기에 초대 받은 인연입니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인연일수도 있는데,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들과 프랑스의 주민참여형 지방자치, 그리고 시민단체 활동을 공부하러 파리를 방문하였을 때 입니다.

정수복 선생의 안내를 받아 파리의 기초자치단체와 환경단체를 방문하였는데, 파리 시내를 둘러 볼 수 있는 한나절의 여가 시간에 그는 우리 일행을 파리 시내의 한적한 공원으로 안내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그냥 걸어보고 느껴보라고 우리를 내팽개(?)쳤습니다.

정수복 선생을 알고 있던 몇몇을 제외한 많은 활동가들이 적지 않게 당황하였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룻밤을 새워 날아온 파리에서 유명관광지를 모두 제쳐 두고 한가롭게 공원을 산책하자고 하였으니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그의 파리 산책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지요.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을 찍고 에펠탑과 개선문을 바람처럼 지나다닐 것이 뻔한 우리 일행들에게 파리를 보는, 읽는 새로운 경험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파리를 생각한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명 관광지만 메뚜기처럼 둘러보고 떠나는 사람들을 ‘문화의 타잔’이라고 표현하였더군요.

“한국인만이 아니라 파리를 오는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보려고 서두르지 말고 어느 한 장소라도 깊게 음미하며 ‘자기만의 순간’을 만들기를 권한다. 많은 장소를 가보려고 서두르지 말고 몇 개의 장소와 내밀한 개인적 관계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여행의 기술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짧은 일정으로 파리를 방문한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문화의 타잔이 되지 않도록 단 한 장소라도 파리와 내밀한 인연을 맺게 해주려하였던 것 입니다. 그는 파리를 직접 걸어보고 나서야 파리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하철을 포함한 파리의 공공교통수단이 파업에 들어간 날 파리 직경의 1/3이 넘는 생-페르에서 마레 지역까지 걸어 본 후 ‘새롭고 황홀한’ 동서 11.5킬로미터, 남북 9.5킬로미터의 파리 규모를 난생처음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파리가 사람들이 걸어 다니던 시대에 만들어진 도시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5000개가 넘는 파리의 모든 길을 두 발로 걸어 보겠다고 하는 ‘원대한’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으면서 계절에 따라 변하는 파리, 생활리듬에 따라 달라지는 파리, 시간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파리를 만났다는 것 입니다.


서울 정도 600년? 서울은 30년 된 신도시?

정수복은 “파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제 2의 고향이요. 마음의 고향이 되는 까닭은 파리의 중요한 장소들이 세월이 가도 그대로 남아 있고 지난 날의 분위기가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래된 미래>를 쓴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서울을 보고 나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600년 된 도시라는 서울이 자기가 보기에는 30년 된 신도시로 느껴진다고 말 입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근대 역사의 흔적을 모두 부숴버리고 고층아파트만 지으려고 하는 제가 사는 도시에 대하여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가 사는 이 도시도 ‘기억의 장소’를 뭉개고 바다를 매립하여 아파트와 공장 그리고 빌딩을 짓는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도시를 발전(?)시키는 일이라고 확신하는 지도자와 공무원들입니다.

정수복은 “말쑥함 뒤에는 헤어날 수 없는 권태와 지루함, 피상성과 무미건조”만 남으며 현대 도시의 모습에는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유년 시절을 보내지 않은 파리에서 ‘세월의 이끼’를 발견하고 유년의 기억을 환기시키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파리를 생각한다>에서 지은이는 걷는 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탐구하는 글을 걷기의 철학으로 따로 엮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제가 일하는 단체 회원들과 람사르 총회 때문에 더 유명해진 습지 창녕 소벌(우포) 둘레 길을 걸으며 이 책 ‘걷기의 철학’펴 나오는 몇 구절을 읽어주었습니다.

“걷기는 두 발로 서서 자신의 다리를 움직여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주체적 행위다. 인생행로라는 말이 있듯이 산다는 것은 길을 따라 걷는 행위다.......인생을 마감하는 일은 걷기를 마다하고 한 장소에 머무르는 일이며 그것은 영원히 눕는 일로 끝난다.”

“니체는 생각은 걷는 발의 뒤꿈치에서 나온다며 걸으며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반면, 폴르베르는 걸으면 생각이 달아나버린다며 자기 방의 책상 앞에서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의 말이 다 맞다. 책상 앞에서는 하나의 생각에 깊이 빠질 수 있고 길을 걷다 보면 묻혀 있던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책상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야말로 걷기가 필요하다.”

“철학자들에게 걷기는 자연을 만나고 역사와 삶의 의미를 생각하며 작고 좁은 마음의 자아를 더 큰 세상에 연결시켜 스스로를 확장시키는 하나의 예식이다. 그래서 산책로가 없는 도시에서는 철학과 사상이 만들어지기 힘들다.”

 

칸트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코스를 산책하여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합니다. 독일에는 ‘철학자의 길’이 있는데, 막스 베버와 하이데거를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이 걸었으며 교토에도 철학자의 길이 있다고 합니다. 철학자뿐만 아니라 많은 문인들과 음악, 미술을 하는 예술가들이 산책을 통해 영감을 얻었다는 것이지요.

근대 이후 사람들은 자연으로만 둘러싸인 숲속을 걷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산책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일자리, 학교 등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서 살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도시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현실적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지요.


정수복 교수는 도시의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 즐겁게 걸을 수 있는 도시라야 살기 좋은 도시의 조건을 갖추는 것이라고 합니다. 풍경은 원래 자연에 있었지만, 이제는 도시도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는 것 입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걸어야 도시를 알게 되고 도시를 알게 되면 시민으로서의 권리의식과 책임의식도 싹틀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도시를 알게 디면 광장에 모여 토론이 일어나고 거리의 정치가 가능해진다는 것 입니다. 심지어 그는 세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책은 그 자체로서 탈자본주의적이라고 합니다.

“체제가 요구하는 속도가 아니라 자신의 요구에 맞추어 자신의 리듬으로 걷는 산책은 그 자체로 비자본주의적이다. 자본주의는 사람과 상품과 정보의 빠른 이동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산책은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로부터 벗어나는 순수한 삶의 순간이다.”

산책이야말로 출근, 퇴근, 출장, 배달과 같은 걷기와 달리 속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수한 걷기라는 것이지요. 아울러 앞만 보고 걷지 않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기도 하구요.

걷기는 그 자체로 탈자본주의적이다.

한편, 이 책에는 살기 좋은 도시, 걷기 좋은 도시의 크기에 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걷기에 좋은 도시 파리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에 적당한 규모의 도시라고 합니다.

“파리의 면적은 105제곱킬로미터로 런던의 19분의 1, 로마의 15분의 1, 베를린의 9분의 1, 서울의 6분의 1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다........동서 11.5킬로미터, 남북 9.5킬로미터, 둘레 36킬로미터의 타원형 모습을 하고 있는 파리 시내 안에는 온갖 종류의 요소들이 저마다 자기 자리를 잡고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도시의 크기뿐만 아닐 파리는 건물의 높이와 도로 폭 마저도 사람들이 기분 좋게 걸으면서 도시풍경을 감상 할 수 있도록 도시계획이 되어있다는 것 입니다. 아울러 파리의 거리는 역사의 저장소이기 때문에 파리를 걷는 일은 역사를 읽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 입니다.

걷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이 책의 제목이 파리를 걷다가 아니라 <파리를 생각한다>인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것 입니다. 저의 책 소개는 주로 걷기의 철학, 걷기의 의미를 소개하는 쪽으로 치우쳐버렸습니다.

이 외에도 <파리를 생각한다>에는 파리를 걸었던 유명 인사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걷기 좋은 도시, 살기 좋은 도시 파리에 담긴 이야기, 파리의 도시 역사와 파리의 도시미학에 관한이야기, 그리고 파리를 즐기는 파리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와 같은 더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많이 있습니다.

살기 좋은 도시에 대하여 고민하시는 분들에게는 ‘파리’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비춰볼 수 있는 좋은 책읽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게, 높게 만드는 것이 좋은 도시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도 꼭 권해드리고 싶은 책 입니다.



 


파리를 생각한다 - 10점
정수복 지음/문학과지성사